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13화 (45/489)
  • ◈ 113화. 작명 (1)

    뮤온의 외곽.

    마르셀로와 선임 마법사 몇몇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 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희도 합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경의 신호가 있기 전까진 대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르셀로 수석께서 그러시다면야.”

    그 계략에 놀아난 경험 덕분일까.

    뱅그릿은 악마란 족속을 어느 정도나마 알게 됐다.

    악마를 상대하는 건 능력을 떠나 언제나 방심해선 안 되는 일이란 것 또한.

    뱅그릿은 과거, [깨진 차원의 틈]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내가 언제 그런 생각을 품었는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자신은 악마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나만 그랬던 거라면,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여기겠지만.’

    원로 마법사들도 악마 탓에 판단력이 흐려지시지 않았던가.

    ‘이호열 수석께서도 조심하셔야 할 텐데.’

    그의 능력이야 의심할 나위가 없었지만…….

    방금 말했다시피 상대는 악마였다.

    그것도 여신교를 농락한 악마.

    뱅그릿이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하자 마르셀로가 말했다.

    “경의 뜻이 어떤지를 몰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순 없지만.”

    “……?”

    “그리 걱정할 건 없을 겁니다.”

    뱅그릿과 달리 마르셀로는 알고 있었으니까.

    호열이 마법사가 아닌 악마 사냥꾼이란 사실을.

    악마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유일한 천적 말이다.

    “이건 경의 전공분야나 다름없으니까요.”

    ……악마를 상대하는 전공?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람.

    뱅그릿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지던 그 순간이었다.

    “!!!”

    쿠구구궁─

    진동과 함께 저 멀리.

    뮤온의 중심부에서 솟구치는 촉수가 보였다.

    그 크기가 멀리서 봐도 심상치 않았다.

    “가증스럽군.”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는 감정을 억눌렀다.

    마탑에 마수를 뻗쳤을 때부터 짐작은 했거늘.

    아르카나 대륙은 정말 악마들에게 놀아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완벽하게 감정을 추스르는 건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 바람에 마티스의 반지가 검게 물들었다.

    “우리가 저들을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군요.”

    마탑이 미리 움직일 수 있었다면.

    아르카나 대륙이 이 지경으로 엉망이 되진 않았을 터.

    분노를 곱씹는 마티스에게 마르셀로는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늦었지만 바로 잡는 것 또한 저희 몫이지요.”

    그랬다.

    원래라면 저 악마를 처분하는 것 또한 자신들의 몫이었거늘.

    어째서인가, 이번에도 경께서 나서고 말았다.

    ‘알 순 없지만, 행동에 뜻이 있으신 거겠지.’

    그러나 이내 마르셀로는 호열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느샌가 달라진 성기사들의 눈빛.

    이윽고 죽음을 불사하고 악마에게 달려드는 그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떠오르는 호열의 생각.

    ‘……설마 여신교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신가?’

    성녀에게, 악마에게 농락당한 여신교가 최후의 긍지를 지킬 수 있도록. 경께서는 저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악마를 처분할 기회를 주신 것인가……!

    마찬가지로 호열의 뜻을 짐작한 마티스.

    그가 마르셀로와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내는 감탄하듯 말을 뱉었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께서는 정말이지…….”

    “저희들과는 다른 차원의 사고를 하시는군요.”

    마르셀로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했다.

    ‘내가 만약 경이었다면…….’

    악마에게 놀아났다고 해도, 성전에서 악크샨을 배신한 여신교는 경에게 있어서 원수나 다름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감정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호열은 어떠한가?

    ‘원수, 악마의 앞에서도 여신교의 긍지를 생각해 주시다니.’

    감탄할 수밖에 없었지만.

    생각해 보면 처음이 아니었다.

    경께서는 마탑의 원죄 또한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으셨던가.

    그러니까 이해를 하지 못한 건 뱅그릿과 화염마법학 벤쉬 윌리엄 선임뿐이었다.

    둘 또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 답답함을 참다 못해서 작게 속삭였다.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걸까요?”

    “차원이 다른 사고? 그것도 못 알아듣는 우린 뭐가 되는 거지?”

    “……그냥 솔직하게 여쭤보는 게 어떨까요?”

    “진심입니까, 뱅그릿 톰 선임?! 제가 지난번에 마티스 선임과 균열에 진입해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으면서요? 진짜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숨이 막혀서!”

    *

    여신교단 성기사단장, 탈림 에베르.

    그와의 대화에서 새롭게 알아낸 사실은 딱히 없었다.

    그를 포함해서 뮤온의 모든 이들은 네프리피트의 [상태이상]에 휘둘렸던 것뿐이었으니까.

    달칵─

    [30분간 마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해하네.”

    그래, 까라면 그저 깔 수밖에 없었단 거겠지.

    마탑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뮤온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물론, 성전에 관심조차 없던 마탑과 다르게.

    뮤온은 성전에 발을 들였다가 뺀 모양새였으니까.

    마탑보다 심하게 악크샨의 뒤통수를 때린 거긴 하다만.

    ‘내 뒤통수는 아니잖아.’

    10년이 훌쩍 넘는 공백.

    거기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그랑펠의 성격.

    마지막으로 무거운 긍지가 있었으니까.

    “악크샨은 그저 최후까지 긍지를 지켰을 뿐.”

    성전(聖戰).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은 악마와 싸우다 전멸했다.

    설령 악마의 계략에 빠져 절멸했다고 한들.

    그들의 긍지가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동정하는 것?

    적어도 악마 사냥꾼들끼리는.

    서로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랑펠의 긍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물론, 나의 복잡한 심경을 탈림은 알 수 없으니.

    탈림에게 나는 그저 너그러운 악마 사냥꾼으로 보이겠지.

    그 증거로 탈림은 감격해 말을 이었다.

    “저희 여신교는 더 이상 악마에게 놀아나지 않겠습니다. 성녀의 정체를 간파하신 경이시라면. 저희가, 여신교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도 알고 계시겠지요.”

    [천적관계]가 있는 이상.

    나아가야 할 방향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역시나 과대평가다.

    그러나 과대평가 또한 내게는 자연스러운 것.

    당연히 뻔뻔하게 납득해 주신다.

    탈림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이제라도 여신교는 지키지 못한 악크샨과의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지키지 못한 악크샨과의 약속.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여신교가 이 성전(聖戰)에 동참하겠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이 악마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현실에도 악마들의 마수가 뻗쳐오고 있는 현재.

    과거 성전의 연장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여신교의 전력을 직접 눈으로 파악했으니까.

    ‘막막했을 거야.’

    수만의 성기사.

    그런 성기사들을 보조하는 사제들까지.

    만약, 그들이 [상태이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실패했다면…….

    전개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갔을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다.

    그런 여신교가 성전에 동참한다는 것.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 마탑에 이어서.

    아르카나 최대의 종교 여신교까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그리고.’

    주고받는, 비즈니스 관계로 얽힌 길드들까지.

    내 지원군들이 많아도 이렇게 많다.

    그러니까 한 가지 사실이 확실해진다.

    나만 잘하면 된다, 이호열.

    너만 잘하면 된다, 그랑펠.

    ‘……제발 겉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대화는 그쯤에서 정리했다.

    뮤온이 현실에 업데이트된 이상.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이야 충분했다.

    여차하면 지금처럼 포탈을 발현하면 되는 일이다.

    “저, 탈림 에베르는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다음엔 내가 차를 대접하지.”

    “……감사합니다. 이호열 경.”

    ……아니, 나야말로 감사하지.

    여신교에 마력 재생력을 향상시켜 주는 비약초 차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없었다면 지금쯤 내겐 포탈 하나 발현할 마력도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까.

    또 한 가지 교훈을 얻었군.

    경지급 마법은 함부로 흉내 내는 게 아니다…….

    내 주제를 알자.

    다짐하면서 나는 포탈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좌표는 마탑.

    네프리피트 사냥으로 상승한 레벨.

    지나간 메시지.

    획득한 아이템까지.

    나름대로 정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

    .

    .

    포탈 너머로 사라지는 호열을 보며.

    탈림은 작게 읊조렸다.

    “모든 일에 여신의 지혜가 함께하시기를.”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

    들리게 기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그러나 탈림이 호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다.

    “저는 믿습니다.”

    탈림은 창밖 너머의 인파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성자의 눈물’에 몰린 이들을.

    호열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여신의 기적 같은 게 아니다.”

    성녀가 악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여신의 기적, 성자의 눈물마저 부정당했을 때.

    자신에게 여신에 대한 믿음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호열은 말했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 또한 없다.”

    그 말에 탈림은 혼자 생각했다.

    ‘어쩌면 경이야말로 여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성녀와 성자의 눈물.

    거짓에 휘둘리던 자신들을 불쌍히 여긴 여신께서.

    호열을 자신들에게 보내주신 게 아닐까, 하고.

    탈림은 쓰게 웃었다.

    “……경께서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시겠지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호열.

    그런 호열이 되려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라니.

    자신이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탈림은 작게 읊조렸다.

    “허나, 양해주십시오. 경.”

    그러고는 뮤온을 바라봤다.

    한차례 소란이 훑고 지나간 뮤온.

    어린 사제들은 충격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자신처럼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자신의 어깨 위엔 저들이 있었다.

    “잠시나마 제가 무너지지 않을 힘이 되어주십시오.”

    물론, 호열이 버팀목이 되어준 만큼.

    자신도, 여신교도 호열에게 더없는 힘이 되어줘야겠지.

    그러기 위해선 결단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런 탈림의 시야엔 여전히 성자의 눈물이 보이고 있었다.

    “우선 여신의 기적, 그 진실을 밝히는 것부터.”

    *

    그나저나 그런 우연이 있을 줄이야.

    ‘착각할 만하지.’

    성자의 눈물.

    샘, 밑바닥에 깔린 ‘드뮨 월석’이 ‘아리아 이끼’의 효과를 이끌어 내고 있을진 상상도 못 했는데. 자연 상태에선 특별할 게 없는 아리아 이끼였으니까.

    진가가 밝혀지지 않은 현재.

    그 가치는 효과에 비하면 거저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지금은 구하려고 구할 수가 없다.

    내가 진작에 모조리 사들였거든.

    왜, 우리 최 여사님 생일 선물을 준비하면서 말이다.

    최 여사님에게 보냈던 비약초 티백.

    그게 바로 아리아 이끼로 만든 티백이었으니까.

    그 효과엔 어째 여사님보다 누나들이 더 난리였다.

    대체 그 차 이름이 뭐냐고.

    농담이 아니라 엄마랑 같이 밖에 나가면 4자매로 착각을 받을 정도라며. 그 기억을 떠올리니까 귓가에 3호, 웬수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어우 시끄러.’

    어쨌든, 탈림이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아리아 이끼의 효과가 밝혀지는 일은 없겠지.

    플레이어들 입장에선 그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 효과를 가진 아리아 이끼를.

    헐값에 팔아넘겼단 사실을 알게 돼봐라.

    ‘나 같으면 억울해서 잠 못 잔다.’

    귀철도 그렇고.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괜히 있다는 게 아니다.

    물론, 아는 게 힘이라고.

    나는 아리아 이끼를 잔뜩 쌓아두고 있었지만.

    “연구에 재료는 부족함이 없어야 하는 법이다.”

    청렴결백의 화신.

    모든 건 탐욕이 아니라 『비약초의 육성법』.

    연구의 일환이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390]

    [능력치]

    근력 : 65 / 민첩 : 70 / 마력 : 335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10]

    성녀, 프레이자.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를 사냥함으로써 10레벨이 상승했다.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든다.

    쏟아지는 과대평가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그래도 봐줄 만한 레벨이 됐다는 게.

    ‘랭킹권이다.’

    그래서인가.

    랭커들이 했던 말도 이해가 된다.

    레벨 업 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요구 경험치가 너무 많다고 징징대던 그 인터뷰들.

    나도 절대적으로 공감되는군.

    딱 10레벨이라니.

    그러나 수만 명의 성기사들과 경험치를 나눴다고 생각하면 또 괜찮은 수치였다.

    물론, 수만의 성기사가 처치에 기여를 했다고 해도. 가장 높은 기여도를 쌓은 건 나였다.

    내가 말이야.

    괜히 유사 경지급 마법을 발현한 게 아니란 말이다.

    [악에 물든 의식용 로브]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네페르피트를 쓰러트리며 획득한 악마의 아이템.

    유니크 등급이지만 제한이 걸려있지 않았다.

    과거의 나였다면 꽝일지도 모른다며 아쉬워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마법부여에도 발을 걸쳐두지 않았던가.

    ‘효과만 쓸만하면 좋겠는데.’

    추출해서 다른 아이템에 부여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아, 악마의 아이템이라고 하니까.

    불현듯 마탑에 뜯겼던…….

    아니, 대여해줬던 악마의 아이템 하나가 떠오른다.

    [흡혈귀 백작의 오브]

    [등급 : 유니크]

    [제한 : Lv.400]

    [효과 : 공격 시, 높은 확률로 추가 피해 적용.]

    [설명 : 흡혈귀의 혈액으로 가득 찬 오브다. 마력과 접촉할 때마다 그 혈액이 터져 나와 대상에게 피해를 준다.]

    아스큐라를 처치하고 획득했던 그 아이템.

    아득히 먼 수치라고 여겨졌던 400레벨까지도 10레벨밖에 남지 않았구나. 장하다, 이호열. 여태까지 어떻게 긍지에 가라앉지 않고 잘도 버텼구나.

    ‘400레벨 달성하면 바로 회수해야지.’

    과거에도 생각한 거지만.

    추가 피해 적용 효과는 그 범용성이 무궁무진했으니까.

    나는 인벤토리 속 귀철 또한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귀철까지 그럴싸한 장비로 제련할 수 있다면.’

    나 스스로 거물이 되는 건 몰라도.

    장비 하나만큼은 거물급으로 맞출 수 있을 텐데.

    물론, 벌써 군침을 삼킬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귀철을 어떻게 써먹을까에 관한 고민은.

    드워프들과 조우한 뒤에 해도 늦지 않겠지.

    좋아.

    그쯤에서 생각을 정리했을 때였다.

    문득, 양피지에 글씨가 떠올랐다.

    스스스─

    .

    .

    .

    “후우─”

    정령학파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그녀는 힘차게 깃털펜을 내려놓았다.

    ……저질러 버렸다!

    그러니 뭐 어쩌겠는가?

    우걱우걱─

    상위 정령의 계약자.

    그 계약 탓에 형편없는 신체의 연비.

    대식가, 페이얀은 습관처럼 쿠키를 씹었다.

    “마르셀로 수석. 우물우물. 전 당신만 믿어요. 우물우물.”

    분명, 걱정만큼 매정하신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겠다?

    걱정하면서도 깃털펜을 끄적인 이유.

    모든 건 이호열 수석에 관한 소문 때문이었다.

    이호열 수석이 정령과 계약했다는 그 소문!

    정령학의 선임으로서 놀라긴 했다만, 그 대화 주제만으로 호열에게 편지를 남긴 건 아니었다.

    또 하나의 소문. 그래, 파이어 드레이크에게 들은 아르카나 대륙의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령의 힘으로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셨더라면…….”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운 그 정령은.

    분명 엄청난 ‘격’의 상승을 이뤘어야 했다.

    아르카나 대륙, 모든 정령이 알아차릴 정도의 격의 상승 말이다.

    그러나 페이얀은 균열에서 소환한 자신의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기본적인 거라도.

    정령학에 관한 지식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이게 도움이 될지, 실례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페이얀은 변명하듯 입을 우물거렸다.

    “막 번거로운 것도 아니고. 정령에게 새로운 이름만 지어주셔도 그 격이 상승하는 거니까. 세계수의 발아라니. 그 정도 업적이면 계급에 얽매이지 않는 ‘고유 정령’이 될 게 분명한데. 게다가 이름을 붙이시지 않을 특별한 이유 같은 것도 없으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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