◈ 115화. 마왕성 (1)
드워프들이 조금 더 본격적으로 ‘활동’에 돌입했다는 소식.
여기서 활동은 당연하게도.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를 사냥하는 것이었다.
아니지, 이 경우엔 쓸어버린다는 표현이 맞겠군.
하이엘은 섬뜩한 말을 고상하게도 뱉어냈다.
“비행정에서 쏟아지는 불길이 악마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습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에서 처음으로 기계탑을 목격했을 때도 느낀 거지만.
드워프들의 기술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사실 백 마디 말보다 천하의 마탑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
한마디가 더 와닿는 설명이겠지.
그러나.
“그에 따라 악마들의 저항도 거세졌습니다. 새로운 세계수의 출현 이후. 달라진 아르카나 대륙의 기세를 다시금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어지는 하이엘의 말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마왕이 날뛰기 시작했단다.
그것도 동시에 셋씩이나.
“세 마왕들이 서로 힘을 합하거나 연대하지는 않았지만, 각자의 힘이 정점에 이른 상황. 드워프들의 비행정 또한 하나의 마왕 앞에서 가로막히고 말았습니다.”
반격의 서막을 올리고.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가동시키고.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웠다고 한들.
아르카나 대륙은 여전히 악마의 손바닥 위.
지금도 보다시피.
고작 마왕 셋이 움직였을 뿐이거늘.
아르카나 대륙에 불던 반격의 바람이 잦아들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마왕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대격변 이후 처음이라는 것을.
‘그쪽도 쫄리는 거겠지.’
그런데 말이야.
너희 실수했다.
마왕, 그것도 한 번에 셋씩이나 부활해 준 덕분에.
이건 영락없이 ‘대사건’이 됐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을 뒤흔들 만한 대사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런 대사건들엔 어떻게든 플레이어들이 개입할 수 있었거든. 나는 아득한 기억……. 어디 보자, 10년 하고도 수년 전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당시 제국의 정복 전쟁만 하더라도.’
그 당시엔 대사건이었으니까.
악크샨에 처박혀 있던 나를 포함.
아르카나의 모든 플레이어에게 퀘스트가 주어졌었다.
제국 혹은 제국의 반대편.
선택한 세력에 붙어서 활약하고 기여도를 쌓아 퀘스트가 끝난 뒤 그에 따른 보상을 받았었지. 그러니까 내가 괜히 설레발을 떤 게 아니란 말씀이시다.
‘하나면 몰라도 셋? 무조건이지. 이건.’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음 정기 업데이트에선 어떤 식으로든 마왕이 등장하리라고.
물론, 방금 말했던 것처럼 마왕은 셋이니까.
‘어떤 녀석이 걸릴 진 알 수 없다.’
게다가 그 마왕의 수준이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데카라비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는 것 정도겠지.
데카라비아는 엄연하게 현실에 소환된 프로스트에서 강림했었다.
현실이 아무리 시궁창이라도, 이미 악마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아르카나 대륙보다는 못하겠지.
아르카나 대륙에서 부활한 마왕이야말로 진짜 마왕의 포스를 뿜어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악마든, 마왕이든. 상관없다.”
당연하게도 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긍지는 모순적이게도 악마의 앞에서 가장 드높아진다.』
“그런 마왕이 하나가 됐든, 셋이 됐든. 상관없다.”
그랑펠의 설정?
물론, 영향이야 있겠지.
그러나 그 설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동안 나도 성실하게 발버둥을 쳐왔단 말씀이시다.
너희가 아르카나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 것보다도 훨씬 더!
[권한] 기능을 활성화한 유스라 왕국과 프로스트.
마탑.
그리고 여신교의 성지, 뮤온까지.
그 확실한 빽…….
아니, 근거들이 내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떨구지 않는 고개.
반듯하게 세운 허리.
당당하게 편 어깨까지.
내가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도록.
나는 태연하게 말을 끝맺었다.
“내겐 사냥감에 불과하니까.”
계약 관계끼리는 통하는 게 있다는 것인가.
하이엘이 진심을 담아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저 또한 받은 이름에 부족하지 않은 결과를 보이겠습니다.”
……마음은 알겠다만.
이름을 붙여준 건 그만 언급하는 게 좋겠다.
특히나 타인에게 그 풀네임을 말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까지 사사로이 신경 쓰는 성격은 되지 못했으니.
나는 곧장 해야 할 일에 돌입했다.
해야 할 일이라고 하니까 거창해 보이지만 간단하다.
‘균열에 진입했으면 클리어하고 나가야지.’
다음 정기 업데이트 때까지도 며칠 남지 않은 지금.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가 적다고 해도 티끌 모아서 태산이 되는 법이다. 게다가 이 균열에서는 써먹을 수 있는 아이템이 꽤 눈에 띄었다.
[독성 포자의 쉼터]
독약의 재료가 되는 맹독 식물부터.
그 독초(毒草)들 사이에서 자라는 희귀한 비약초까지.
그래, 역시나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나만 잘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점검해두는 편이 옳겠군.
적정 레벨 350, [독성 포자의 쉼터] 정도면……. {고유 정령}으로 거듭난 하이엘의 전력을 살펴보기에 적합한 수준이지 않을까.
“하이엘, 길을 열 수 있겠나?”
무엇보다 이런 수준이라면 [천적관계]가 발동하지 않아도 나 혼자서도 돌발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악마 사냥꾼이란 나사 빠진 클래스라도 390레벨을 허투루 먹진 않았단 거지.
그런데.
“뜻대로 길을 열겠습니다.”
……뭐냐, 이거.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흠칫하고 말았다.
무언가 대단한 행동을 한 아니었다.
하이엘은 그저 우아한 손짓으로 허공을 가로저었을 뿐이었거늘.
파사삭─
사사삭─
스스스─
일대에 가득했던 [LV.300~LV.350] 식물계 몬스터들이 바스러졌다.
흙으로 돌아가 버렸다……!
사실 솔직하게 기대하기는 했다.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부터가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가. 그 호들갑을 통해서 {고유 정령}이 계급을 초월한 정령이란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으니까.
허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그래서 적당히 기대했지만.
그러나 이건 처음에 품은 기대 그 이상이잖아.
하이엘이 입을 열었다.
“이름을 하사받기 전까지는 그저 축복을 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면. 이름을 하사받은 뒤엔 축복을 거둬들이는 능력 또한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이엘은 어디까지나 숲의 정령.
‘식물 한정으로 유효한 능력이겠지만…….’
그걸 참작하더라도 위력적인 능력이었다.
흡족하다.
하이엘의 성장 자체만으로도 흡족하거늘.
나는 저 {자연}에 새로운 개념을 더해 [『{기이}』]로 활용할 수도 있었으니까.
“훌륭하구나.”
그랑펠의 높은 기준에서도 합격점이 나올 수밖에.
하지만 이어지는 하이엘의 대답에 나는 입을 닫았다.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거든.
“하이엘 크리시아드 포시즌 리프. 하사해 주신 이름에 걸맞게. 저는 저들에게 따뜻한 봄이 될 수도, 혹독한 겨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걸 결정하시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십니다.”
참으로 충직하고 든든한 말이었거늘.
저 빌어먹을, 작명 센스…….
나는 심히 낯뜨거운 기분이 솟구치고 말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내색은 없다.
나는 뻔뻔하게도 말했다.
“곧 그 능력을 펼칠 때가 올 것이다, 하이엘.”
이런 전력이라면 곧 직면하게 될 대사건.
마왕과의 전투에서도 하이엘은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과거를 잊기 위해선.
결국, 현실을 충실하게 사는 것밖에 없다.
나는 하이엘이 연 길로 걸음을 옮겼다.
또각─
*
프로스트.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던 프로스트엔 활기가 넘쳤다.
피와 시체가 즐비했던 거리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모험가들로 인산인해였다.
“물론, 그 풍경이 낯설기는 하다만.”
프로스트의 성채.
절차에 따라서.
프로스트의 영주 대행 업무를 수행하던 하르콘은 잠시나마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프로스트의 전경을 바라보게 될 줄이야.
“이것도 슬슬 적응되는군.”
그래, 낯선 풍경조차도 적응되고 있었는데.
어째 뻐근한 몸은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르콘은 괜히 어깨를 돌렸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네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이었거늘.
책상에 앉아 깃털펜만 끄적거리고 있었으니까.
좀이 쑤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선에서 처리하지 못하면 경에게 일을 떠넘기게 되는 거니까.”
호열에게 또 그런 민폐를 끼칠 순 없는 노릇.
그런 의미에서 하르콘은 호열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하르콘은 호열이 어떤 일과를 보내는지, 한때나마 지켜봐서 알고 있었으니까.
오전에는 검술 훈련.
오후에는 유스라 왕국의 안건 처리.
밤부터 새벽까지는 마탑에서 연구.
게다가 프로스트엔 모험가들이 가득했으니까.
모험가들을 통해 전해 듣는 이 세계의 소식도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호열의 활약이 전해지는 것이었다.
하루 간격이면 그래도 양반이었지.
고작 몇 시간.
아니, 몇 분 간격으로 호열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어댈 때도 넘쳐났다.
“장담하는데 경은 황제 폐하보다 피곤한 삶을 살고 있어.”
호열과 황제.
둘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하르콘이기에 할 수 있는 말.
그 말에 공감하는 건 하르콘만이 아니었다.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광장 앞 모퉁이, 황금 송아지 주점.
TV 스크린이 가장 잘 보이는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락키드였다. 그 덩치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뒤에서 보이는 건 반쪽짜리 스크린뿐.
“야! 안 비켜어어?”
그나마 그림자 용병단장, 키치가 있을 땐 다행이었다. 안하무인 그 자체인 락키드라고 할지라도 단장인 키치의 말이라면 듣는 척이라도 했으니까.
그러나 오늘 락키드는 혼자였다.
“……저것 좀 어떻게 치워버릴 수 없나.”
“미쳤어? 저 괴물한테 어떻게 말을 걸어.”
“그래, 오늘은 그냥 얌전한 거에 만족하자.”
“아씨. 큰 화면으로 봐야 하는데.”
속닥거리는 플레이어들의 목소리.
뒤통수에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
그러나 락키드에게 그딴 걸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보면 볼수록…….”
다혈질, 더러움, 괴팍함 등등.
락키드의 성격에 관한 평가는 갈릴지 몰라도 그 실력에 관한 평가가 갈리는 법은 없었다.
콜로세움의 우승자, 뒷세계의 거인, 전투 기계……. 락키드에겐 칭송이나 다름없는 칭호들이 그 실력에 관한 증거였다.
“미친 양반이시구만.”
꿀걱─
내려놓는 커다란 술잔.
천하의 락키드에게도 미쳤다고 인정을 받은 건 당연하게도 호열이었다. 락키드는 스크린 속에서 재생되는 호열의 영상을 지켜봤다.
전투 기계란 칭호답게.
기계처럼 호열과의 전투를 그려봤다.
전투의 조건 설정은 실전과 다름없게.
‘특급 암살 의뢰. 표적은 이호열.’
일단, 전투에 앞서서 알카리.
그 노인네에게서 갖가지 포션을 뜯어내야겠지.
온갖 속성 저항 포션을 그것도 최상급으로 구해야 하니까.
시작하기도 전부터 성공 보수가 거덜이 나겠군.
‘물론, 마법 저항력을 높인다고 하더라도.’
그 피해를 완전히 상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호열은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락키드는 호열의 검술 실력을 알고 있었으니까.
“에휴. 씨벌.”
몇십 번이고 전투를 상상해 봐도.
도저히 호열에게 이길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호열의 태도였다.
자신감 넘치는 저 오만한 표정.
여유가 드러나는 게.
호열은 아직도 자신의 전력을 드러낸 적이 없는 거겠지.
“근데 기구하구만 그쪽도.”
아르카나 대륙과 달리 모험가들의 세계엔 제약이 많았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막대한 힘은 곧 자유나 다름없었지만.
이쪽 세계에서 힘에는 쓸데없는 관심과 책임이 따랐다.
딱히 배운 게 아니라 호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AAU 측은 이른 시일 내에 이호열 플레이어와 접촉…….”
타인의 관심과 시선을 즐기는 편인 자신이었거늘.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락키드는 잠깐 상상해봤다.
살아 움직이는 그림 속.
여자가 떠드는 게 호열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면 어떨까?
그러자 저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여러모로 피곤하겠어.”
락키드조차 호열이 짊어진 무게를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락키드보다 호열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의 심정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같았다.
그러니까 호열이 보낸 서신이 자신들 앞으로 도착한 순간, 그들은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하르콘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
“너무 평화롭다 했어. 내 팔자가 그럴 리가 없는데에에.”
키치와 그림자 용병단.
“모든 순간, 여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길.”
탈림과 여신교단 성지, 뮤온.
“기다리던 소식이었습니다.”
양피지를 통해 호열의 뜻을 알게 된 마탑까지.
각자 움직이는 이유는 달랐지만, 그들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서신의 내용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기사단.
아르카나 대륙의 흑막.
아르카나 대륙 최대의 종교.
아르카나 대륙의 정점.
하나하나가 거대 세력.
그런 이들이 고작 서신의 내용에 지레 겁을 먹고 내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설령 그 내용이 마왕(魔王)과 관련된 일일지라도.
.
.
.
돌아오는 목요일.
아르카나 정기 업데이트 내역에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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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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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마왕성이 나타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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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
그것도 세 채씩이나.
세상은 그제야 AAU의 발표를 재평가했다.
-“이제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의 위협은 끝났습니다.”
그랬다.
이건 예측 밖, 규격 외의 업데이트였다.
마왕성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라니.
예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세계는 곧 알게 됐다.
“……잠시만요. 저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조차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한결같은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낸 호열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호열은 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시각.
프로스트.
유스라 왕국.
뮤온.
그리고 마탑에서 포착된 움직임.
세계가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서, 설마 저들 모두가 이호열 플레이어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전개에.
.
.
.
단순한 사냥이 목적이 아니다.
마왕이 전면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금.
필요한 것은 구질구질한 사냥이 아닌 확실한 승전보.
그렇기에 전했던 서신이다.
그렇다.
오늘 나는.
아니, 우리는.
마왕을 압살(壓殺)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