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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97화 (29/489)

◈ 97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

둥실─

요동치는 마력.

장현도의 몸뚱이가 깃털처럼 허공에 떠오른다.

“컥컥.”

짙은 마력 농도에 산소조차 희박해진 공간.

장현도가 헐떡댔지만 카림제바는 미동도 없었다.

그저 장현도의 몸을 탐색할 뿐.

‘마력흔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르셀로의 철저한 일 처리.

단서가 될만한 마력흔은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 기본.

제아무리 카림제바라고 해도 남지 않은 마력흔을 추적할 재주는 없었다.

빠직─

카림제바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감히 나를 기만한 건가, 아캄파탐.”

아캄파탐이 도망쳤다.

카림제바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당탕!

“하찮은 인간 새끼.”

허공에서 떨어지는 장현도.

“으으으억…….”

기절한 장현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감히 자신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걸로 봐선.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다는 거겠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어째서.

갑자기 아캄파탐은 모습을 감췄을까?

카림제바는 용암처럼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결국, 짚이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악마는 악마에 불과하다는 건가?’

악마란 모든 것을 기만하는 존재.

설령 그게 자신들의 왕.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그 본성을 버릴 수 없다는 거겠지.

고작 진명의 악마 따위에게 신경을 쓰고 싶진 않았지만.

아캄파탐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구체적인 계획을 들먹이던 것도 이 때문이었나?’

그것도 모자라.

일 처리에 관해서는.

자신더러 손을 떼고 있으라고 요청했던 아캄파탐이었다.

카림제바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악마를 믿다니, 미련했군.”

그리고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장현도의 몸에 아캄파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엄연한 실책이다.”

악마를 신뢰한 것이 나의 실수였다.

카림제바는 인정했다.

그러나 자책은 길지 않았다.

‘헛되이 보낸 시간 동안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에게 더는 동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캄파탐이 사라진 지금.

마탑의 정보를 입수할 방법은 없었거늘.

“나는 심히 유감스럽네.”

텔레파시는 여전히 감감무소식.

그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자의가 됐든, 타의가 됐든.

두 명의 원로 마법사.

그들과는 앞으로 함께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스윽─

카림제바는 손으로 한 차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로써 성공은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겠군.”

어지간하면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지.

번뜩─

그러나 카림제바의 눈동자는 여전히 선명히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작열하는 불꽃처럼.

그래, 그건 영락없는 마법사의 눈빛.

“허나, 쉽게 풀렸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 일이겠지.”

진리를 갈망하는 마법사의 눈빛이었다.

“진정한 진리를 묵도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진정한 진리’로 향하는 길.

설령,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해도.

아캄파탐이 모든 계획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 행동이 자신의 최후로 앞당기는 일이라고 해도.

“좋아. 이보다 화려한 장례식도 없겠군.”

마법사, 카림제바에게 물러날 생각 따윈 없었다.

진정한 진리를 위해서라면.

“이까짓 육체 따윈 몇 번이든 불태울 수 있으니.”

그게 마법사란, 글러 먹은 족속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카림제바는 경고했다.

“한번 붙은 불이란 쉽게 걷잡을 수 없는 법이라네.”

마탑?

악마?

모험가?

누가 됐든 상관없었다.

진정한 진리로 향하는 길.

방해되는 건 모조리 불살라 버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

화룡, 카림제바.

그 거창한 수식어에 맞게 그는 대단한 마법사였다.

뭐, 마법 서적을 들춰볼 필요도 없겠지.

화염마법학 선임 마법사, 벤쉬 윌리엄.

그의 호들갑만 봐도 알 수 있었거든.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저는 빠지고 싶습니다.”

크리스탈 홀.

나와 마르셀로.

선임 마법사 전원이 모인 공간에서.

벤쉬는 다짜고짜 선언했다.

“카림제바 님. 아니지, 이젠 마탑의 대역죄인이니까. 카림제바, 그 자식이 괜히 화룡이라 불린 게 아니란 말입니다! 화염마법학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한 수준. 그 강함은 저 벤쉬 윌리엄조차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그거야 나도 알고 있다.

여러 우물을 파기 위해서 온갖 마법 서적을 탐독했던 나였다.

당연하게도 화염마법학에 관한 지식 또한 어느 정도 쌓게 됐으니까.

‘카림제바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긴 했었지.’

거짓말 안 하고.

단락에 한 번씩은 그의 이름이 튀어나올 정도였거든.

자신도 답답한 모양인지, 벤쉬는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

퍽퍽.

“물론, 저만 빠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화염마법의 특성을 고려해 주십사, 하고 이런 자리에서 말씀을 드린 겁니다.”

화염마법의 특성.

역시나 독서는 나의 힘.

그 또한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위계질서가 확실한 마법이지.’

화염은 더 큰 화염에 삼켜지는 법.

화염마법도 마찬가지였다.

카림제바와 벤쉬의 화염마법이 맞부딪혔다고 가정해 볼까?

‘보나 마나 더 큰 화염이 돼서 우리 쪽을 덮치겠지.’

원로 마법사와 선임 마법사의 협공 마법이라.

상상만으로도 벌써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군.

그런 의미에서 벤쉬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대의 편성에 그 점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사각사각─

마르셀로는 깃털펜을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편성이란 말처럼 그는 선임 마법사들을 어떻게 묶어야 하는가.

고심하는 눈치였다.

각 분야 최고의 마법사들이라고 한들.

그 분야마다 강점과 약점은 반드시 존재하니까.

‘플레이어처럼 생각하면.’

균열 진입에 앞서.

클래스에 따라 파티를 구성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

물론, 그렇게 중요한 편성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마탑의 목적은 대역죄인 카림제바를 저지하는 거지, 균열 공략이 아니었으니까.

‘카림제바의 위치가 확정되는 순간.’

모든 선임 마법사들이 그곳으로 집결하게 될 테니까.

균열간의 거리?

포탈 정도 되는 마법쯤이야.

물 쓰듯 마력을 써버리는 선임 마법사들에겐 걱정거리도 되지 못하겠지.

‘물론, 내 비루한 마력으로는 좀 부담스럽긴 한데…….’

어쨌든, 비약초로 최대한 보완을 해보자.

다짐하던 찰나에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역시, 그 위험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건 마티스 딘 카를 선임밖에 없겠군요.”

흑마도학파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과거, 마티스는 마르셀로와 수석의 자리를 두고 겨루던 마법사였다.

마티스가 마르셀로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티스 선임께서 저와 함께요?”

물론, 벤쉬는 부담스러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아니, 사실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거든요? 굳이 마티스 수석께 폐를 끼칠 정도는 또 아니지 않나……. 게다가 마티스 수석께서도 저 때문에 조금은 부담스러우시지 않겠습니까?”

선임 마법사들 사이에서 마티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왜, 능력 증명 퀘스트에서도 말이야.’

마티스가 찬성표를 던지자마자 나머지 선임 마법사들도 그를 따라 찬성표를 던졌을 정도였으니까.

벤쉬는 그런 마티스와 단둘이 행동하는 게 불편하다는 거겠지.

물론, 내가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불펴여어언?!’

팔자도 좋구나, 벤쉬 윌리엄.

대역죄인 처분이라는 마탑의 긍지가 걸린 막중한 임무다.

불편 같은 사소한 감정 따위가 우선시될 수 없단 말이다.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마티스를 바라봤다.

“이 결정이 부담스러운가, 마티스?”

“아닙니다.”

“그렇다는군. 벤쉬 윌리엄 선임.”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나 같은 상사를 상대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하나는 확실했다.

‘우리 부장님보다도 피곤한 스타일이겠지.’

그나마 아부라도 통하던 부장님과 다르게.

나한테는 아부도, 심지어 뇌물도 먹히지 않았으니까.

벤쉬의 반응은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물어보실 필요까지는……!!”

편성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기어들어가는 말을 끝으로 벤쉬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벤쉬에 뒤지지 않게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는 선임 마법사들도 보였다.

아마도 마티스에 대한 나의 호칭 때문이겠지. 오해할 법도 하다.

‘그 대단한 마티스 딘 카를을.’

나는 자연스럽게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으니까.

물론, 거기에도 복잡한 사연이 있단 말이다.

“종잡을 수가 없군요. 정말.”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래, 그 사연이 미치도록 궁금하겠지만.

내게는 물론이요.

마티스에게도 물어볼 엄두는 내지 못하겠지.

‘나도 절대 말해줄 생각은 없거든.’

그야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마티스와의 첫 만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단 말이다.

당연하게도 나의 흑마법 적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게 될 터.

흑마법의 원천.

적합한 마력의 근원이 되는 나의 과거.

흑역사를 나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으니까.

스스슥─

작은 소란 중에도.

마르셀로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편성이 끝난 모양이었다.

“저는 균열 내부 상황을 지켜보고 지원이 필요한 쪽으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남은 건 이호열 수석의 결정뿐입니다.”

자연스럽게.

나를 향하는 시선 속에서.

나는 솔직하게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말이지.’

균열, 하나하나를 전부 순회하고 싶었다.

선임 마법사들이 떨어트릴 콩고물을 모조리 주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그럴만한 여유는 없겠지. 어떤 균열에 어떤 악마가, 또 카림제바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결심한 대로 선언했다.

“나는 세니오스와 동행하지.”

일동 정적─

그런 나의 말에 마치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

크리스탈 홀이 침묵에 빠졌다.

그러던 중 누군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세니오스라면? 설마?”

그래,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것이다.

내가 언급한 세니오스는 마탑의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였으니까.

다를 바 없이 할 말을 잃었던 마르셀로가 정신을 차리곤 물어왔다.

“경, 혹시 세니오스 님이라고 하시면……?”

“그렇다.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다.”

“동행이라는 건 세니오스 님께서도 출탑. 그러니까 균열로 향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마탑의 수뇌부.

원로 마법사들과 그나마 교류가 잦았던 만큼.

마르셀로는 그 결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이렇게 나설 수 있었으면 말이야.

미리미리 잘 좀 했으면 안 됐느냐고.

-“그대는 알 수 없겠지만. 마법사라는 족속은 이기적이고 오만한 족속이라네. 그건 나이를 먹어도, 이러한 경지에 올라도 변하지 않는 천성이라는 것이지.”

그러나 세니오스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냥 시원하게 자신이 글러 먹은 탓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거기에도 구체적인 사연이 이어졌지만.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남의 개인사를 말하는 건.’

격식에 어긋나는 것.

그러니까 나는 사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태연하게 말을 잇는 게 전부였다.

“세니오스 또한 내게 출탑의 허가를 요청한바. 그 출탑의 목적은 자신의 손으로 대역죄인, 카림제바를 처분하는 것. 나는 세니오스의 직위를 고려하지 않고 그 목적을 판단하여 그의 출탑을 허가했네.”

나의 말에 크리스탈 홀에 한차례 소란이 일었다.

“세니오스 님께서 이호열 수석께 허락을 받았다고?”

“출탑의 전권을 이호열 수석께서 쥐고 있긴 하지만…….”

“아무리 직위를 따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건…….”

이렇게까지 절차를 중시할 줄이야.

다들 경악하고 있는 거겠지.

물론, 나 또한 해고당해도 할 말 없는.

나의 싹수에 혀를 내두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이런 선임 마법사들의 웅성거림 정도야.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놀랍지만, 희소식이군요.”

과연, 마르셀로는 빠르게 판단을 끝낸 모양.

그러고는 내게 말을 이었다.

“허나, 경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건 또 아닐걸?

‘세니오스 그 양반, 생긴 거랑 다르거든.’

하지만 내 생각이 어쨌든.

마르셀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봐도 마르셀로는 나를 과대평가하는 게 확실하군.

그러나 굳이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랑펠에게 겸손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나 또한.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설명을 대신할 순 없었다.

경악이 천천히 가시려던 순간.

누군가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그래요. 절차니까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호열 수석께선 분명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 님을……. 그냥 세니오스라고 부르시지 않으셨나요?”

긍지가 세니오스를 인정할 수 없다.

그 복잡한 사연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티스와 마찬가지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단 말이다.

결국, 이번에도 애꿎은 사실을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뻔뻔하게 지껄였다.

“내가 감독하는 출탑에서 직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다시금 깨닫는다.

기왕 미칠 거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제대로 미치는 게 낫다고.

“불만이 있다면 절차에 따라 이의를 제기하도록.”

또각─

.

.

.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새 글이 올라왔다.

-수요일.

오늘은 목요일이 아니었다.

예정된 신규 업데이트가 아닌 긴급 업데이트란 뜻.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정렬하는 브로치의 각도.

가다듬는 옷매무새.

차분하게 내려놓는 찻잔까지.

나는 깃털펜으로 양피지에 휘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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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부로 대역죄인, 카림제바의 처분을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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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세니오스. 수석, 마르셀로. 선임 마법사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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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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