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94화 (26/489)

◈ 94화.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2)

가넷 홀.

마탑의 마도구를 관리하는 가넷 홀엔 마법부여학파가 관리하는 별실이 존재한다.

그 별실에서 이뤄지는 작업은 당연하게도 마도구의 마법부여 작업.

그 노력에 비해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 마법부여학이다.

무언가 조금만 어긋나도 귀중한 마도구가 손상되니까.

가넷 홀 별실에서는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으으.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그런 별실에서도 흔치 않은 절규가 흘러나왔다.

마법부여학 선임 마법사, 키코 아르민.

그녀가 내뱉은 원망 가득한 절규가.

철퍼덕─

마법부여대 위에 대자로 뻗은 키코.

그녀를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하는 숙련 마법사들.

‘괜찮으신 거 맞아?’

키코는 좀처럼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숙련 마법사 중 하나가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다.

“키코 선임 마법사님. 역시, 저희가 책임을 지는 게…….”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저에게 말을 하지 말았어야죠.”

“아앗, 죄송합니다. 저희 생각이 짧았…….”

“하지만 침묵하고 넘어갔다가 일이 틀어졌다면? 그때도 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왜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느냐며 캐물었겠죠.”

“그, 그것도 죄송합…….”

“그대가 뭐가 죄송하다는 거죠? 누가 봐도 내가 변덕을 부리는 건데?”

키코는 대(大)자로 엎드린 채.

체인 라이트닝처럼 저릿한 말을 쏘아붙였다.

숙련 마법사들이 다시금 시선을 교환한다.

아뿔싸.

발현되고 말았다!

키코 선임 마법사의 피해망상이!

그녀의 피해망상은 자존감 결여에서 비롯된 질병.

마탑의 다른 학파들이 부지런히 벌어온다면.

마법부여학은 벌어놓은 재산을 거덜 내는 학파였으니.

“당신들은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꾸는 게 좋을 거예요. 뭐가 좋다고 마법부여학에 매달리는 거죠? 빌어먹을, 학문! 내가 그대들처럼 나이라도 젊었다면……!”

평소엔 꺼내지 않는 나이까지 들먹이시는 걸 보면.

이번 피해망상은 쉽게 가시지 않겠군.

숙련 마법사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만도 하시지.’

하지만 그 심정이 이해가 됐다.

이 상황을 초래한 원흉은 명백했으니까.

히스테릭한 말을 내뱉던 키코가 결국 그 이름을 꺼냈다.

“대체, 이호열 수석께서는 뭐가 부족하셔서 굳이 마법부여학을 건드리시는 걸까요? 아무리 봐도 이건 눈치를 주는 게 분명해요! 적자만 내는 식충이들은 당장 마탑에서 꺼져라! 말 대신 이런 식으로 눈치를 주시는 거죠. 안 그래요?”

명백한 원흉, 이호열 수석!

그랬다.

가넷 홀 별실에 비상이 걸린 이유는 바로 호열의 주문서 때문이었다.

“내가 식사 자리에서 눈치를 줄 때부터 알아봤는데…….”

빼꼼─

원망스럽게 중얼거리던 키코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요청 다시 한번만 읽어주겠어요?”

푸석푸석한 진보랏빛 머리카락.

그보다 더 진하게 깔린 눈가의 눈그늘.

얼굴을 그렇게 쓰실 거면 차라리 절 주시지…….

“저기, 듣고 있나요?”

도리도리─

재촉에 숙련 마법사가 잡생각을 떨치고 대꾸했다.

“아, 네! 이호열 수석께서 보내주신 주문서에 따르면……. 첫째, 제출한 마도구에 깃든 효과를 추출하여, 마찬가지로 제출한 의복에 부여하는 것. 둘째, 재료에서 추출한 효과를 증폭하여 마도구에 부여하는 것…….”

키코는 양피지를 읽어나가는 숙련 마법사를 바라봤다.

조잘대는 입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키코는 속으로 곱씹었다.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네?’

역시나 모든 일의 원흉인 호열을!

애증의 마법부여학.

습득해야 하는 지식은 터무니없이 방대하지만, 정작 그 지식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손해가 너무나도 크다.

말했다시피 효율이 떨어지는 마법 분야란 말이다.

연구할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이다.

천하의 마르셀로 수석조차 마법부여학에 관한 지식은 기초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뭘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거야?’

굴러들어 온 수석이 보내온 주문서는 지나치게 상세했다.

마법부여학의 한계를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그 한계치에 근접하는 결과를 요구하는.

한마디로 너무나도 깐깐한 주문서란 말이었다!

‘마법부여학, 그것도 심화 과정에 대한 지식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주문을 요청할 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정기 학회 때에도 그랬다.

‘마법부여학 연구에 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었지.’

덕분에 애를 먹던 숙련 마법사가 바로 앞에 있었다.

한참이나 재잘거리던 숙련 마법사가 말을 끝마쳤다.

키코가 턱을 까딱거렸다.

“아직 뒷내용이 남은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인가요?”

“아, 추신이라고 덧붙이신 말이 있습니다.”

“추신?”

“도움이 된다면 활용하라고 적혀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저희 숙련 마법사의 지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이어서.”

절대 윗사람으로 두고 싶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

그러나 성격과 능력은 별개였다.

키코는 호열이 보여줬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인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당연하게도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 사건이었다.

‘정말, 보통이 아니었지.’

뱅그릿 톰.

원로 마법사.

그리고 악마 숭배자로 이어졌던.

상상하지도 못했던 마탑의 모순.

그걸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호열이었으니까.

‘도움이 된다면 활용해라?’

그러니까 호기심이 들었다.

대체 뭘 적어놨길래.

숙련 마법사들조차 이해하기 어렵다고 혀를 내두르는 걸까?

“읽어봐야겠군요.”

슥─

키코가 드디어 마법부여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짓했다.

숙련 마법사가 쪼르르 키코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대단하시네요. 진심으로.”

우리 굴러들어 온 수석께선.

무엇 하나 대충 하는 법이 없으시네.

추신이라고 하기엔 그 분량이 상당했다.

오죽했으면 상세했던 주문서보다도 내용이 길잖아?

괜히 읽어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내, 키코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잠시만. 이건?’

첫 문단을 읽는 순간.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해요.”

이건 마법부여학에 관련된 지식이 아니었으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다른 학파의 지식이니까요.”

그것도 뭐라 단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갖가지 학파의 지식이 섞여 적혀있었으니까.

그러나 마법부여학의 선임으로서 짐작할 수 있었다.

“괜히 이런 까다로운 요청을 해오신 게 아니었잖아?”

호열이 덧붙인 추신으로.

마법부여학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읽는 순간, 그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어려운 해결책도 아니었다.

그저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뿐.

‘어떻게 이런 관점으로?’

답은 마법부여학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키코가 발상을 전환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선임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생각.

“마법부여학이 최고다…….”

그래, 자신의 마법이 최고라 여기는 고집 때문이었다.

그러자 깨닫게 됐다.

호열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내놓을 수 있었는지도.

키코가 헛웃음을 뱉었다.

“오히려 굴러들어 온 돌이라 가능하셨다?”

왜,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 법이니까.

이내, 키코가 길게 늘어진 로브를 걷어 올렸다.

“그래. 좋아요. 저도 벗길 때가 됐네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낀 이끼를 벗길 때가 됐다.

그런 뜻에서 한 말이었건만.

추신조차 해석하지 못하는 숙련 마법사들이 그녀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갑자기 뭘 벗기신다는 거야?’

숙련 마법사들이 서로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셨으면 헛소리까지 하시는 걸까.’

‘불쌍한 우리 키코 선임님.’

‘……진심으로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꿔야 하나?’

*

마탑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바로 진리 추구.

물론, 지금 마탑은 진리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긴 하다만.

‘어쨌거나 최종 목표는 다 똑같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굳이 학파끼리 사이가 나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왜, 마법에 관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랑펠 덕분에 알게 됐거든.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여러 우물을 파서 그런가?

뜻밖에 쉽게 해답이 보였다.

정기 학회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마법부여 주문서도 마찬가지.

‘공부한 게 억울해서라도 제대로 적었지.’

마탑의 뿌리를 뽑겠노라.

다짐했던 것처럼.

나는 아주 상세한 요구를 덧붙여 마법부여 주문서를 뽑았다.

디테일 하나가 추가될 때마다.

단위수가 바뀌는 게 마탑의 마법부여 서비스란 걸 고려하면.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엄두도 못 낼 견적이라는 말이다.

‘적당히 해먹어야지. 뭐든.’

물론, 너무 날로 먹어도 배탈이 나는 법.

그래서 추신으로 덧붙였다.

『마법부여학 심화 이론』.

무간에서 독서하며 깨달은 지식을 말이다.

당연히 마법부여가 성공할 확률도 높아질 테니까.

나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일이란 거지.

귀찮더라도 뭐든 첫 단추를 잘 끼워놓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다음에도 제대로 써먹을 수 있거든.

“허나,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절차다.”

여기서 절차란 기한 엄수.

그야 언제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급하게 아이템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단 말이다.

그랬다.

아이템의 마법부여를 의뢰한 것도.

“나쁘지 않군.”

[숭고한 약속의 목걸이]

[등급 : 레어]

[제한 : Lv.300]

[효과 : 피격 시, 낮은 확률로 스킬 ‘중급 보호’ 발동.]

[설명 : 전장에 나서는 연인을 위한 목걸이다. 상대방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에 마력이 깃들어 뛰어난 효과를 가지게 됐다.]

인벤토리에 묵혀뒀던 아이템을 착용한 것도.

전부 만반의 준비를 위해서였다.

위협 요소를 제거해야 하니까.

─도주한 악마 숭배자를 처분하라. (진행 중)

●상위 마왕의 부활을 저지하라. (진행 중)

그저 책장을 넘기고, 티타임을 즐겼을 뿐이거늘.

악마 숭배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계획을 털어놨다.

나는 태연하게 읊조렸다.

“상위든, 하위든, 마왕이든. 하찮다는 것에 변함은 없다.”

긍지에 휘둘려 말은 그렇게 했다만.

이게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쯤이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악마 사냥꾼의 지식이 말해주고 있었거든.

-“마왕이라고 전부 같은 마왕이 아니다. 그 서열에 따라 하급 악마와 마왕. 그 이상의 격차가 나기도 하니까. 따라서 상위 마왕은 거악과 다를 것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말하자면 간단했다.

꼼수를 부려서 지름길로 가려는 건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악마.

그리고 악마 숭배자.

녀석들도 똑같았다.

-“……우리의 계획은 상위 마왕을 보다 빠르게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래, 뱅그릿 톰은 그 제물 중 하나에 불과했지. 빌어먹게도 실패하고 말았지만.”

처음 그 소릴 들었을 땐 진짜 아찔했지.

마왕, 데카라비아를 쓰러트리긴 했었지만.

데카라비아의 서열은 72 마왕 중 고작 69위에 불과했으니까.

그 데카라비아와 상위 마왕 사이엔.

하급 악마와 마왕.

그 이상의 격차가 있단 뜻이었다……!

거악, 칠죄종 탐욕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녀석은 데카라비아도 알고 있던 [구마의식]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악이라 부를 상대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쓰러트린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런 나사 빠진 녀석들조차.

구질구질하게 쓰러트리는 게 최선이었던 나였단 말이다.

만약 악마 숭배자들의 계획대로.

지금 시점에서 상위 마왕이 부활했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정말.’

그런 의미에선 다시금 자화자찬할 수밖에 없다.

‘나대는 것도 타이밍 좋게 잘 나댔구나.’

장하다, 이호열.

원로 마법사들 앞이라고 주눅이 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덕분에 이렇게 반격할 기회가 생긴 셈이었으니까.

그러나.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게 불쾌하군.”

마탑에서 도주한 한 명의 악마 숭배자.

그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상.

악마 숭배자들의 상위 마왕 부활 계획은 아직 유효하다.

무간에 갇힌 숭배자들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것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믿고 지금까지 인내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야……! 나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다고. 정신이 버티지 못한단 말이다!”

물론, 사실대로 말했다고 해서 풀어줄 순 없는 노릇.

무엇보다 이들은 마탑의 대역죄인이 아니던가?

대역죄인이라면 대역죄인답게.

마탑의 절차에 따라 그 처벌을 감당하는 것이 옳다.

‘물론, 나머지 하나도 마찬가지고.’

하나 남은 악마 숭배자.

그 행방에 대해선 악마 숭배자들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빡세네.’

인간에게 빙의한 악마도 [천적관계]가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었으니까. 악마 숭배자, 그것도 모자라 원로 마법사 자리까지 차지했던 작자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겠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섣불리 행동하는 그날이 처분의 날이 될 것이다.”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움직이는 순간이 바로.

내가.

아니, 정확히는 마탑이.

대역죄인을 처단하기 위해 움직이는 날이 될 테니까.

그래.

마르셀로는 물론,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들까지.

다시 한번.

호가호위를 넘어선 위세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오히려 기다려지는데?’

그러나 이 시커먼 속내는 혼자라고 해도.

드러낼 수 없는 것.

나는 냉랭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최후까지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보거라.”

왜,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금방 다리에 쥐가 날지도 모를걸?

*

호텔 최상층.

널브러진 옷가지들.

그곳에 자욱한 연기.

요동치는 부정한 기운.

“과연, 악마의 소굴이라 불려 마땅하군.”

포마드로 넘긴 백발.

적절하게 손질한 수염.

갖춰 입은 현대식 복장까지.

원로 마법사.

이제는 악마 숭배자에 불과한 카림제바가 말을 이었다.

“이 세계도 아르카나 대륙과 다를 바 없군. 그래.”

그는 완벽하게 사회에 적응한 모습이었다.

그의 몸에서 일렁이는 방대한 마력만 빼면 말이다.

“다를 바 없기는. 오히려 더 좆 같지요.”

침대 위.

술에 취한 여인들 사이에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악마 숭배자 앞에서 숨길 게 뭐가 있을까.

드러내는 빙의의 증거.

그가 새까만 동공으로 호텔을 둘러봤다.

“나도 악마지만, 어떻게 보면 악마보다 더 악랄하거든요? 마왕을 위해서라든가. 강해지기 악행을 저지른다든가. 그따위 명분도 없어요. 단순하게 자기 쾌락을 위해서 같은 인간을 구렁텅이로 걷어차 버린다니까?”

“말조심하게.”

“알겠습니다. 어떻게 된 게 악마인 나보다도 끔찍하게 마왕님을 챙기시는 건……!”

고오오오─

살기 등등한 카림제바의 기세.

악마는 다급하게 양손을 들어 올리고는 말을 주워담았다.

“에이. 농담. 농담도 못 하나?”

“자네에겐 우리의 계획이 농담처럼 들렸나 보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제 말은……!”

“됐네. 긴 이야기는 필요 없겠지.”

마탑에서 도주.

사회 속에 숨어든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텔레파시』가 오지 않는다.’

마탑에 남아있는 원로 마법사.

악마 숭배자들에게서 소식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마탑에 접근할 수 없기에.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원로 마법사였다.

어느 누가 그들의 말과 행동에 의심을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의심을 제기한다고 한들.

그들이 자신에게 텔레파시조차 보내지 못할 정도로.

위기에 빠지진 않았을 터.

‘……설마.’

배신한 건가?

과거 마탑을 배신했던 것처럼.

이번엔 악마를 배신한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기다릴수록 불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카림제바는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에게.

카림제바가 말했다.

“내겐 마탑의 소식이 필요하다. 이 세계에서 그대의 지위라면 어렵지 않게 그에 관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겠지. 그를 위해서 차지한 육신일 테니까.”

그의 말에 악마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그렇게 잘 알고 계시면서 말이야.”

“……?”

“유일하게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나한테. 그렇게 막 대하시면 쓰나? 그쪽이 대단하신 양반이라는 건 알겠는데. 우리 사이엔 이해관계가 있잖아, 안 그래?”

……빌어먹을, 악마 새끼가.

간섭까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마력만으로도.

이따위 악마쯤은 터트려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탑에 관한 소식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럼 계획도…….’

카림제바는 필사적으로 살기를 억눌렀다.

그리고 대답했다.

“자네의 말이 옳군. 내가 경솔했네.”

과거, 화룡(火龍)이라 불렸던 카림제바가.

악마 따위에게 굽히는 꼴이라니.

고작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거늘.

벌써부터 다리를 삐끗한 기분이 들었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