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늪에서 피어나는 (7)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착용 시,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광물과 모든 식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
[설명 :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지식이 담긴 마도구.]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이 말했다.
저건 바위가 아니다.
모든 식물에 관한 지식도 말했다.
저건 씨앗, 그것도 세계수의 씨앗이라고.
그래, 세계수는 숲의 정령 님프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
만약, 서적 따위에 세계수에 관한 글귀가 적혀있었더라면.
나는 그 정보를 쉽게 신뢰할 수 없었겠지.
그러나 에픽 아이템이 괜히 에픽이 아니란 말씀이시다.
‘아이템 효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거든.’
전리품은 바위 따위가 아니었다.
세계수의 씨앗이었다.
그 진실을 알게 된 나의 첫마디.
“진정으로 대륙 절멸의 위기가 도래한 모양이로군.”
님프가 정중하게 되물어왔다.
“호열 님.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부족한 저로서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도 아이템 효과가 아니었다면 짐작조차 못 했을걸?
설령 세계수가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수가 이렇게 씨앗을 뿌릴 줄 누가 알았겠어?
“네가 부족한 게 아니다.”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세계수가 씨앗을 뿌린다는 것.
세계수, 자신이 크나큰 위협을 받고 있다는 뜻.
당연하게도 그 위협은 악마를 말하는 거겠지.
‘이 지식은 얼마 전까지 악마의 지식이었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은 악마의 아이템.
그것도 마왕, 데카라비아에게서 획득한 아이템이었다.
데카라비아, 녀석도 지금의 나처럼 모든 광물과 식물에 관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세계수에 관한 정보 또한 알고 있었을 터.
‘그 정보를 활용해 세계수에 위협을 가한 건가?’
물론, 구체적인 사연까지야.
내가 알 길은 없다.
과거의 아르카나 대륙에서 벌어진 일이다.
현실의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
도래한 아르카나 대륙 절멸의 위기.
거대한 위기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싹 틔워라.
─세계수의 씨앗을 발아하라. (진행 중)
●현재 발견한 세계수의 씨앗 1개 / 알 수 없음
●현재 싹 틔운 세계수의 씨앗 0개 / 알 수 없음
떠오른 퀘스트.
그것도 월드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
문득, 플레이어들의 호들갑이 떠올랐다.
모든 플레이어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건 월드급 퀘스트가 분명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월드급 퀘스트를 성공한 게 분명하다.
다들 그렇다고들 하니까.
나도 그런 줄만 알았지.
그런데 떠오른 퀘스트창을 보고 있자니 깨닫게 된다.
진짜 월드급 퀘스트는 따로 있었다고!
그 스케일부터 정말 월드급이시다.
스토리만 따져봐도 어떠한가?
대륙의 어머니라 불리는 세계수가 위기에 빠졌고, 그런 월드급의 위기에서 새로운 희망인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워야 한단다!
말했다시피 주제 파악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나였다.
‘……뭔가 일러도 한참 이른 것 같지 않아?’
이런 월드급 퀘스트를 감당하는 나의 레벨은 고작 324레벨.
세계수도 한탄하지 않을까.
뭐 이런 뉴비가 자신의 씨앗을 싹 틔우게 됐냐면서.
그래, 일반적인 상황을 생각해 보자.
‘저게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퀘스트가 떠올랐으니까. 세계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바로 퀘스트의 시작 조건이겠지.’
……잠깐, 그 시작 조건부터 말이 안 되잖아?!
말했다시피.
숲의 정령 님프조차 세계수에 관해서는 무지했다.
마탑이라고 다를까.
그동안 수많은 마법 서적을 읽어온 나였거늘.
세계수란 단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플레이어가.
베일에 싸인 세계수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면?
못해도 1,000레벨은 찍어야 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그러니까 한 줄로 요약하자면.
나는 정상적인 퀘스트 진행을 벗어났단 소리였다.
마왕 데카라비아를 쓰러트리고.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을 손에 넣은 덕분에.
그 엄청난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월드급 퀘스트를 시작할 수 있던 게 분명했다……!
이거, 부담스러운 게 이상한 게 아니었잖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이런 월드 퀘스트를 성공할 그릇이 되나, 고뇌하면서.
그러나.
내가 언제부터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해왔던가.
거악 칠죄종 탐욕.
마왕 데카라비아.
마탑 악마 숭배자 원로 마법사들.
300레벨도 아니었다.
100, 200레벨에 불과할 때도.
그저 긍지가 이끄는 대로 행동했던 나였단 말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설령 그 긍지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단 사실을.
게다가.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나는 아르카나 대륙을 목격했다.
그것도 악마에게 짓밟히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을.
악마들이 세계수의 씨앗이 싹틀 때까지 보고만 있을 확률?
심지어 마왕 데카라비아가 존재했던 이상.
일말의 가능성조차 기대할 수 없겠지.
그러니까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또한 그대의 긍지를 가벼이 여길 수 없겠지. 세계수여.”
나의 읊조림에 님프가 동요했다.
“세계수라 하시면……. 설마, 씨앗이라는 게?”
내 말투가 오글거려서 동요한 게 아니라 다행이군.
어쨌거나.
님프도 모든 걸 알아차린 눈치였다.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어째서 저 많은 이들이 바위를, 씨앗을 탐을 냈는지를요. 본능이겠지요. 세계수의 씨앗에는 감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기운이 담겨있을 테니까요.”
세계수가 실존하는 것이었다니…….
님프는 말꼬리를 흐렸다.
계약자, 나의 영향으로 그 고고한 자태가 흔들리지 않던 님프였거늘.
그래서 저 거대한 세계수의 씨앗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심히 우려하는 눈치였다.
‘한 마디로 나와 같은 심정이라는 거지.’
그랑펠의 긍지만 하더라도 충분히 벅차건만.
세계수의 긍지까지 떠안게 되다니.
그러나 내겐 님프와 같은 망설임은 없었다.
“준비하거라. 님프.”
나는 주제 파악을 잘한다.
내가 또 발버둥 치기라면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긍지 때문에 가라앉지 않을 자신은 있다는 말.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해선 너의 축복이 필요하다.”
대단하신 세계수라고 해도 결국, 식물이었다.
식물이었기에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으로 그에 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던 것처럼.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님프의 축복의 효과 또한 유효하겠지.
“제가 세계수의 씨앗에 축복을……?”
역시나 님프는 사뭇 당황한 모양.
그러나 이내 담담한 음성으로 답했다.
“저 혼자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호열 님이 계시니 시도해 보겠습니다.”
그래.
축복이 효과가 있든 없든 발버둥 쳐봐야지.
물론, 그 이전에.
“소란을 잠재울 필요가 있겠구나.”
포식자의 늪지대.
그중에서도 가장 싸움이 치열한 중심부.
무지막지한 포식자들의 방해를 뚫고 세계수의 씨앗에 다가가는 것부터가 문제였지만.
‘여유가 없겠는데.’
나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비약초도 아니고 세계수의 씨앗에 축복을 내리는 일이었다.
‘그 반동이 님프는 물론, 계약자인 나한테도 찾아올 거야.’
당장 마력 탈진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겠지.
주제 파악 하나는 기가 막히기에.
마력 탈진에 대비해 검술, 흑마법, 살 구멍을 파놓은 나였지만…….
그 상대가 상대들이어야 말이지.
‘[천적관계]가 발동 중이라면 모를까.’
아니라면 한 마리를 상대하기도 벅찬 게 사실이다.
“……!”
그러나 몬스터들만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엔 플레이어가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아는 얼굴들이…….
아니, 그렇게 말하기엔 섭섭한 인연들이 보였다.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
그래, 슬슬 다시 내가 받을 차례가 됐지?
‘나, 정말 철판을. 그것도 몇 겹으로 깔았구나.’
그 아는 얼굴들, 인연들이 어디 보통 인물들이란 말인가?
기본적으로 전부 랭커이자 최상위권 길드 마스터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잘도 지껄인 것이다.
“협조가 필요하다.”
도움도 아니고 협조가 필요하다고!
그러나 이제 와서 겸손을 떨기에는.
‘하긴 나, 마탑 선임 마법사들도 마음대로 소집해 봤었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다…….
*
포식자의 늪지대 중심부에 도달.
가장 먼저 시야에 보인 건 거대한 바위.
그리고 그런 바위를 둘러싸고 전투를 벌이는 몬스터들까지.
“!”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건 따로 있었으니.
바로 늪지대 위에 꼿꼿하게 서 있는 호열이었다.
“호열 씨, 하다 하다가 이젠 물 위를 걸으시는 거야?”
정말 호멘, 호멘하더니……?
경악하는 남태민에게 가온의 길드원들이 말했다.
“태민이 형. 자세히 봐요. 연잎 위에 타고 계시잖아요.”
“아, 그러네? 그런데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잠깐만요. 저 옆에 저게 그 정령인가?!”
과연, 그 자태가 호열의 정령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척보면 척이라고.
들려온 이야기대로.
최소 상위, 최대 정령왕급 정령이 분명해 보였다.
“오히려 다행 아닌가?”
“……?”
“내가 볼 땐 언니랑 별 차이 안 나는데?”
뭐가 별 차이가 안 난다는 거야.
‘……뭐, 얼굴이?’
레오니가 고개를 들자 손가락으로 키를 가늠하고 있는 미친 것들이 보였다. ……됐다, 말할 기운도 없었다. 레오니는 대답 대신 발을 밟았다.
콰직!
“아아, 언니!! 장난이잖아. 장난.”
그때였다.
호열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협조가 필요하다.”
“……!!!”
고위 스킬, [텔레파시].
호열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들려온 것이다.
레오니는 순간 흠칫했다.
‘너, 너무 가깝잖아. 갑자기?!’
텔레파시라는 것을 알면서도.
호열과 이런 거리감은 낯설었다.
‘……레오니. 너, 이거 망상이야.’
그러나 레오니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협조가 필요하다고?’
어떤 협조를 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건 호열에게 진 빚을 갚을 기회였다!
그래,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의 감정을 떠나서.
‘……그렇다고 딱히 감정이 있다는 건 아닌데.’
그래, 그 뭐냐!
차 한잔 얻어먹는 걸 떠나서!
호열에게 진 빚은 길드 차원의 문제였으니까!
버서커 길드의 마스터로서도.
당연하게 호열의 협조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레오니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주쳤다.
“어, 너도?”
“……뭐냐? 그 안 어울리는 조합은.”
“글쎄요.”
남태민.
히사기 카즈마.
그리고 가온과 이나즈마 길드원 전원과.
‘가온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가온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호열에게 진 빚이 있었으니까.
또 남태민은 호열과 같은 국적, 친분이 있어 보였으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이나즈마랑 히사기 카즈마는 또 뭔데?’
가온과 이나즈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조합이었다.
당사자 중 하나인 레오니가 봐도 그랬는데.
지켜보는 제삼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스튜디오.
“이게 뭔가요……?”
떠오른 화면에 눈을 끔뻑거리는 출연진들.
그 얼굴을 잘못 봤나 싶어서.
진행자는 천천히 그들의 인상착의를 읊어본다.
“보기만 해도 든든한 체구. 우리 대한민국의 남태민 플레이어가 맞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최근 들어 가온과 접점이 많은 버서커의 레오니 카셀이 맞고요. 그리고…….”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확실하다.
“들고 있는 창. 그리고 날카로운 인상으로 봤을 때는……. 확실하게 이나즈마의 길드 마스터, 히사기 카즈마로 보입니다!”
이나즈마의 히사기 카즈마다.
그냥 이름을 말하는데 무슨 뜸을 그렇게 들이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가온과 이나즈마 사이에 지긋지긋한 악연부터 꺼내야겠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대격변 이후까지.
두 길드, 두 길드 마스터는 충돌하지 않은 날이 더 적을 정도로 서로만 보면 으르렁거렸으니까. 그러니까 떠오른 화면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불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가온, 이나즈마, 그리고 버서커.
세 길드가 한데 모여있었다.
이 순간도 전투가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에서.
신경전이 아니라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가, 가온과 이나즈마가 손을 잡았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보입니다. 거기에 버서커 길드까지요!”
“마땅한 이유 없이는 힘을 합칠 길드들이 아닙니다. 각자가 아쉬울 게 없는 대형 길드지 않습니까? 더욱이 가온과 이나즈마. 두 길드 사이의 갈등을 생각하면 이건 있을 수 없는……!!”
“아, 잠시만요. 말씀드리는 순간, 이호열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은발, 구두에 정장, 그리고 정령까지. 인상착의가 이호열 플레이어가 확실합니다!”
“이호열? 잠깐만요, 그렇다면 설마?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 길드가 손을 잡은 이유가……?”
그랬다.
이내, 설마가 사람 잡는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