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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07화 (39/489)
  • ◈ 107화. 에고(Ego) (2)

    흐릿하게 남아있는 ‘경지’의 경치.

    나는 그 감각을 떠올리며 세니오스의 빙결마법을 발현했다. 원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겠지만, 비슷하게나마 따라 할 수 있는 나였다.

    쩌저저저저적─!!

    위력은 대단했다.

    [모스파이크 용병의 원혼 : Lv.560]

    [모스파이크 용병의 원혼에게 ‘경직’이 발생합니다.]

    [모스파이크 용병의 원혼

    에게 ‘경직’이 발생합니다.]…….

    무려 560레벨짜리 몬스터가 아무것도 못 하고 얼어붙을 줄이야.

    문득,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서의 사투가 떠오른다. 그래, 그때는 얼마나 구질구질했던가?

    ‘마법도 모자라서 검술까지…….’

    검기(劍氣)를 발산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약한 몸뚱이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하르콘의 자세를 따라 했었지.

    그때와 비교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지금은.

    ‘물론.’

    단순한 고위 마법도 아니고.

    경지급 마법의 발현.

    카림제바 때와는 다르게 만반의 준비도, 비약초 도핑도 과하게 하지 않은 나였기에. 마력의 소모는 극심했다. 눈꺼풀이 떨릴 정도였지만 내색은 없다.

    “단숨에 이 정도의 빙결마법을……!”

    나는 냉기에 입김을 내뿜고 있는 클레에게 말했다.

    “귀생초를 노리는 건 산 자들만이 아니다.”

    “아앗, 그렇군요!”

    “명심하도록. 처분은 맡기도록 하겠다.”

    이것이 바로 수석의 권한.

    나는 뻔뻔하게도 짬처리를 지시했다.

    말 그대로 다 잡아놓은 몬스터였다.

    딱히 경험치를 나눠 챙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마력을 아껴야 한단 말이다.’

    귀철(鬼鐵).

    만트라 광산에 귀철이 묻혔단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네, 넵!”

    나의 말에 클레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얼어붙은 원혼들을 처리했다.

    그래, 이게 바로 조직 사회지.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내가 이렇게 계급장을 잘 써먹는다.

    ‘그나저나 역시 마탑이야.’

    클레 오디아.

    그녀는 어디까지 치유학파의 숙련 마법사였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몬스터를 사냥하는 데에 학파의 지식까지는 필요 없다는 것인가. 기초 마법을 발현, 순식간에 원혼의 처리를 끝냈다.

    ‘제시 하인네스가 괜히 견습 취급을 받는 게 아니다.’

    순간 흠칫했지만.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 기여도가 더 큰 게 당연하지.

    이보다 든든할 수 없구나, 마탑의 뒷배.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나의 시커먼 흑심이 내비칠까, 주의했거늘.

    “와아, 이게 귀생초구나.”

    클레는 정신은 귀생초에 팔린 상태였다.

    그래, 나도 그만 흡족해하고 비약초나 채집하자.

    그 효과를 생각하면 당장 쓸모는 없겠다만.

    뭐든 쌓아두다 보면 언젠가는 쓸 날이 오는 법이다.

    “제 축복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해 주시길.”

    잠자코 있던 님프가 말을 걸어왔다.

    사색 겨우살이의 성장을 도왔던 님프가 아니던가.

    자신의 전문 분야라는 거겠지.

    그러나 말했다시피 귀생초의 효과는 당장 쓸데가 없다.

    게다가 님프의 축복, {자연} 능력은 내 마력을 소모한다.

    적어도 귀철을 습득하기 전까지. 축복은 봉인이다.

    비약초를 채집한 나는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역시나 여러 우물을 판 보람이 느껴지는데?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획득했던 아이템.

    [하찮은 보관용 허리띠].

    그 아이템에 달려있던 인벤토리 확장 효과를 추출.

    의복에 부여한 덕분에.

    인벤토리에 여유가 상당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귀생초가 됐든.

    귀철이 됐든.

    경험치가 됐든.

    ‘최대한 꽉꽉 채워서 나갈 수 있다는 거지.’

    탐욕처럼 보이지만 탐욕이 아니다.

    청렴결백의 화신에게 욕심이 웬 말이냐.

    그래.

    이건 그저 거물이 되기 위해선.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다는.

    목표가 생긴 나의 처절한 발버둥이란 말이다.

    *

    힐끗─

    클레는 뒤집어쓴 로브 밑으로 호열을 바라봤다.

    ‘……왜 그러신 걸까.’

    전투불능에 빠진 원혼을 자신에게 맡기실 줄이야.

    클레에게 호열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클레는 마탑의 숙련 마법사였으니까.

    ‘뭔가 굉장히 낯설었어.’

    호열의 행동이 흔히 봐온 마탑의 마법사들과 다른 탓이었다.

    클레는 마법사란 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에게 마법이라면 모를까.

    기본적으로 타인은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단, 나부터도 그러니까…….’

    그 사실을 알기에.

    출탑에 앞서서 단단히 각오했다.

    호열이 책임자로서 동행한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내 안전은 내가 지키자고.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래.’

    너그럽게 생각해서.

    -“클레 오디아.”

    -“비약초를 채집하는 데에도 절차는 존재한다.”

    -“주변을 살펴라.”

    호열이 경고하고 원혼을 빙결마법으로 멈춰 세운 것까지는 납득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책임자시니까. 출탑에 있어서 문제가 생기는 걸 원치 않으셨던 거겠지.

    ‘그런데 왜 마지막을 저에게……?’

    클레는 원혼을 처치하면서도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숙련 마법사라서 수석의 생각을 헤아릴 수 없는 걸까.

    선임 마법사이신 벨리에 님이라면 금방 알아차리셨을까.

    ‘흐음…….’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클레는 아까부터 힐끗 호열의 눈치를 살폈다.

    그 낯빛에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모르겠어요. 벨리에 님!’

    항상의 자세.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

    물론, 그런 게 가능할 리는 없었지만.

    절규하는 클레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인가, 의문이 드는가?”

    ……헉.

    클레는 다시금 입을 틀어막았다.

    이젠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마법도 사용하시는 걸까?

    괜히 제 발이 저린 클레에게 호열의 말이 이어졌다.

    “귀생초에 관한 이야기다.”

    ……다행이다, 그 이야기셨구나.

    “네. 귀생초와 광산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까지는 잘…….”

    그러나 말꼬리를 흐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르카나 대륙에 자라나는 비약초만 하더라도 수십만 이상.

    각각의 효과와 특징까지 숙지하는 건 불가능한 게 당연…….

    “귀철이다.”

    “……네?”

    “귀생초는 귀철이 묻힌 곳에서만 자라나는 비약초다.”

    “!”

    ……해야만 했는데?

    ‘이호열 수석께서는 대체 어떻게 비약초에 관해 그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 걸까요? 이런 건 마탑의 서적에서도 찾지 못했던 정보인데……?’

    그리고 그런 귀중한 정보를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알려주시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호열은 마법사답지 않았다.

    ……아니, 정말 마법사가 아니신 거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호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비약초가 자라나는 환경 따위. 그저 사용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쓸모없는 정보에 불과하겠지. 그러나 나 또한 그대의 연구, 비약초의 육성법에 관해 고민하고 있기에 건넨 말이다.”

    “……!”

    내 연구를 고민하고 계셨다고?

    정기 학회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역시 수석이셨다.

    학회 때부터 지금까지.

    업무에 관한 생각을 멈추지 않으셨다니.

    클레는 다시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누가 시켜준다고 하더라도 절대 못할 것 같아요, 수석!’

    *

    빌딩 숲과 뒤엉켜 더욱 복잡해진 광산.

    길잡이가 되어준 건 다름 아닌 님프였다.

    “이쪽으로.”

    님프는 나무를 비롯한 식물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

    귀생초에게 귀철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이야기를 들어 그 위치를 파악한 덕분이었다.

    ‘완전 지름길이네.’

    [만트라 광산 - 1광구].

    균열의 보스 몬스터라고 할 수 있는 [철의 귀인]에게 향하는 최단 루트. [철의 귀인]에 관한 정보 또한 업데이트 내역에서 확인했었다.

    [철의 귀인 : Lv.650]

    그냥 650레벨짜리 몬스터구나.

    상당히 빡세겠구나.

    조심하자.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말이야.

    귀철과 관련됐다는 걸 알고 보니까.

    굉장히 그럴싸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이 커다란 광산이 그냥 폐쇄된 게 아니었단 거지.’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

    귀철에 관한 사전 지식에 없었더라면.

    나는 [철의 귀인]과의 전투에서 상당히 고전했을 테니까.

    이내, 앞서 나아가던 님프의 날개가 흐드러지며 멈췄다.

    “이곳입니다.”

    나는 클레에게 말했다.

    “클레 오디아,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몰랐을 땐 몰라도.

    지금은 알고 있었으니까.

    클레의 지원은 필요하지 않았다.

    또각─

    그런 나를 맞이한 건 커다란 철의 거인이었다.

    족히 3미터는 될 것 같은 키에 빈틈없이 몸을 감싼 갑옷까지. 그 레벨이 650레벨이라는 걸 생각하면 위압감에 압도될 수밖에 없는 외형.

    그러나.

    “그 모습이 영락없는 전사로군.”

    나는 위축될 수 없었다.

    그랑펠의 성격을 떠나서 알고 있단 말이다.

    저 거대한 몸집이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래, [철의 귀인]은 귀철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눈을 속일 순 없다.”

    귀철.

    저거, 귀신들린 철이란 이름처럼 야비하잖아?

    [철의 귀인]은 누가 봐도 전사였다.

    검을 맞대고 싶게 생겼단 것이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저건 귀철이 만들어 낸 가짜였다.

    원혼과 마찬가지로.

    물리 공격이 먹히지 않는 유령이란 말이지.

    “내게 그런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순간 필요한 건.

    검이 아니라 마력이었다.

    그래, 귀철을 습득하기 위해 비축해 뒀던 마력 말이다.

    고오오오─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았건만. 레벨이 상승한 만큼 마력도 상승했다는 건가. 나부터가 달라진 마력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었다.

    “곧장 알아보다니. 아둔한 멍청이는 아니구나.”

    [철의 귀인]에게서 쇠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철의 목소리겠지.

    철 주제에 말을 하다니.

    과거의 나였다면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귀철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내가 아니던가.

    ‘말을 할 수 있는 게 당연하지.’

    그랬다.

    귀철이 전설 속 광물이라 불리는 광물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데엔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래, 귀철은 바로 에고소드의 재료였으니까.

    에고 소드(Ego Sword).

    자아를 가진 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떡밥만 가득하던 귀하신 존재. 그러나 플레이어는 물론, 아르카나인들조차도 에고 소드를 보유했다는 이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귀하신 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귀철을 발견하는 것부터 문제다.’

    귀철은 기본적으로 희귀한 광물.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보는 것처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다, 의지보다는 고집에 가깝겠지. 저건.

    다시금 들려오는 치찰음.

    “마법사여. 내가 그대에게 굴복할 것 같은가?”

    쉽게 말해서 호락호락하게 손에 들어와 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허상을 만들어 낸 것도 그 때문이겠지. 나는 귀철을 채취하는 법을 떠올렸다.

    ‘인정을 받거나 굴복시키거나 둘 중 하나다.’

    뭐가 됐든 쉽지 않겠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귀철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용병들도 원혼 신세가 된 거 아니겠어?

    하지만 말이야.

    ‘내 고집도 한 고집하거든.’

    아니, 내게는 고집보다 더한 긍지가 있단 말이다.

    나는 달려드는 [철의 귀인]에게 마법을 발현했다.

    갑옷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

    그 실체는 유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택한 건 순수마법이었다.

    슈슝─!

    순수마력학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

    나는 그가 주로 사용하던 마력의 광선을 열화판으로 발현했다.

    마력 격차에 따른 위력의 차이는 [심미] 스탯을 가미해서 어떻게든 보완해 보자……!

    슈와아악─!

    그 노력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화려한 거.

    하나만큼은 먹고 들어가서 말이야.

    “……너는 보통 마법사가 아니구나.”

    지그재그.

    뻗어가던 마력 광선이 휘황찬란하게 휘어지기도 잠깐.

    슈슉─!

    슈와악─!

    [철의 귀인]을 이리저리 꿰뚫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다시금 느낀다.

    내가 말이야. 괜히 [『기이』]가 ‘경지’와 비슷한 급이라고 지껄인 게 아니라니까?

    “그러나 날 굴복시킬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녀석의 본체는 어디까지나 귀철.

    [철의 귀인]이 다시금 일어섰다.

    이래서 까다롭다는 거겠지.

    ‘귀철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면.’

    결국, 귀철을 파괴해야만.

    끝없이 되살아나는 [철의 귀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나는 마력의 잔량을 확인했다.

    남은 마력은 7할 정도인가.

    ‘마력이 버텨주는 동안 귀철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까.’

    아니, 있을까가 아니라.

    ‘꺾어야만 한다.’

    그저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것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겠다고 다짐한 이상.

    내게 귀철은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말이 있다.

    그래, 마력이 없으면 말이야.

    뭐라도 끌고 오면 되는 거다.

    내겐 그러려고 파놓았던 우물들이 있단 말이다.

    이어지는 [철의 귀인]과의 공방.

    마법사와 유령과의 상성.

    덕분에 나는 녀석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소모되는 마력도 극심했다.

    물론, 귀하신 몸답게 귀철의 고집도 꺾이지 않았고 말이야.

    ‘결국, 다음 수를 꺼낼 수밖에 없는 건가.’

    마법, 다음에는 흑마법이다.

    마력은 없어도 ‘적합한 마력’은 충만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마법사……!!”

    절규하듯 이어지는 귀철의 음성에 나는 멈칫했다.

    “스스로 파괴될지언정 굴복하지 않는다. 나를 굴복시킬 수 있는 건 오직 내가 섬길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검사뿐이다……!”

    너도 보통 고집이 아니었구나.

    고집을 뛰어넘은 긍지 수준이야.

    당연하게도 나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야 난 마법사가 아니거든.

    철컥─

    나는 태연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검날에 일렁이는 검기(劍氣).

    보잘것없던 나의 레벨.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검기는 더욱 짙어지고, 그 고유의 색을 띠는 법이니까.”

    덕분에 모든 균열에서의 전투가 내게는.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로 취급된 덕분.

    나의 검기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짙어져 있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유의 ‘고고한’ 빛을 뿜어냈다.

    문득, 감격에 찬 귀철의 음성이 들려왔다.

    “검기……! 그대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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