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14화 (46/489)

◈ 114화. 작명 (2)

일단락된 성지, 뮤온의 사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시한폭탄이 해제된 셈이었다.

플레이어, 가이버를 공격한 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뮤온을 둘러싸고 때아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근데, 거기서 마탑의 수석 마법사가 딱!”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마탑의 개입.

언제 그랬냐는 듯 문을 개방한 뮤온.

그리고 조금도 예상치 못한 촉수 괴물의 등장까지.

급변하던 뮤온의 상황은 플레이어들에 의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성기사들의 돌격ㄷㄷ]

[조회수 : 132,407,117]

수만 명의 성기사들.

그들이 촉수 덩어리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

그러니 덧붙여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성기사들을 손짓 하나로 지휘하는 호열의 모습을.

“진짜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다니까요?”

“본 사람만 알지. 그 기분.”

“마음대로 영상 공개할 수 없는 게 아쉽습니다. 정말.”

물론, 영상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호열이었으니까.

아무리 조회수와 어그로에 미친 넷튜버라고 하더라도.

물불을 가려야 할 줄 아는 법.

요즘 같은 때에 마음대로 호열의 영상을 올렸다간 관심은커녕 허락은 받고 올리는 거냐며 역풍을 맞았으니까.

호열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는 호열이 찍힌 영상을 공개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 광경을 라이브로 지켜본 이들이 몇 명인가?

그 수많은 플레이어, 시청자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이호열, 그는 정말 급이 달랐다고.

“수만 명의 목숨이 내 손에 달린 거 아냐! 나였으면 부담감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을 텐데……. 아주 그냥 행동에 거침이 없으시던데.”

“근데 성기사들 없이도 혼자서도 사냥할 수 있었을 것 같긴 하더라고요. 그 거대한 촉수 덩어리를 단번에 얼려버리는 거 보셨죠들?”

“그래서 그 스킬 정체가 뭐래요? 엥?! 빙결마법사들도 모를 정도의 고위 마법이라고요? 진짜 끝이 없네. 괜히 수석 마법사가 된 게 아니라는 건가.”

그뿐만 아니었다.

전투가 끝난 뒤.

호열과 여신교의 성기사단장이 나눈 대화도 화제가 됐다.

성기사단장, 탈림 에베르.

인류에겐 적대적인 말을 쏟아내던 그가.

호열 앞에서는 정중하게 무릎을 꿇은 것도 모자라서.

“딱 목소리 깔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데!”

-아니 그냥 책임만 진다고 한 게 아니었음ㅋㅋㅋ

-ㄹㅇ 그 책임 심판이라고 해도 받아들인다고 했지??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거임???

책임, 더 나아가서 심판을 받겠다고 선언하다니.

그 파장은 호열이 보여준 전투보다도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여드는 인파 탓일까?

호열과 탈림은 자리를 옮겼으니까.

그 뒤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결국, 이번에도 이호열 플레이어가 해냈군요.”

호열이 해냈다는 것.

왜, 지금만 하더라도 호열이 없었더라면.

나서서 촉수 덩어리를 처치하지 않았더라면.

뮤온의 진입한 플레이어들의 목숨이 지금처럼.

안전하리라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일찍 알아차린 이들이 있었다.

남태민, 레오니, 히사기였다.

“봤지? 호열 씨 걱정할 시간에 우리만 잘하면 된다니까!”

“저 수준을 따라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 닥치고. 휴식 끝. 이렇게 쉬고 있을 여유는 없어.”

“……뭐야, 저거? 방금까지 제일 난리를 치더니.”

“난리? 누가? 언제? 내가?! 지랄. 아니거든?”

현재 호열에게 자신들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

호열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그들은 뮤온 사태 속에서도 성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제시 하인네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런 빙결 마법까지! 역시, 대단하세요!”

아는 만큼 보이는 호열의 경지.

정작 제시보다 유난을 떠는 건 고깔모자였다.

고깔모자가 들썩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벌써 경지에 올라섰을 줄이야. 제자야, 갈 길이 멀구나.

또한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뼈아프게 체감하는 이들도 있었다.

AAU였다.

그들은 지부 회의에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뮤온 사태로써 확실해졌습니다. 아르카나의 업데이트는 우리 AAU가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습니다.”

흐르는 침묵─

사실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던 몬스터들이 등장했을 무렵부터.

아니, 거슬러 올라가면 균열에 악마족 몬스터가 등장했을 때부터겠지.

누군가 쓴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벅차했던 저희인데. 또 하나의 세계가 된 지금, 아르카나 대륙의 흐름을 예상하는 건 불가능하죠.”

AAU는 자신들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능함이 더욱더 뼈저리게 다가왔다.

또 누군가 말했다.

“공식 발표가 머지않은 것 같군요.”

공식 발표.

AAU의 한계를 세계에 알리는 것.

그 여파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AAU의 정보만 기다리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상당했으니까.

그러나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울했던 회의가 끝났다.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는 심호흡했다.

“……인류에게 살아날 구멍이 있나.”

그는 아르카나의 개발자였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 당시엔 서비스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서비스가 예정됐던 콘텐츠들은 많았다.

많은 예시를 들 것도 없겠지.

단 하나, ‘용(龍)’.

그래, ‘드래곤’만 하더라도.

“언젠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어?”

균열에든, 현실에든 말이야.

박민재는 그 드래곤에 맞서는 인류를 떠올려봤다.

시뮬레이션을 그려봤다.

“괜히 빌어먹게 세게 개발해서는.”

후우─

그럴수록 나오는 건 깊은 한숨뿐이었다.

플레이어들이 레벨업을 하고, 인류가 군대를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남는 건 패배. 혹은 패배와 다를 바 없는 승리뿐이겠지.

그러나 박민재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목격한 살 구멍.

유일한 가능성 한 가지를.

“……이호열.”

그건 바로 플레이어 이호열이었다.

그에 관해선 AAU도 확신할 수 있는 게 무엇 하나 없었다. 이호열의 레벨은 물론, 그의 클래스까지도. 그러나 그가 보여준 행보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쪽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뮤온 사태만 하더라도.

호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사람이라면 찰나의 감정은 숨길 수 없는 법. 갑작스러운 촉수 덩어리의 등장에도 호열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던 게 그 증거겠지.

“나 같은 지독한 현실주의자한테도 희망을 품게 하는군.”

사람들이 어째서 이호열에게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내, 박민재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래. 희망이고 뭐고 되는 데까진 해봐야 하지 않겠어?”

그래.

가능성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결국엔 모 아니면 도였다.

박민재 또한 물불을 가리지 않을 준비가 됐단 말이었다.

그런 박민재가 할 수 있는 일은 간단했다.

유일한 희망, 호열에게.

무엇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

그러나.

‘AAU는 이미 각국의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AAU가 전면으로 나설 수는 없다. 게다가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만 내부 정보를 제공한다는 건……. 설령 그게 이호열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을 견제할 목적으로도 반대할 이들이 넘쳐나겠지.’

그럼에도.

박민재는 다짐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터는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개인, 박민재의 긍지를 건 일탈이라는 거지.”

물론, 그 일탈은 첫걸음부터 쉽지 않아 보였지만.

“그나저나 이호열 씨랑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모자라서……. 앞으로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게 될지도 모른단 소리잖아.”

그 차가운 눈빛.

까칠한 태도.

끈질긴 기자들도, 넷튜버들도 벌벌 기는 이호열.

박민재는 결국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뱉어냈다.

“빌어먹을 팔자. 반 백 살 넘어서 예절 교육부터 다시 받게 생겼군. 어떻게 몸에 밴 습관부터 좀 빼야겠는데…….”

문득, 그가 지나가던 두 사람을 붙잡고는 물었다.

“야, 수겸아. 그리고……. 그래! 성현준 사원.”

“네? 박 지부장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내가 꼰대냐?”

“……예? 갑자기 그, 그게 무슨?”

“어허. 묻는 말에만 네, 아니오로. 내가 꼰대냐고.”

물론,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인 법…….

*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조금 억울하다.

수면 시간도 길지 않은데.

어째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뚝뚝─

장담하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육체 단련 때문일 거다.

클래스 퀘스트는 바뀌어도, 언제나 그 첫 번째 목표를 차지하고 있는 목표 말이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절멸]

악크샨과 악마 사냥꾼의 절멸.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성전에 얽힌 진실을 파헤쳐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30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2,000회 (성공)

●턱걸이 1,000회 (성공)

●버피 테스트 500회 (진행 중)

[근력], [민첩] 스탯도 레벨과 같았다.

절대적인 수치가 높아질수록.

1포인트를 올리기 위한 훈련량이 달라진다는 뜻.

목표치는 언제나 숨이 넘어갈 정도의 수준이었다.

“……가뿐하군.”

가뿐하긴 개뿔이 가뿐하시다.

오늘도 몇 번이나 기절할 뻔했으면서 그놈의 허세는.

그나마 이전과 다르게 나아진 건 약빨.

비약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랄까.

달칵─

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적절한 휴식이 근성장에도 도움이 되는 법이지.”

시원한 얼음물도 모자랄 판에 쓰고 뜨거운 차라니.

이게 죽을 맛이구나 싶다.

그래도 몸에 좋은 거니까 꾹 참아본다.

이거라도 먹어야지 몸이 버텨줄 테니까.

나는 숨을 고르면서 다음 퀘스트 목표를 확인했다.

─성전에 참가한 세력을 파악하라. (진행 중)

●여신교단의 성자와 조우하라. (성공)

●여신교단 성녀의 실체를 파악하라. (성공)

●여신교단 성녀로 위장한 악마를 사냥하라. (성공)

●마탑의 원죄를 파악하라. (성공)

여신교와 관계된 목표는 전부 성공했거늘.

[악크샨의 절멸] 퀘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아직도 악크샨의 뒤통수를 친 세력이 남아있다는 거겠지. 문득,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 사냥꾼들, 다들 하나같이 성격이 괴팍했지.’

왜, 그 말이다.

당신이 심연을 바라볼 때.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특히 훈련장에선 악마가 따로 없었지.’

악마 사냥꾼들에게 그것만큼 잘 어울리는 말도 없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친절한 NPC와 비교되던 악마 사냥꾼들의 태도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았으니까.

‘그런 걸 멋있다고 생각하다니. 취향 참.’

물론, 그 당시 내겐 그런 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단순히 밉보여서 뒤통수를 맞았다?

아무리 혹시나 해도 있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건.

“이 또한 하찮은 족속의 농간이겠지.”

결국, 기승전악마 때문이겠지.

아르카나 대륙 최대 종교, 여신교의 성녀부터가 악마였으니까.

악마의 마수에게서 안전한 지역과 세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의 휴식은 길지 않았다.

달칵─

내려놓는 찻잔.

……마저 채워야지, 버피 테스트 500회.

과대평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한시라도 발버둥을 멈춰선 안 되는 법이다.

.

.

.

물론, 밤낮으로 고생하는 내게도 희소식은 있었다.

정령학파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그녀가 양피지로 전해온 서신.

그 글줄에 뜻하지 않게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독성 포자의 쉼터]

[적정 레벨 : Lv.350]

[붕괴 진행도 : 0.1%]

나는 균열에 진입했다.

업데이트에 명시되지 않는 일상적으로 생성되는 흔한 균열.

내 레벨과 적정 레벨을 고려했을 땐 출몰하는 몬스터 수백 마리를 사냥해도 레벨 하나 올리기 어렵겠지.

그러나 내 목적은 레벨 업이 아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그 순간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마력.

고오오─

이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님프였다.

그것도 그랑펠의 심미안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이 완벽한 자태를 자랑하는 님프.

그랬다.

나는 페이얀이 전해온 정보대로 님프에게 이름을 붙였다.

내가 알고 있는 정령학에 관한 지식은 수박 겉핥기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정령에게 이름이라는 게 그런 의미가 있을 줄은 몰랐지.’

페이얀의 말에 따르면.

정령에게 있어서 이름은 곧 그릇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님프를 계약 후에도 계속해서 님프라 부른 탓.

님프는 세계수의 발아라는 엄청난 업적을 세워 {고유 정령}으로 거듭날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겉만 그럴싸하게 변화한 게 전부였단 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땐 나도 모르게 안도했었지.

‘내 마력이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니까.’

그러나 그 안도가 너무나도 빨랐다.

나는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 해괴한 이름을 지어낸 나의 작명 센스를.

님프가 고아한 인사를 건네온다.

“하이엘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그랬다.

‘하이엘’.

정확하게는 ‘하이엘 크리시아드 포시즌 리프’.

그랑펠 못지않게 긴 풀네임.

그것이 바로 내가 붙여버린 님프의 이름이었다……!

……젠장.

하이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건만. 당연하게도 내색은 없었다.

나는 뻔뻔하게도 하이엘에게 용건부터 물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정황은 어떠한가.”

곧장 이어지는 하이엘의 보고.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이내,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이엘이 전해온 소식에, 불현듯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사건이라면 어쩌면…….’

……다음 정기 업데이트로 이어질 수도 있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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