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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91화 (23/489)

◈ 91화. 늪에서 피어나는 (8)

“세계수의 씨앗을 발아하기 위함이다.”

“……!!!”

무엇 하나 숨길 것이 없다는 당당함.

호열의 말에 길드 마스터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나마 대답할 수 있던 건.

호열과 함께하며 그 충격적인 행보에 조금은 내성이 생긴 남태민이었다.

“호열 씨. 그 진도가 너무 빨라서 그러는데……. 혹시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게 이거, 이 거대한 바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바위가 아닌 세계수의 씨앗이다.”

“세계수라니…….”

호열이 거짓말을 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갑자기 세계수가 튀어나올 줄이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게 당연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외형만큼이나 고고한 목소리.

정령의 목소리에 남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열 씨가 그러시다면 맞겠죠. 저는 믿습니다.”

남태민이 믿고 말고 자시고.

레오니의 머릿속은 혼란했다.

‘……이런 걸 막, 말해줘도 되는 거야?’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르카나에 관한 정보는 곧 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계수란 단어를.

본인의 입으로 꺼낼 줄이야.

따지고 보면 남인 자신들에게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이었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

그런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걸 질색하는 레오니였지만…….

‘그래도 생판 남은 아니라는 건가?’

흠칫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히사기의 생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두 사람보다 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숨기려고 하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다.

아니, 자신이었으면 무조건 숨겼을 것이다.

세계수의 씨앗이라니.

듣기만 해도 엄청난 보상이 얽혀있다는 것쯤이야.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직감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호열은 당연하다는 듯 진실을 말했다.

‘가온과 버서커는 몰라도. 우리에게까지.’

홋카이도에서도, 유스라 왕국에서도 느꼈거늘.

고민해 봤자 어찌 호열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까?

히사기는 그저 다짐할 뿐이었다.

“그 협조가 무엇이 됐든 이나즈나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남태민과 레오니.

두 사람은 대답할 것도 없다는 듯.

호열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호열에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워야 하기 위해선.”

하기 위해선……!

“상당한 집중력을 요하는 바.”

그래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호열의 말에 경청하면서도.

세 사람은 나름대로 아르카나의 경험을 활용해 머리를 굴려봤다.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일단 조사부터 시작해야 하겠지.

거대한 씨앗을 살피는 데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터.

‘싸움이 길어질 것 같은데.’

‘만반의 준비를 한 보람이 있군.’

‘여차하면 아예 진지를 구축하는 것도…….’

그런데.

“잠시나마 소란을 잠재워 줄 수 있겠나?”

……잠시나마라니?

호열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이 이번에도 역시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건 저 거대한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는 데에도 잠깐이면 충분하다는 소리였으니까.

‘나는 세계수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야?’

‘과연, 호열 씨다.’

어떤 의미인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호열의 선언.

그에 대한 반응은 각기 달랐거늘.

이 순간, 세 길드 마스터의 행동은 똑같았다.

세계수의 씨앗.

전리품에 가까워진 지금.

호열과 세 길드는 공공의 적이 된 셈.

“온다!”

그래, 달려드는 포식자들과 전투를.

아니, 호열의 요청대로 협조를.

소란을 잠재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맹독뿔 코뿔소 : Lv.530]

[누더기 맹수 : Lv.550]

[뼈 무덤 지기 골렘 : Lv.600]…….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레벨을 고려했을 때.

하나의 길드였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겠지.

길드 랭킹 4위, 보헤미안만 하더라도 고작 두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까. 그러나 하나의 길드가 아니었다.

“좋아. 질척거릴 때처럼만 하면 되겠네. 전문이잖아?”

게다가 가온과 이나즈마.

서로 자웅을 겨뤄온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두 길드였다.

길드 마스터는 물론, 길드원들끼리도.

서로의 장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두 길드가 처음으로 합을 맞췄다?

그 합이 처음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았다.

지켜보던 광전사의 광기에 불이 붙을 정도로.

콱─!

날아드는 화살을 맨손으로 낚아챈 뒤.

쌔애애액─!

푸욱─!

괴력을 발휘, 되려 맨손으로 화살을 투척하는 남태민.

서걱─!

말 그대로 살을 내주고.

서걱서걱─!

뼈를 잘라버리는 레오니.

바바리안과 광전사.

남태민과 레오니가 맹렬하게 전장을 휘젓는다면.

히사기는 창으로 전투의 속도를 능숙하게 조율했다.

정말,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보는 게 맞단 말인가?

지켜보던 이들도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저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굉장한 호흡입니다. 십여 마리에 가까운 몬스터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가온과 이나즈마야 샤이닝과 천하통일을 제외하면 최고라 꼽히는 길드들이 아니겠습니까? 그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어요!”

“버서커도 만만치 않습니다. 길드 랭킹은 두 길드보다 뒤처지지만 광전사라 불리는 만큼. 전장에서의 기세만큼은 두 길드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포식자 구역 균열.

싸움이 끊이지 않는 만큼.

많은 볼거리가 있으리라 생각은 했건만.

-내 평생 가온이랑 이나즈마가 한 팀 먹는 걸 볼 줄이야ㅋㅋ

-만우절에 해도 욕 처먹을 농담이 현실이 됐네ㄷㄷ

-랭커들이 괜히 랭커가 아니긴 하네 ㄹㅇ

-몹이랑 렙차 꽤 나는데도 안 밀리네

정말 한시도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쏟아졌다.

당연하게도 그 지분의 대다수는 호열에게 있었다.

연잎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심상치 않은 등장부터.

숨겼던 비수처럼 드러냈던 검술.

정령과 계약을 맺은 것도 모자라서.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를 연합하게 하다니.

그 사실을 알기에.

지켜보는 이들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는 물론.

-걍 정령 계약이 목적인 줄 알았는데

-아니 그게 목적이었으면 바로 균열 나갔겠지ㅋㅋ;;

-하긴 경험치나 드롭율 버프가 의미 없음 이호열한텐

VBC 스튜디오.

“이호열 플레이어에겐 더 큰 목적이 있을 겁니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길드를 규합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아니, 전 세계가 호열에게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손에 땀을 쥐며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PD 현용석.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방송일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말이야.”

“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더라고. 자극이 큰 재미나 스릴을 줘버리면 거기에 적응을 해버리는 거야. 드라마 쪽만 봐도 알잖아? 웰메이드라고 칭송받아도 정작 막장 드라마보다 시청률 안 나오는 거.”

“그거야 그렇죠?”

“그런데 그 막장의 수위에도 적응한다는 거지.”

“듣고 보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이젠 태생의 비밀은 기본에다가 불륜에 범죄에 배다른 남매에……. 여튼 엄청난 설정들을 달고 나오니까요.”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러니까 나는 걱정이 된단 거야.”

“걱정이요? 갑자기 방송국 걱정하시는 거예요?”

어리둥절한 조연출의 반응에 현용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호열.”

지금까지 보여준 게 워낙 많으니까.

이제 호열은 웬만해선 대중들을 만족시킬 수 없겠지.

왜, 지금만 하더라도 그랬다.

‘나였으면 부담스러워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을 거야.’

호열의 생각을 알 순 없지만.

현용석은 머리를 굴려봤다.

‘마법도 모자라 수준급의 검술. 정령의 존재를 증명한 것도 모자라서 최소 상위급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

게다가 가온과 이나즈마, 버서커가 서로 연합하게 만들었지.’

그것만 하더라도 며칠은.

아니, 몇 주는 떠들어 댈 수 있는 활약이었다.

그러나 보다시피 인간이란 간사한 생물이라서.

또 다시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호열이라면 더 대단한 걸 보여줄 거라고 말이야.’

그러나 현용석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투데이 아르카나를 연출하며 보는 눈이 생겼단 것이다.

‘이번엔 보여준 게 워낙 많다.’

그 활약들을 뛰어넘을 활약은.

제아무리 이호열이라고 한들 보여주기 힘들 것이다.

현용석은 생각했다.

‘물론, 그것조차 잘 포장하는 게 연출자의 역할이지.’

하지만 착각이었다.

“……서, 선배! 저거 봐요!”

“으, 응? 왜?”

“아니, 이호열 봐요!”

다급한 조연출의 부름.

다시금 모니터로 향하는 시선.

이내, 현용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저거 바위가 아니었어?”

호열에게 포장 따위가 필요할 리가.

*

더없이 든든하다.

이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서.

이보다 든든한 지원군은 또 찾을 수 없겠지.

‘랭커가 괜히 랭커가 아니다.’

프로스트 탈환에서 클래스 퀘스트를 시작한 남태민.

클래스 퀘스트 없이도 플레이어 랭킹 최상위권에 속하던 그였다.

클래스 퀘스트의 보상 덕분이겠지.

정말 볼 때마다 눈에 띄게 강해지는군.

‘또 라이벌이 괜히 라이벌이 아니고.’

그런 남태민의 라이벌이 바로 히사기였으니까.

두말할 건 없었고.

‘레오니야 뭐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랑펠의 기준에 부합하는 훌륭한 실력자였다.

한 때는 그런 레오니의 검술을 써먹어 보려고 혼자서 몸을 움직여 보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별다른 방해 없이 세계수의 씨앗에 접근할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크잖아, 이거.

세계수가 어디에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 씨앗이 여기까지 굴러 들어오게 된 경위가 궁금해지는 스케일이다. 정말.

“시작하겠다, 님프.”

그러나 망설임은 없다.

거대한 크기만큼 그 후폭풍, 마력 탈진이 우려되기는 했다만…….

내겐 확신이 있었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에 세계수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으니.

세계수는 언제까지나 식물.

“그 뜻대로.”

님프에겐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축복이 있었으니까.

나와 님프가 동시에 세계수의 씨앗에 손을 올렸다.

단단하군.

내가 느낀 건 그뿐이었지만, 님프는 아닌 모양이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나의 영향을 받은 님프가 아니던가?

역시, 한 번 결심한 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고오오오─!

님프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세계수의 씨앗에 스며드는 {자연}의 힘.

과연,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친, 마력 빠져나가는 거 봐라.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로 속도일 줄이야.

세계수의 씨앗이란 거대한 스펀지에.

고작 물 몇 방울 떨어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 없다.

설령 마력 탈진으로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도.

눈앞이 핑핑 도는 것도.

필사적으로 억누를 수밖에 없단 말이다.

추위를 참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

과연, 경이로울 정도의 격식에 대한 집착.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탈력감이 느껴졌거늘.

나는 꼿꼿이 선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메소드 연기!

전투에 몰입한 플레이어들만큼.

나도 사투를 벌이고 있단 말이다.

물론, 그 사실은 바로 곁의 님프조차 알아차릴 수 없었으니.

님프는 나의 마력을 물 쓰듯 {자연}의 능력.

축복으로 치환하고 있었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내 인생이 이렇게나 서럽다…….

하지만.

“……!”

알아주는 사람, 정령은 없어도.

[세계수의 씨앗이 발아합니다.]

그래, 시스템은 내 개고생을 알고 있었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님프가 말했다.

“호열 님, 지켜봐 주신 덕분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현재 싹 틔운 세계수의 씨앗 1개 / 알 수 없음

성공했다!

그 과정이 어땠느냐고 묻지 마라.

구질구질하든, 중간 과정을 한참 건너뛰었든, 어쨌든.

중요한 건 언제까지나 결과란 말이다.

“가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번만큼은 뻔뻔한 게 아니었다.

만약, 정석대로 세계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워야 했다면. 아르카나 대륙은 그 이전에 악마에게 멸망을 당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래, 이번만큼은 훌륭하게 해냈다. 이호열.

자화자찬도 잠깐.

나는 메시지에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이게 세계수인가.’

스르르─

서서히 갈라지는 씨앗.

촤아아아─

그 사이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호열 씨?”

“버, 벌써 끝났어요?”

“과연, 호열 상……!!”

가까이에 있던 이들부터 그 광경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건 플레이어와 몬스터를 가리지 않았다.

생사가 오가는 전투조차 멈추고는.

새로운 세계수의 탄생에 집중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떡잎은 줄기가 되고 밑동이 되어간다.

뻗어 나간 뿌리가 늪지대를 단단하게 붙든다.

마치 늪지대의 습기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양분이었다는 것처럼.

수위가 낮아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세계수는 수분을 흡수해 갔다.

그리고는 나뭇가지에서 잎사귀를 틔워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세계수가 아르카나 대륙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이 세계수의 탄생을 축복합니다.]

[아르카나 대륙 전체에 생명의 기운이 일렁입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메시지의 향연.

진짜 월드급 퀘스트였으니까.

나에게만 떠오른 메시지는 아니겠지.

“세, 세계수?!”

“설마, 저게 세계수의 씨앗이었어?”

“이호열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서……?”

그러나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 이유는 월드 퀘스트를 수행 중인.

오직 나에게만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당신의 업적이 울려 퍼집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들이 당신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칭호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칭호, ‘최후의 모험가’를 습득합니다.]

……칭호 시스템이라고?

잠깐, 무슨 효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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