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09화 (41/489)

◈ 109화. 후회하지 않는가

AAU.

화상으로 진행되는 지부 회의.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맞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 시발점은 역시나 호열이었다.

“이호열 플레이어부터 시작해서 혼란합니다. 혼란해.”

긴급 업데이트.

그 직후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던 11개의 [깨진 차원의 틈] 균열. 대체 호열은 균열들을, 어떻게 단시간 내에 클리어할 수 있었던 걸까?

행적을 좇는 데만 하더라도 벅찬 일이었거늘.

“어떻게 뮤온의 상황은 아직도 제자리인가요?”

바로 다음 날.

정기 업데이트에서 폭탄이 터져버렸다.

인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아르카나인들이라니.

AAU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관측했을 땐 큰 변화는 없어 보입니다만. 뮤온 내부에서 인류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으면 커졌지, 줄어들었을 것 같진 않군요. 머리 위로 떠다니는 드론만 봐도 진저리가 날 겁니다.”

여신교단의 성지, 뮤온.

뮤온이 적대감을 보인 만큼 세계도 뮤온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무엇보다 큰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여신교의 성녀, 프레이자의 존재였다.

“프레이자. 그 NPC 대체 정체가 뭘까요…….”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존재하던 프레이자.

그러니까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여신교의 성녀라면 분명 상당한 비중을 가진 NPC였다.

마을 주민처럼 인공지능이 무작위로 찍어낸 NPC가 아닐 텐데……. AAU 전 직원을 대상으로 공문을 돌려봐도 프레이자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다.

“결국, 답은 둘 중 하나겠군요.”

“레이먼 션. 그가 관여한 게 아니라면…….”

“우리조차 모르는 정말 미지의 존재라는 거겠죠. 유스라 왕국에 등장했던 거악처럼.”

“뭐가 됐든 머리가 깨지는 것엔 변함이 없군요. 정말.”

세계는 급변하고 있었다.

“제시 하인네스의 샤이닝 탈퇴. 그리고 천하통일의 공격적인 균열 공략 때문에 결국 길드 순위가 바뀌고 말았습니다. 집계 이후 처음으로 천하통일이 길드 랭킹 1위에 올라섰죠.”

힘의 질서도 그에 따라 요동쳤다.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는 공식적인 발표만 없었지. 사실상 거대 연합을 구축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그 세력은 천하통일과 샤이닝에 뒤지지 않으리라 예상됩니다.”

여러모로 우려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대 연합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필이면 천하통일이…….”

그랬다.

천하통일 뒤엔 중국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AAU와의 교류도 전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자 노선을 구축한 중국 말이다.

천하통일의 영향이 더욱 강해진 지금. 중국이란 변수는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우린 한계에 다다른 걸지도 모르겠네요.”

대격변 이후.

AAU는 수많은 변수를 예측하며 아르카나의 침식에 대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근의 업데이트 동향은 그야말로 예측 밖.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엉킨 실타래 중 하나라도 풀렸으면 좋겠거늘.

침묵─

그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공교롭네요. 이거.”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째 엉킨 실이 전부 하나를 향하고 있지 않나요?”

“……예?”

“긴급 업데이트로 생성된 [깨진 차원의 틈]이 된 것도. 제시 하인네스가 샤이닝 길드를 탈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여준 행적도.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라는 거대 길드 연합에도. 전부 이호열 플레이어가 관련되어 있잖아요?”

“……!”

“어쩌면……. 이호열 플레이어는 우리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뮤온. 그리고 프레이자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질문에 유달리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잠깐만요, 다들 그 눈빛 뭡니까들?”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였다.

그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으며 호소했다.

“혹시 뭐, 저한테 기대하는 게 있으신가 본데요. 그런 생각들은 얼른 접으십쇼. 다들 이호열 플레이어랑 접점이 없다고 남 말 하듯 말씀하시는데. 인터뷰 못 보셨어요들? 그 끈질긴 기자들도, 넷튜버들도 벌벌 기는 게 이호열 플레이어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

요동치는 길드 랭킹.

길드 랭킹 4위, 보헤미안의 길드 마스터.

가이버는 치를 떨었다.

“꼬여도 이렇게 빌어먹게…….”

뮤온에서 대역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대박이라 생각했던 뮤온은 당첨은커녕, 복권을 긁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은 시간만 날린 어제와 오늘.

천하통일은 신규 균열을 클리어.

기어코 길드 랭킹 1위에 올라서고 말았다.

“젠장.”

물론, 신규 균열을 클리어한 건 천하통일뿐이 아니었다.

이호열이 있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의 증언으로는.

천하통일이 [만트라 광산 - 2광구]를 클리어했던 것과 이호열이 [만트라 광산 - 1광구]를 클리어한 시각은 유사한 모양이었다.

-아니, 이호열이 조금 더 빨랐음 내가 봤음 ㅅㄱ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천통보다 빨랐다고???

-혼자 아니었는데? 옆에 로브 뒤집어 쓴 사람 하나 있었음

-뭐지 로브면 마법사 아님??? 설마 마탑 마법사임??

-아니ㅋㅋ 뇌피셜 자제 좀;; 팩트로도 충분함

-ㄹㅇ 아무리 이호열이 수석이래도 마탑 마법사까지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좀 오바지;; 그동안 마탑이 가만히 있던 거 생각하면

이호열.

그가 나타난 곳에 수많은 추측이 떠도는 것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었으니까.

가이버는 질투가 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하필이면 가온, 이나즈마, 그리고 버서커냔 말이야!’

길드 랭킹 3위, 가온.

5위, 이나즈마.

가뜩이나 4위의 자리가 위태로운 지금.

위아래의 두 경쟁자가 서로 연합을 했단다.

거기에 같은 EU 소속인 버서커까지……!

‘길드 랭킹은 물론, EU 최강이라는 수식어까지.’

이대로는 안 된다.

조급해진 가이버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신규 균열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말했다시피 [만트라 광산], 두 개의 균열은 호열과 천하통일이 이미 클리어해 버린 상황.

남은 균열에도 쟁쟁한 경쟁자들이 존재했다.

그런 가이버에게 남은 건.

‘결단이 필요하다.’

역시나 뮤온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균열 근처에나 설치하는 베이스캠프를 뮤온 앞에다가 설치해 둔 것이란 말이다. 여전히 굳건하게 닫힌 뮤온의 성문. 가이버는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그래도 규율을 무시할 순 없겠지.’

아무리 엄중하게 경고를 했다고 한들.

여신을 섬기는 뮤온의 성기사들이었다.

섬기는 종교는 다르지만 가이버 또한 성기사이기에.

성기사의 엄격한 규율을 파악하고 있었다.

“성기사는 민간인을 먼저 공격할 수 없어.”

“그래서 기어코 뮤온에 접근하시겠다?”

“지켜보고 있어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까.”

무기를 내려놓고 뮤온에 접근.

저들과 대화를 나눠보겠다.

가이버는 망설이지 않았다.

두근두근─

뮤온으로 나아가자 긴장감에 심장이 뛰었다. 그건 약간의 기대가 섞인 심장박동이었다. 현재 뮤온엔 막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만약, 이야기가 잘 풀려서.

뮤온이 적대적인 태도를 바꾸고.

성문까지 개방한다면?

보헤미안은 물론, 자신의 주가 또한 치솟게 되겠지.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

성기사, 가이버의 상식이 무너져 내렸으니까.

가이버 또한 랭커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순간, 발달한 그의 감각이 경고를 보내왔다.

성벽 위에서 느껴지는 기척.

끼기기긱─!

저건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라고.

슈슉!

슈슈슉!

무기를 내려놓은 것도 모자라 양손을 든 채.

뮤온으로 다가가던 가이버.

무방비 상태의 가이버에게 화살 비가 쏟아진 것이었다.

위협이 아니었다.

정말 목숨을 노린 선제공격이었다.

울컥!

“저 미친 새끼들이 진짜……!!”

가이버의 육체 곳곳을 꿰뚫은 화살들.

보헤미안의 길드원들이 나서서 화살을 쳐내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처럼 숨을 내쉴 수도 없었겠지.

그 사실을 깨달은 가이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뮤온도, 여신교도 내가 알던 이들이 아니야.”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전파를 타고 말았다.

누구보다 격노한 것은 EU였다.

그들은 곧장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우리는 뮤온의 적대적 행위를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뮤온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타국의 반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결국 터질 게 터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NPC 몇몇에 불과하던 때라면 모를까……. 지역, 도시급 업데이트가 진행될 때마다 우려된 상황이었습니다. 애초에 아르카나인들이 우리 인류에게 우호적일 것이라 판단한 게 오판이었습니다.”

게임에 불과하던 때라면 모를까.

저들이 인류에게 우호적일 이유?

솔직히 말해 하나조차 꼽기 어려웠다.

“어쩌면 유스라 왕국이나 프로스트의 경우가 예외적이었던 걸지도 모르겠군요.”

속보가 끝나고 정규 프로그램이 시작됐지만.

반복해서 재생되는 충격적인 자료 화면.

침통한 표정의 진행자들은 여전했다.

게다가 그런 반응 따윈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굳게 닫힌 뮤온의 성문까지도.

“뮤온이 계속해서 적대적인 행동을 보인다면 그건 인류에겐 너무나도 큰 변수입니다. 최악의 경우엔 정말 뮤온을 통째로 날려버려야 할지도…….”

뮤온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장은 해답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래, 한 사내가 뮤온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저 미친? 누구야, 저거!”

뮤온의 전경을 비추던 카메라가 다급히 화면을 확대했다.

겁도 없이 뮤온을 향해 다가가는 사내.

일단…….

이호열은 아니었다. 하긴 이호열이 나타났다면 아까부터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이 진동했겠지.

본사에서 이호열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말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넷튜버 새끼들 아무리 선을 넘어도 저렇게까지……?”

누군가는 그저 관심에 미친 넷튜버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넷튜버라고 하기에는.

사내에게선 촬영 장비 같은 게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 복장도 심상치 않았다.

고풍스러운 제복.

현실보다는 판타지 쪽에 가까운 걸로 봤을 땐.

플레이어가 확실해 보였거늘.

“누구 떠오르는 사람 없어?”

“저 정도 허우대면 엄청나게 개성 있게 생긴 것 같은데?”

“……글쎄요?”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유달리 큰 키.

쭉 뻗은 팔과 다리.

앙상하게 마른 몸까지.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거늘.

“……저런 플레이어가 있었나?”

플레이어 중에선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취재진들이 혼란에 빠진 것과 다르게.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보헤미안 길드 베이스캠프엔 사내의 정체를 알아본 이들이 있었다.

그래, 마법사들이었다.

“뭐, 뭐야? 어째서?”

정확하게는 정기 학회에 참석할 실력을 갖춘 마법사들.

“뮤온에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가 나타난 거지?!”

*

뮤온의 소식은 며칠째 세계를 뒤흔드는 중이었다.

마탑이 그 소식을 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르셀로는 작게나마 웃음을 흘렸다.

“경. 드디어 제 차례가 왔군요.”

[『기이』]에 관한 연구부터.

악마 숭배자의 처분까지.

그동안 호열에겐 빚만을 져왔다.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다는 것 명심하고 있습니다.”

받기만 했거늘.

이제야 호열에게 그 빚을 갚을 기회가 왔다.

그러나.

“멋대로 나서선 안 될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뮤온이 얽힌 이상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 여신교와 악크샨.

그리고 마탑까지.

그들 사이엔 ‘성전(聖戰)’이 얽혀있었으니까. 결심한 마르셀로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장 호열을 찾아갔다. 그리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달칵─

당연하게도 호열에게 동요는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과 행동.

마르셀로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역시 경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군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렇기에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경,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르셀로는 알고 있었다.

호열 경이 알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내색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도.

있었던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 마탑의 과오가 원로 마법사.

아니, 악마 숭배자들 탓이었다고 한들.

그것이 변명이나 면죄부가 될 순 없다는 사실까지도.

게다가 경께서도 하신 말씀이 있지 않았던가?

“마탑이 경과 악크샨에게 ‘격식’을 지킬 수 있게 말입니다.”

.

.

.

종종 플레이어들은 말했다.

“마탑? 솔직히 거품 아닌가?”

“아니, 보여주는 성과가 없잖아.”

“꼼짝도 안 하는데 뭔 수식어만 그렇게 거창한 건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런 막말에 누구보다 격하게 반응하는 건 아르카나인들이었다.

정확하게는 과거, 마탑의 행보를 목격했던 아르카나인들 말이다.

“자네들은 본 적이 없어서 그러네.”

“마탑의 마법사들은 인간이 아니야.”

“부디, 마탑을 건드리지 말게. 불똥이 튀는 건 원치 않으니.”

그러나 이 순간.

더 이상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뮤온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이보다 더한 증명의 기회도 없으리라.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호들갑인지 아닌지.”

“이호열이랑 같은 수석이니까. 대충 둘이 비슷하지 않을까?”

“잘하면 이호열의 전력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천하의 마탑.

그 수석 마법사가 과연, 어떻게 뮤온의 공격을 막아낼까? 그가 뮤온에 가까워질수록 지켜보는 이들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

그 기대 또한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다.

가이버 때처럼 화살 비는 쏟아지지 않았으니까.

그저.

쿠구구궁─!

굳게 닫혔던 성문이 거짓말처럼 열렸을 뿐.

열린 성문 사이로 성기사 하나가 걸어 나왔다.

-“모든 것은 성녀님의 안배. 우리에게 도움 따윈 필요 없다.”

-“뮤온에 접근하는 자.”

-“우리가 여신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인류에게 적대적인 말을 뱉어내던 그 사내였다.

그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이었거늘.

이내, 지켜보는 이들은 깨닫고 말았다.

어째서 마탑이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고 불렸는지를. 어째서 제국의 황제들조차 마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공 아닌 조공을 바쳤는지도.

“……!!!”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듯.

무엇하나 두려울 게 없어 보였던 성기사.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르셀로에게 허리를 굽혔으니까.

충격─

누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호열이 저런 사람이랑 같은 급이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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