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나쁘지 않은 울림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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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324]
[능력치]
근력 : 53 / 민첩 : 60 / 마력 : 271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0]
정말 [칭호]라는 항목이 생성됐다.
순간, 머릿속에 스쳐 가는 아르카나에 관한 비루한 지식.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칭호라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나였다.
다른 게임이면 몰라도, 적어도 아르카나에서 칭호란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이 확실했으니까.
나는 떠올랐던 메시지를 되새겼다.
아르카나 대륙에 나의 업적이 울려 퍼졌고.
그 업적이 대륙의 생명들 사이에서 회자됐고.
덕분에 칭호를 습득했다고 했었겠다…….
‘이건 스탯이 개방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칭호].
그게 원래부터 아르카나에 존재했던 시스템인지.
그게 아니라면 대격변 이후에 새롭게 업데이트된 시스템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인지했다.
‘지금만 해도 획득 조건이 말이 안 된다.’
월드급 퀘스트 정도는 수행해 줘야 칭호를 습득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다시.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진다.
……이것이 과연 옳은 보상인가?
내가 [칭호]라는 걸 받아도 되는 건가.
과정은 개뿔.
오직 결과만 보고 달린 나였다.
최선이었다고는 해도 요행은 요행.
그러나 뻔뻔하게도.
“최후의 모험가라.”
항상(恒常).
그 감정을 내색할 수 없기에.
게다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한껏 꼿꼿해진 목과 척추의 각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알아차릴 정도로.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
세계수를 향하는 뿌듯한 눈초리까지.
“나쁘지 않은 울림이군.”
그래, 세계수를 발아한 것도.
그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를 알리게 된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는 나, 그랑펠의 반응을 말이다.
물론, 이 철면피에는 나도 슬슬 적응하던 차.
그런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칭호]의 효과를 확인하는 거겠지.
과정이야 어쨌든.
그 결과는, 보상은 확실하게 챙겨야 하는 법 아니겠어?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그런데 뭐냐.
이 효과는?
잠깐, 사망하지 않는다는 건 ‘불사’라는 거 아니야?
대충 봐도 효과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불사를 떠나서 그 전제 조건부터도.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마아아앙?!!
아니, 근데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아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작 아르카나 대륙으로 갈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데! 그 방법을 알았으면 말이야.
마탑의 마법사들을 비롯한 아르카나인들이 현실에 머무르고 있지도 않았을 거란 말이다.
‘……근데 어째 익숙하다?’
그런데, 칭호의 괴상한 효과가 왠지 낯익었다.
잠깐만, 애초에 그 명칭부터가.
최후의 ‘모험가’잖아.
모험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아르카나인들이 플레이어들을 칭하던 단어.
그래, 나는 플레이어.
모험가였으니까.
‘만약,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한다면.’
나는 최후의 모험가가 맞겠지.
그런 관점에서 보니까 효과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거 역시……!’
사망 시, 24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다.
‘접근’이란 단어를 ‘접속’으로 바꾼다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사망 페널티와 똑같았다……!
나는 칭호의 효과를 몇 번이고 새겨 읽다가 입을 열었다.
“가설에 불과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시스템 메시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칭호]를 줬다는 것?
반드시 이 [칭호]를 써먹을 날이 온다는 거겠지.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현실에서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하는 것 또한.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란 말이었다.
‘물론,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동안 두려움에 떨고 있거라. 열등한 족속이여.”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하는 날이 바로.
악마들이 공포에 떠는 날이 되겠지.
매일같이 발버둥을 치는 내가 아니던가.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는 강해져 있을 테니까.
거기에 [최후의 모험가] 효과까지 생각한다면…….
‘죽어도 24시간 뒤에 살아나서 다시 나타난다는 거잖아.’
적어도 악마에게 나는.
그랑펠은 공포의 대상을 넘어선.
악몽이 되지 않을까?
물론, 아득히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기에.
생각은 그쯤에서 정리.
나는 세계수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늪지대의 어느 거목보다 커진 세계수.
스쳐 지나갔던 메시지처럼.
이곳은 더 이상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포식자의 늪지대가 아니었다.
[세계수의 비밀정원에 진입하셨습니다.]
“형님들. 다, 다들 보고 계시죠? 몬스터들이!!”
몬스터에게서 전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으로서.
그들 또한 세계수가 새롭게 자라났다는 의미를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 거겠지. 아르카나 대륙이 절멸의 위기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세계수의 비밀정원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쿠구궁─!
이내, 흔들리는 시야.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뒤섞인 [『기이』]의 공간은 이제 각각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플레이어들에겐 익숙한 현상. 하지만 님프는 당황한 눈치였다.
“풍경이 다시금……!”
물론, 걱정할 건 없다.
님프와 나는 계약 관계.
다음 균열에서 재회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때까지.’
점차 강렬해지는 빛.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나는 님프에게 말했다.
“나를 대신해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을 목도할 수 있겠나?”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
님프와 계약을 맺기 전, 고려했던 것처럼.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정보는 중요하다.
게다가 칭호의 효과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가능성까지 확인한 지금 상황에서는 더더욱.
‘물론, 쉽지 않겠지.’
온전한 지역을 찾기 힘든 아르카나 대륙이다.
님프가 이곳, 포식자의 늪지대에 머무르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계약을 맺은 덕분에. 계약자인 나의 영향으로 그 외관과 성품이 바뀐 님프다.
“호열 님의 신뢰에 보답하겠습니다.”
긍지가 생겼을 테니.
두려움은 없겠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 무거운 긍지를 감당하기에.
님프의 날개는 너무나도 허약하다는 것을……!
겉보기엔 상위 정령 혹은 정령왕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님프는 어디까지나 하위 정령이었으니까.
비루한 나의 마력 탓에 전투력의 상승을 기대하기도 힘들겠지.
그러나.
‘내가 마력은 쥐뿔도 없어도.’
물려받은 ‘유산’이 조금 있거든.
바로 악크샨의 유산, [퀴른베르크 기계탑] 말이다.
그래, 이 순간에도.
기계탑은 악크샨의 결전병기로서의 긍지를 다하고 있을 터.
그 [퀴른베르크 기계탑]이야말로 님프에겐 안전하면서도, 대륙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물론, 그에 얽힌 사연을.
말로 설명하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나는 님프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나의 안배와 함께하도록.”
마지막까지 나답게.
뻔뻔하게.
*
……번뜩!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플레이어들이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건 스칸디나비아의 침엽수림.
“와, 진짜 이렇게 끝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마지막에 뭐였지, 그거? 몬스터들이 무릎을 꿇지 않았어?”
“세계수라니. 너무 많은 메시지가 빠르게 떠올라서 뭐가 뭔지……!”
“잠깐, 그래서 이호열은?”
[포식자의 늪지대].
아니, 이제는 [세계수의 비밀정원]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이번 균열에서도.
말도 안 되는 행보를 보여준 호열이었다.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호열을 찾는 건 당연한 일.
“진짜 뭐라도 건지면 대박이다. 알지?”
“알고 있어요. 저도.”
“빨리. 입 제대로 풀어놔. 어차피 여기로 올 수밖에 없으니까.”
“으으, 어떻게 여긴 아직도 춥냐?”
포탈 주변.
수많은 취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 취재 대상이 천하의 호열이라고 해도, 이건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건이 아니었다.
그래, 호열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민감한 질문은 건너뛴다고 하더라도.
“딱, 검술에 관한 것만 물어볼까요?”
“그래, 그거라도 건지는 게 어디야.”
“그쵸? 이 정도는 대답해 주겠죠. 이호열도?”
“글쎄. 그러길 바라야지. 뭐.”
충분히 화제가 될만한 떡밥이 워낙 많았어야지.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호열의 기분이었다.
부르르.
입술을 떨던 앵커가 혹시나 하며 말을 이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호열도 사람인데. 이번 균열에서 얻은 성과가 얼마나 많은데. 기분도 좋겠다, 이런 사소한 질문에 대답 정도는 해주겠죠? 짧게라도?”
그저 정령 계약에서 호열의 활약이 끝났다면.
질문할 엄두도 내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마지막에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고, 성공적으로 뿌리까지 내리게 했던 호열이 아니던가?
대격변 이전, 이후를 떠나서 이 정도의 업적을 세운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궁금한 건 따로 있지만…….”
당당하고 거침없던 호열의 행동들.
그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과연, 호열은 어디까지 알고 균열에 진입했던 걸까.
이번 활약으로 어떤 보상을 획득하게 됐을까.
‘그런 예민한 질문은 분위기를 봐서 이어 나가보자.’
앵커가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이내, 호열과 마주했다.
그러나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
앵커를 비롯.
누구도 호열에게 말을 걸 순 없었다.
또각─
호열이 포탈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도.
이유야 간단했다.
‘또 뭐가 문젠데!’
그 사전에 만족이란 단어는 없다는 듯.
더없이 굳은 무표정.
호열이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멍하니 호열이 사라진 포탈을 바라보던 도중.
누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설마, 이런 업적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는 건가?”
그랬다.
그렇다고 볼 수밖에 볼 수 없는 반응이었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호열은 얼마나 먼 곳까지 내다보고 있단 말인가?
.
.
.
원망스러울 정도로 하찮은 마력.
누구 하나 말을 걸거나, 붙잡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말.
내겐 상냥하게 대답할 기운 따윈 없었으니까.
누군가 붙잡는다면 그대로 꼬꾸라질 자신만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선 감탄만 나오는구나.
‘이런 꼬라지로 기어코 계단을 올라가는구나.’
또각─
나는 곧장 나의 연구실로 향했다.
마력 탈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마력 보충이 필요했다.
마력 보충의 방법 또한 심히 효율이 떨어지는 방식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그래, 역시나 빌어먹을 격식 때문이란 말이다……!
마력을 보충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
당연하게도 비약초로 만든 마력 재생 포션을 섭취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간단한가?
음료수를 마시는 것과 다름없단 말이다.
그러나 그랑펠의 고귀하신 격식과 품위께서.
포션으로 병나발을 부는 행위를 용납할 리 없었으니.
나는 결국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찻잔을 준비했다.
달칵─
비효율적인 마도구, [간이 램프]로 물을 끓이고.
비효율적으로 비약초 티백이 우러날 때까지 기다린 뒤.
비효율적으로 차를 음미하며 마력을 회복했다.
“마침표를 찍는 것만큼이나 쉼표를 찍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내가 진짜 앓느니 죽지.’
그래도 쉼표,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엔 격하게 공감한다.
[포식자의 늪지대]에 진입한 순간부터.
나는 단 한 번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으니까.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자니.
문득, 아쉬움이 떠오르는군.
정령왕 드라이어드의 축복이 말이다.
‘결국, 경험치랑 드롭율 버프는 맛도 못 봤네.’
수지타산을 따지자면야.
월드 퀘스트가 훨씬 이득이겠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레벨이 아쉬운 입장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한 방이 있었다.
왜,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가동한 순간.
떠올랐던 메시지를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거든.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경험치가 축적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명성이 축적됩니다.]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에 대한 습득 권한을 획득합니다.]
칭호, 최후의 모험가.
그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지금.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경험치와 명성은 내겐 쌓아둔 적금이나 다름없다는 거지.
‘물론, 만기일이 언제인지는 나도 모르는데.’
어쨌거나 찾기만 하면 인생 역전.
아니, 레벨 역전이 가능하단 말이다.
‘그때가 되면 말이야.’
마탑의 뿌리도 제대로 뽑을 수 있겠지.
레벨 제한 때문에 활용하지 못했던 마탑의 마도구들도 왕창 대여하고. 마력 소모 때문에 발현할 엄두도 못 내는 마법도 난사해 보고!
내가 일확천금의 꿈에 부푼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양피지를 확인했다.
선명하게 떠올라 있는 글씨.
과연, 약속된 만남이 있었군.
‘마침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희소식이 있었으니까.
나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나. 마르셀로.”
*
저벅─
계단을 내려가는 마르셀로의 걸음은 가벼웠다.
야위여 가는 몸 때문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마음 때문이었다.
안건이 통과됐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문득, 계단에 멈춰선 마르셀로가 마탑의 전경을 한 차례 둘러봤다.
‘탑주님. 모순의 굴레를 끊고 비로소 마탑이 움직입니다.’
비록 그 첫걸음은 미약할지라도.
모든 건 첫걸음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마르셀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경에게도 처음으로 희소식을 들려줄 수 있겠습니다.’
과연, 호열 경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그래도 약간은 놀라지 않으실까.
그러나.
마르셀로의 야심 찬 생각은 이내 무너지고 말았다.
달칵─
호열이 내어준 차를 들이켬과 동시에.
“?!”
커흡.
뜨거운 찻물을 간신히 삼킨 마르셀로가 되물었다.
“세, 세계수라니. 게다가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정보도 알 수 있게 되셨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로서는 이해가……!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마탑의 수석 마법사조차 따라가기 벅찬 진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