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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01화 (33/489)

◈ 101화. 반신전(半神戰) (2)

한층 더 짙어진 악마 사냥꾼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확실해. 성장했다.’

이건 레벨이나 스탯의 상승과는 또 다른 성장.

쉽게 말하자면 [천적관계]의 스킬 숙련도가 상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작 [천적관계]엔 스킬 숙련도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저 둘 사이에 끼어들 순 없지.’

잊지 말자. 주제 파악.

[천적관계]가 발동됐다고 한들.

나의 전투력은 저 반신들에 비하면 초라했으니까.

더 나아가서.

“악마의 처리를 부탁하지, 이호열 수석!”

세니오스는 내가 싸움에 끼어드는 걸 원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전장에서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잘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

그래, 악마 사냥 말이야.

높은 곳에서 아랫것들을 내려다보는 시선.

과연, 그랑펠다운 시야로군.

나는 균열의 틈에서 쏟아지는 악마들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과연, 일반적인 악마들과는 달라 보였다.

‘역시 마왕군이라는 거겠지.’

그 생김새가 데카라비아 때 봤던 악마들과 비슷했다.

오와 열을 맞춰서.

나와 세니오스를 향해 진격해오는 마왕의 군세.

그러나 당연하게도.

“하찮구나.”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어떤 악마 앞에서도 고고한 그랑펠의 긍지를 떠나서도.

‘뱅그릿 때 봤던 그 물음표랑 비교하면야…….’

그래, 나에게는 경험이 있었다.

‘박력부터 차원이 달랐지, 그건.’

균열을 박살 내고 등장했던 악마, ‘???’.

그것도 모자라서 균열 조각을 뜯어서 휘둘러 댔던 이름 모를 악마와 마주쳤던, 그런 무지막지한 녀석의 팔 하나를 [『기이』]로 도려냈던 경험이 말이다.

그래, 이것은 근거 있는 자신감.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겠다.”

악마들이 쏟아지고 있는 이 순간.

균열의 붕괴도는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을 터.

데카라비아가 그랬던 것처럼.

마왕은 자신의 부하, 악마조차 제물로 삼켜버리는 놈들이었다.

악마가 의식 장소인 균열에 쏟아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허나, 도망치는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

이미 쑥대밭인 아르카나 대륙에 악마를 돌려보낼 수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무거운 긍지에 따라서.

쏟아지는 악마를 사냥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냥감과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는 신념.

그래, 침묵이 나의 개전(開戰) 선언이었다.

고오오─!

[천적관계]의 효과로 솟구치는 마력.

거기에 만반의 준비로 마력 재생에 좋다는 비약초를, 중복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섭취하고 온 나란 말이다. 나는 곧장 마법을 발현했다.

콰드드득─!

탐색, 간섭의 과정은 생략.

“!!!!!”

진격해 오던 마왕군이 서 있던 땅이 융단처럼 출렁거렸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을 통해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을 터득한 내게. 땅은, 지반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다.

콰콰콰콰콰쾅─!!!

반신(半神).

카림제바가 용암을 만들고.

세니오스가 대기를 얼렸다면.

나도 지진을 일으킬 정도는 된다는 거지.

“?!?!!!”

갈라지는 땅.

그 아래로 추락하는 마왕군들.

어디까지 떨어진 것인가.

알 수는 없다만 하나는 확실하다.

‘역시 질기네.’

마왕군.

그것도 상위 마왕의 악마들이라서 그런가.

지진 한 번으로는 쓰러트릴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 레벨 업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다시 한번 발현.

콰드드드득─!

연달아서 지진을 일으킨 건 아니었다.

아무리 [천적관계]에 비약초 약빨까지 세운 나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저 반신들에 버금가는 스케일의 마법을 연달아서 발현할 수는 없다.

‘효율이 아무리 좋아져 봤자니까.’

나는 333레벨.

절대적인 마력은 그것보다도 낮았으니까.

그러나 이 순간.

쿠구구구구궁─!!

땅은 직전과 마찬가지로.

굉음을 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갈라진 땅.

지하로 떨어진 악마를 영영 집어삼켜 버리려는 것처럼.

그 갈라진 입을 굳게 다물기 시작한 것이다.

“하하. 어떤가, 카림제바. 아직도 자네의 눈에는 그가 모험가 애송이로 보이는가?”

“……!”

“쓸데없이 머리만 커져서는. 노망이 난 것과 다름없어진 우리는 물러날 때가 된 거겠지. 그나저나 언제까지 한눈을 팔고 있을 건가?”

그건 전투에 몰입한 카림제바와 세니오스조차 시선을 돌리게 할 정도의 광경.

……내가 봐도 그럴싸하게 보이기는 하다.

대지진처럼 갈라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마법이라니. 듣기만 해도 엄청난 고위 마법 같군. 하지만 그 실상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냥 반전 마법이거든.’

그랬다.

그저 반전 마법이었다.

은 단검을 변형시키고, 그 내구도를 원상복귀시켰던 소박한 반전 마법 말이지. 스케일만 커졌지, 그 원리는 똑같았다.

물론, 소모되는 마나가 극소량에 불과하다는 것도 똑같다.

‘착각할 법도 하네.’

나의 구차한 사정을 모르는 카림제바와 세니오스에겐 영락없이 고위 마법을 발현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물론, 당연하게도. 이 구질구질한 진실을 내 입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쿠구웅─!

반전.

갈라진 땅이 다시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마왕군의 머릿수는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남겨진 이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에게 허락된 장소는 오직 지하, 나락뿐이다.”

그래, 이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곧, 그 최선의 결과가 메시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왕군 기병에게 ‘골절’이 발생합니다.]

[마왕군 보병에게 ‘질식’이 발생합니다.]

[마왕군 백인대장에게 ‘화상’이 발생합니다.]…….

땅 속에서 느끼고 있을.

지반의 무게.

그리고 지열.

‘기껏 해봤자 과학 상식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이 또한 기이라면 [『기이』]겠지.

그 사실을 증명하듯.

연달아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마탑에서 포탈이 사라졌다.

그 소식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게 뭔 상황임???

-ㄹㅇ 마탑의 소중함을 이제야 깨닫네

-ㅁㅊ 균열 위치를 파악하면 뭐함?? 갈 방법이 없는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거냐 마탑은??

플레이어 중에서도 포탈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효과가 마탑의 포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천지 차이.

“소모되는 마력도 어마어마할뿐더러. 포탈 사용자가 들어갈 때마다 똑같은 마력이 소모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로서 플레이어들이 빠른 시간 내로 균열에 진입하는 건 불가능한 일…….”

괜히 세계 각국의 길드들이.

마탑이 있는 대한민국, 서울로 몰려든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물론, 그 사실을 세상보다 일찍 알게 된 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행동에 돌입했다.

“현실을 인정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어.”

남태민은 말을 이었다.

“우리의 수준으로는 열한 개의 균열, 전부를 돌아보는 건 불가능해. 포탈이 사라진 지금 상황에선 더더욱. 그러니까 목표를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는 거야.”

제시 하인네스.

카밀라.

히사기 카즈마.

레오니.

하나하나가 누가 수준을 들먹여도 빠지지 않을 랭커 플레이어들. 그러나 남태민의 말에 그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상황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마탑에서 포탈이 사라졌다는 건…….’

‘확실히 그런 뜻이실 거야.’

그러나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모를지라도.

그들은 호열이 짊어진 무게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

호열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래, ‘긍지’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니까.

“우리의 목표는 가장 가까운 균열.”

남태민의 계획은 간단했다.

호열의 여부와 상관없이 가장 인접한 균열에 진입.

해당 균열을 클리어한다.

물론, 그 행동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호열의 짐을 같이 짊어질 수 있다면.

“후우─”

무거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것 같았으니까.

행선지가 같았으니 굳이 인원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가온의 전용기.

플레이어들이 신속하게 탑승하던 도중이었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어?”

그건 전용기의 방향을 돌리게 만들 정도의 속보였다.

“……규, 균열이 클리어됐다는데요?!”

뭐라고?

긴급 업데이트가 떠오르고, 균열이 생성된 지는 고작 1시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 놀라기는 했지만, 호열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잠깐만, 이거랑 그거랑 다른 균열이지?”

“어? 뭐야, 진짜 위치가 다른데?”

“다르다는 건 균열이 벌써 두 개나 클리어됐다는 거잖아!”

그래.

클리어된 균열이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

아니, 세 개.

아니, 실시간으로.

“……잠깐만,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속보가 떠오르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떠드는 오보나 찌라시 따위가 아니었다.

AAU의 정식 발표였다.

──────

[AAU] 생성된 11개 균열 중 8개 클리어…….

──────

그 소식에 세상은 다시금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에도 소식이 전달된 걸까.

누군가 틀어놓은 동영상 속에서.

격앙된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아직까지 균열에 진입했다는 플레이어는 없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없겠죠. 하지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호열 플레이어가 움직인 게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되지 않는 일입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이호열 플레이어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균열 붕괴, 미사일, 핵폭탄.

극단적인 이야기까지 튀어나오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전해진 희소식이다.

세상이 들썩이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물론, 가온의 전용기에 탑승한 플레이어들도 술렁거렸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행이다.”

실시간으로 균열이 클리어되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호열이 무사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젠장.”

두득─

남태민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간신히 억누른 감정이 솟구쳤다.

레오니가 중얼거렸다.

“결국 이번에도 혼자서…….”

*

사라지는 기이의 공간, 균열.

마르셀로는 포탈을 발현하며 말했다.

“이로써 남은 균열은 둘입니다.”

마르셀로를 비롯한 선임 마법사들은 아홉 개의 균열을 폐쇄했다.

먼저 균열을 폐쇄한 이들이 다른 균열 쪽으로 합류했으니까.

당연하게도 균열을 폐쇄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러나 마르셀로는 알고 있었다. 프로스트에서 벌어졌던 마왕, 데카라비아의 강림 의식 과정을.

‘경께서는 악마라고 다 같은 악마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마왕을 제외한 마왕군 내에서도 그 서열이 존재한다고 하셨었지. 그렇기에 마르셀로는 균열을 폐쇄하는 과정에서 악마들을 유의해서 살폈다.

‘그러나 눈에 띄는 이들은 없었다.’

그러니까 직감할 수 있었다.

“남은 균열은 지금 균열과는 다를 겁니다.”

남은 균열에 높은 계급의 악마.

그리고 대역죄인, 카림제바가 존재할 것이라고.

그 증거가 앞에 보이고 있었다.

‘호열 경과 세니오스 님은 지금 순간에도.’

호열과 세니오스가 합류하지 않았다는 것.

그들이 아직 균열 속에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마르셀로는 발현된 포탈을 바라봤다.

“서둘러야 합니다.”

호열의 말대로.

이번 출탑은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마르셀로는 모험가들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경께서는 우리가 균열을 폐쇄하는 순간, 그 소식을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고 하셨었지.’

그 말인즉슨.

출탑의 목적은 숨길 수 있을지라도.

균열을 폐쇄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었다.

결국, 나설 수 없는 마탑을 대표해서.

이번에도 책임을 지는 건 호열이라는 뜻이었다.

저벅─

포탈로 진입하는 선임 마법사들.

문득, 걸음을 멈춘 마티스가 마르셀로에게 말했다.

“이호열 수석께서는 피곤하시겠군요.”

마티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건넨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니. 경께서 홀로 이번 균열 폐쇄를 떠맡은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으시겠죠. 세간의 소문에 꽤나 시달리실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결국, 이번에도 호열에게 빚을 졌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선 보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했으니까.

결국, 답답한 건 잠자코 지켜보던 뱅그릿 톰이었다.

‘……잠깐, 좋은 거 아닌가? 세상의 관심을 받게 되면?’

도리도리.

그렇게 고민하던 뱅그릿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제 파악을 끝냈다.

하기야 내 단순한 머리로.

두 명의 수석과.

마티스 선임의 큰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

실전의 중요성.

나는 그 말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니, 상승하는 레벨을 떠나서.

쾅─!

굉음을 쏟아내며 격돌하는 화염과 얼음.

카림제바와 세니오스.

두 원로 마법사의 사투에서 오가는 마법은 지금껏 내가 봐오던 마법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이건 고위 마법으로 묶어서 취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화염마법과 빙결마법의 정점.

두 정점이 쏟아내는 마법은 그야말로.

화염마법과 빙결마법의 극한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비전(秘傳) 마법이 발현되고.

“어떤가. 아직도 상성의 우위를 믿고 있는가? 카림제바!”

그런 비전에는 비전으로 응수하는.

“닥쳐라. 미련한 녀석.”

그 두 사람의 사투가.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 있게.

눈을 뜨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광경에 몰입한 나를 악마 따위가 방해할 순 없었다.

[악마 군단장 샤르탄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설령 그 방해꾼이 악마 군단장이라고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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