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상황 파악이 되는가 (2)
뮤온의 상황은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그 소식에 누구보다 촉각을 세운 건 AAU였다.
지부를 구분할 것도 없었다.
모두가 이번 사태의 불확실성을 깨닫고 있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을 그냥 놔둬도 되는 걸까요?”
“무슨 뜻이야, 그거?”
“프레이자라는 변수가 너무 크잖아요.”
정체불명의 존재, 프레이자.
현시점에서 뮤온을 움직이는 건 성녀인 그녀였다. 차라리 뮤온의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고민이 많아지진 않았을 텐데…….
“우리 플레이어분들께서 말한다고 들으시는 분들인가?”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물론, 걱정하는 마음은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지켜보자고. 무엇보다 뮤온에 태도가 달라진 건 마탑, 마르셀로가 움직인 직후였으니까.”
잠시 침묵하고는 모니터를 응시─
“결국, 이번에도 이호열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마탑을 움직인 건 이호열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이호열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뮤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차림새.
그러나 그 행보는 평소보다 더욱 파격적이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흠칫할 정도로.
“……잠깐만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이호열, 그의 앞에 성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누구보다 놀란 건 AAU였다.
프레이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성기사들의 설정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으니까.
“성기사가 무릎을 꿇는다고……. 플레이어에게?”
“대체 쌓아둔 명성치가 얼마나 높다는 거지?”
“아니, 저건 명성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야.”
그래, 명성으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성기사, 그것도 성기사단장이 무릎을 꿇을 정도.
그건 이호열이 여신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단 소리였다.
“여신교단의 퀘스트도 진행했었단 건가?”
“애초에 구현이 되기나 했던 거야, 그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이호열은 대체……?”
그러나 경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쿠구구궁─!
굉음.
갑작스레 무너지는 뮤온의 성채.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촉수 덩어리.
“뮤, 뮤온에 몬스터라고? 뭐야 저거?”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몬스터.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았던 프레이자.
AAU에서 설마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게 프레이자의 실체였나……!!”
몬스터의 정체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
강한지 약한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보통 놈은 아니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뮤온에서 성녀를 사칭하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순 없었을 테니까.
“빨리! 플레이어들에게 연락해!”
미지의 존재.
그 위험성은 짐작할 수조차 없다.
모두가 섣부른 행동을 자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돌발상황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설마 이것도?”
이호열의 존재를.
촉수 덩어리의 존재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그 자세엔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표정과 시선 또한 평소와 같았다.
그리고 그런 이호열의 곁에 성기사가 있었다.
스릉─
-“여신의 이름으로. 검을 뽑아라, 뮤온의 성기사들이여!”
한 명이 아니다.
거대한 촉수 덩어리를 향해 검을 뽑아 든.
수만 명의 성기사들이.
그 광경에 AAU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지부 모든 구성원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입을 열었다.
“이래서야 누가 AAU인지 모르겠는걸.”
젠장, 누가 안티 아르카나란 말인가?
현실을 침식해 오는 아르카나.
그에 대응하고 있는 건 정작 이호열밖에 없지 않은가. 더욱 놀라운 건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으면서도 이호열은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준아, 너라면 저럴 수 있을 것 같아?”
윤수겸은 성현준에게 물었다.
뮤온에 촉수 덩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치더라도. 뮤온은 저 괴물의 아가리 속이나 다름없었다.
이호열은 저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잖아요. 목숨이 걸린 현실.”
아무리 레벨이 높다고 하더라도.
나는 못 할 거야.
성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호열은 해내고 있었다.
아니, 벌써 몇 번이나 해냈다.
생색 한번 내지 않고서는.
그런 이호열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하나.
“저 ‘숭고함’이 성기사들조차 따라나서게 한 건가?”
이호열의 손짓 아래 움직이는 수만의 성기사들.
여신교의 성기사가 외부인.
그것도 플레이어의 명령에 따르다니.
아르카나의 설정에 따르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진짜 믿기지 않는 플레이어야, 이호열……!”
그래, 이 또한 현실이었다.
*
현실이다.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수만 명의 성기사가 나의 뒤에 서 있었다.
내가 남태민이나 히사기처럼 거대 길드의 마스터도 아니고. [군주] 클래스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병력을 언제 이끌어 봤겠는가. 확실히 부담감을 느낄 만도 한 상황이겠지.
“탈림 에베르. 그대의 뜻을 받아들이지.”
그러나 나는 뻔뻔하게도.
뮤온의 성기사, 그들의 지휘권을 거머쥐었다.
수만의 병력을 휘두르는 것?
아무리 그랑펠의 설정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적정선이 있었다.
내가 특별한 놈인 줄 알았던 질풍노도의 시기에도 수만의 병사를 휘두를 생각은 조금도 해보지 못했단 뜻이지.
더군다나 그땐 혼자가, 독고다이가 멋있다고 생각할 시기였으니까…….
‘이제부터는 내 영역이다.’
결국, 나 하기에 달렸다는 거다.
내 방식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래, 이호열의 방식.
이젠 익숙하다.
있는 거 없는 거 죄다 끌어오는 그거 말이야.
쿠콰콰콰쾅─!
촉수에 무너지는 뮤온의 성채.
그 또한 광물이기에 탐색 대상은 더없이 익숙하다.
탐색, 간섭을 생략하고 곧장 발현해 낼 만큼.
후두두두둑─
두둑─
둑두두두후─
무너지던 뮤온의 성채가 다시 세워진다.
흩어진 퍼즐이 저절로 맞춰지는 듯한 광경.
그 모습에 각오를 다진 성기사들조차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무슨?”
“건물이 다시 세워진다아아……?!”
“……여, 여신이시여.”
뭐, 내가 봐도 장관이긴 하다.
확실히 마법이 대단하긴 해?
모르고 보면 여신의 기적 같기도 하고 말이지.
그러나 그 실상은 실로 간단.
‘『반전 마법』.’
단지 그 대상이 광범위해졌을 뿐.
반전 마법의 마력 가성비는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게다가 [천적관계] 발동.
광물이라는 더없이 익숙한 탐색 대상이기에.
나는 파괴된 뮤온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고도 마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았다.
“이 정도 수준의 심미적 가치는 흔치 않지. 보존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실로 간단.
오직 심미적 관점에 따른 발현.
그러나 문제는 없겠지.
탈림이 내게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뮤온을 지켜주셔서.”
나의 속내가 드러나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충분했다.
촉수 덩어리의 성질을 긁기에도 말이야.
“건방져, 아주 건방지다. 감히 이 네프리피트를 상대하면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있단 말이냐? 더없이 오만하구나. 하지만 동시에 익숙하다. 네 녀석들은 하나같이 주제를 몰랐으니까.”
네 녀석들이라.
그건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을 말하는 거겠지.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악마 놈들은 확실히 말 하나만큼은 잘한다.
“그렇기에 그 최후가 어땠는가? 어디 보자. 성전(聖戰)에서의 네놈들의 추태가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선하구나. 어리석었지. 마주한 적도 없는 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사지로 뛰어들다니.”
괜히 뮤온을 차지한 게 아니라는 건가.
녀석의 말에 오히려 성기사들이 반응하고 있었다.
서걱─
탈림이 뻗어오던 촉수를 잘라내곤 나를 바라봤다.
“성전……? 설마, 당신께서는?”
악마 사냥꾼이냐고.
그렇게 묻는 눈빛이었다.
그래, 내가 악마 사냥꾼이다.
그것도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지.
시원하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랑펠의 고집은 꺾을 수 없는 법.
“하찮은 사냥감 앞에 두고 할 말이 아니다.”
철칙 하나.
사냥감과 불필요한 말은 섞지 않는다.
고오오오─
대답 대신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철저하게 무시당한 촉수 덩어리가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구마의식] 발동.
나의 의식에 초대됐기에.
이 소란 가운데서도 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던 거겠지.
이내, 늘어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는 그런 놈들 중에서도 특히나 오만하구나. 그러니 용서할 수 없다. 감히 나를, 네프리피트를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뭐라고 생각하긴.
성녀 사칭범으로 생각하지.
물론, 그렇게 생각했다고 서운해하진 마라.
그랑펠에겐 생각할 가치도 없는 존재거든, 너 같은 악마는.
“거악의 그늘에 숨던 나약한 악마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나다! 어설픈 악마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존재가 나, 네프리피트란 말이다! 나의 힘은 상위 마왕에 범접한다!”
푸슈슈슈슉─!
그와 동시에 솟구치는 촉수.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촉수가 나와 성기사들을 향해 뻗어왔다.
덩치만큼이나 광범위한 공격 패턴이다.
반드시 누군가는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쿠르르릉─!
있는 것.
없는 것.
구질구질하기로 마음먹은 내가 있다면.
쿠구구궁─!
나는 땅을 들어 올렸다.
정확하게는 암석으로 구성된 뮤온의 지표면을.
강도는 상당하면서도 심미적 관점에서도 모자라지 않는다.
내가 휘두르기에도 흡족한 무기라는 것이다.
쌔애애애액─!
그 형태는 원반처럼.
나는 공중에 떠오른 뮤온의 지표면을 조작했다.
뻗어오는 촉수를 잘라내기 위해서.
염동력의 마력 효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거늘.
이건 단순한 염동력이 아니다.
나는 확실하게 개념을 더했으니까.
『마법』, 염동력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개념.
[스킬], 동시사격을.
그래, [『기이』]라는 것이다.
스와아아아악─!
촉수를 가르는 수십 개의 원반.
그 위력은 『마법』이나 [스킬].
하나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후두두둑─
녀석의 촉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에게 ‘절단’이 발생합니다.]
“!!!”
성기사들도.
네프리피트도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또각─
움직이는 것은 오직 나의 걸음뿐.
나는 입을 열었다.
“착각이 크구나.”
사냥감과 말을 섞지 않는다는 철칙.
그러나 틀린 말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피곤한 성격.
그러니까 이건 대화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고작 그따위로 상위 마왕을 자처하다니.”
가만히 듣고 있을 순 없었으니까.
상위 마왕의 부활.
그를 막기 위해서 나와 마탑은 쉴 새 없이 행동했다.
그 과정에서 카림제바와 충돌.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가 전사했다.
천하의 마탑이 그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막아낸 상위 마왕의 부활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냉랭하게 읊조렸다.
“그 희생을 가볍게 하지 마라.”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
짐작했던 대로 녀석은 강했다.
[구마의식] 속에서 수만 명의 성기사에게 둘러싸이고 멀쩡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메시지에선 진명의 악마, 네임드 몬스터라 명시되어 있었지만.
악마족 몬스터는 플레이어와 마찬가지로 성장한다.
백이설에게 빙의했던 서큐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녀석도 성녀, 프레이자로 살며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겠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상위 마왕은 카림제바처럼 경지에 오른 이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런데 네가 상위 마왕에 버금간다고?
뮤온에만 처박혀 있어서 현실 감각이 떨어졌나 본데…….
그런 네게 딱 어울리는 말이 있지.
“우물 안 어리석은 악마여.”
쏘아붙이고는 마법을 발현했다.
“……감히!”
대답할 틈을 주지 않으면 대화가 아닌 법.
그런 내가 발현한 마법은 간단했다.
성녀도 모자라 상위 마왕을 자칭한다면.
어디 한번 이 경지부터 버텨 봐라.
[『절대영도』].
세니오스의 비전 마법.
굳이 따지자면 경지가 아니라 경지를 흉내 낸 거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이』]였다.
‘짝퉁엔 짝퉁으로도 충분하다.’
오소소소소─
이윽고 [온기] 버프를 받고 있는 나조차도.
서늘함을 느낄 정도의 한기가 네프리피트를 휘감았다.
“!!!”
꿈틀대던 촉수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에게 ‘빙결’이 발생합니다.]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에게 ‘동상’이 발생합니다.]…….
어떠냐, 이게 바로 냉혹한 우물 밖 현실이다.
.
.
.
‘……말도 안 된다!’
얼어붙은 네프리피트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기만해 온 인간들이 얼마인가.
흡수해 온 부정적인 감정은 또 얼마나 방대한가.
그를 통해서 강성해진 자신이 아니던가.
‘어떻게 이 몸을……?’
그런데 저 악마 사냥꾼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을 의식에 초대하던 순간부터.
자신이 그 실체를 드러냈을 때도.
녀석에게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인간 주제에……!!’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런 녀석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녀석들의 동료를 입 밖으로 꺼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그렇게 평온할 수 있단 말이냐?’
성전(聖戰)을 언급하고, 악마 사냥꾼들의 처참한 최후를 언급했어도. 놈에게선 일말의 동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시종일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조차도.
‘오만하다.’
그렇기에 즐거웠다.
높은 곳에서 추락시키는 것이 더욱 즐거운 법이니까.
하지만 추락시킬 수가 없었다.
고작 인간 한 마리가 자신을.
이 네프리피트를 완전히 압도했으니까.
‘오만한 게 아니었다…….’
그 순간, 네프리피트는 떠올리고 말았다.
아득히 먼 과거.
자신을 거둬준 거악(巨惡)의 목소리를.
-“악크샨의 처분은 네게 맡기겠다.”
-“제가 그리 큰 영광을 받아도 되는지요……?”
-“알아서 하거라. 나는 만사가 귀찮구나.”
칠죄종 나태.
그녀를 어리석은 구시대의 악마라 생각했다.
악마에게 천적이라니.
거악이나 돼서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계획대로 악크샨을 절멸시킨 순간.
네프리피트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미련하구나. 이런 자리를 내게 넘기다니!”
덕분에 뮤온을 차지한 자신은 그 어떤 악마보다 빠른 속도로 강해졌으니까. 나날이 강성해지는 능력. 보고 있자니 자신감이 치솟았다.
-“내가 마왕을 넘어 거악으로 불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태.
어리석은 그녀보다 위대한 진짜 거악으로.
네프리피트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해 왔다.
천적을 만나기 전까지는.
‘……움직여! 움직여야 한다!’
차갑다.
거대한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한기였다.
시간의 흐름조차 얼어붙는 추위였다.
‘다들 멈춰라. 내가 성녀다. 내가 프레이자란 말이다!’
그 가운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성기사들이 보였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던 나약한 인간들이.
자신의 육체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한결같은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네프리피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내가, 이 네프리피트가 이대로 허망하게 죽는 건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거악들이, 마왕들이 악크샨을 그리도 두려워했는지를. 번거롭게 탈을 쓰는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악크샨을 절멸로 몰고 갔는지도.
결국, 네프리피트는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거악이시여. 나의 주인, 나태이시여! 나를 살려주소서!’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그녀는 게으름의 근원이 아니던가?
반란을 거듭해 온 자신을 찾아오지도.
또 처분하지도 않았던 나태 그 자체였으니까.
자신을 구원하는 일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비이이이일어어어먹을……!!’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소멸하는 촉수 덩어리.
어지러이 떠오르는 메시지의 확인은 잠시 미뤄두자.
사냥도 끝났겠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지.
나는 내게 다가오는 탈림에게 물었다.
“성전에 관해 여신교에게 묻겠다.”
하여튼 이놈의 입버릇.
같은 말을 해도 참 건방지게 말한다.
그러나 건방지다고 대답을 듣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방금도 메시지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성지, 뮤온과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성지, 뮤온에서의 영향력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종교, 여신교와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게다가 내게는 마땅히 자격이 있었다.
그 자격이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여신교단 성기사단장, 탈림.
털썩─
그가 내 앞에.
정식으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으니까.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설령 ‘심판’이라 할지라도.”
……잠깐, 나는 그런 심판을 말한 게 아니었는데.
오해를 바로잡을 새는 없었다.
지켜보는 시선이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바, 방금! 여, 여신교가 책임을 진다고……?”
“뭘 책임진다는 거야?”
“심판……? 이호열이 여신교를 심판?!”
일단, 자리를 좀 옮기자.
“대화를 나누기엔 적절하지 않은 장소로군.”
“……이런, 안내하겠습니다.”
“되도록 차를 들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좋겠네.”
“……?”
전투 이후.
마력 보충은 내겐 더없이 중요한 절차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