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89화 (21/489)

◈ 89화. 늪에서 피어나는 (6)

[포식자의 늪지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생성된 균열을 앞에 두고.

그 어떤 이들보다 자신감이 넘친 건 유럽 최강의 길드.

보헤미안이었다.

“그동안은 그냥 운이 없었던 거라고.”

“그래! 마탑도 모자라서 뭔 놈의 균열까지 아시아 쪽에만 생성됐던 건지. 이제야 슬슬 밸런스가 맞아가는 모양이네.”

“정확히는 아시아 아니면 러시아였지? 모스크바나 홋카이도나 그 추위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샤워하는데 얼어 죽는 줄 알았잖아. 진짜.”

그들은 유럽 연합 EU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 지원 덕분인가.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성기사 랭킹 1위이자 길드 마스터인 가이버.

그가 오랜만에 미소를 흘렸을 정도였다.

“균열 공략이 끝났을 땐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중 하나가 바로 길드 랭킹이었다.

샤이닝, 천하통일의 뒤를 이어 만년 3위 자리를 고수해 오던 보헤미안 길드였다.

앞서 가는 이들과의 격차는 크다고 한들. 따라잡히지 않을 자신은 넘치던 가이버였다.

후발주자라고 해봤자.

일본의 이나즈마, 한국의 가온 정도였으니까.

그 작은 나라에서 플레이어들이 활약하면 얼마나 활약을 하겠으며.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EU를 등에 업은 자신들을 쫓아올 순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무언가 어긋났다.

만년 3위.

보헤미안이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4위, 이나즈마도 아닌 5위, 가온에게.

“콜로세움에서 행운은 없는 법이지.”

그래, 가온에겐 행운이 따랐을 뿐이다.

가이버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까 포식자 구역이 균열로 등장했을 때.

그 넘치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가온은 물론이고 천하통일까지……!”

보헤미안과 마찬가지로 EU의 지원을 받는 크고 작은 길드들. 홈그라운드인 유럽에 나타난 균열인 만큼. 가이버는 모든 패를 치밀하게 활용했다.

“마스터. 마력이 한계입니다!”

후방에 위치한 서포터 플레이어들.

가이버는 그들을 기계 부품 갈아 끼우듯.

플레이어들을 균열 밖으로 내보냈다.

“2팀. 곧바로 진입한다.”

사실상 수십 개 길드의 연합 전선.

거기서도 고레벨의 플레이어를 가려낸 덕분.

교체 투입된 플레이어들의 레벨도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후방에서 지원할 정도는 충분했던 것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오로지 몬스터 사냥에만 집중한 가이버와 보헤미안 길드원들이었다.

이런 가파른 경험치 상승폭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간만에 체면 좀 세우겠는데? 안 그래, 가이버?”

가이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균열에서만큼은 자만해도 좋았다.

샤이닝도 천하통일도.

자신들처럼 압도적인 사냥 속도를 보여주진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이대로만 간다면. 가온 따위가 다시는 랭킹을 넘보지 못하게…….

“……이호열이 균열에 진입했다고?”

잠깐, 누가 진입했다고?

이호열!

빠득─!

그 이름에 가이버의 미간에 핏줄이 돋아났다.

듣기만 해도 신경이 돋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녀석 때문에 가온이 3위 자리를.’

가온에게 따랐던 갖가지 행운.

그중에서도 가장 큰 행운이 바로 이호열이었으니까.

유스라 왕국에서도, 프로스트 쟁탈전에서도.

가온은 이호열과 연합한 덕을 톡톡하게 봤었다.

‘버서커 놈들도 마찬가지지.’

고작 10위권 대에서 오가는 길드 랭킹.

아직은 경쟁자로 여길 가치도 없었지만.

버서커 또한 EU의 지원을 받는 길드였다.

‘영국, 세컨드 썬은 더 이상은 유럽 연합 소속이 아니니까.’

EU내에서는 보헤미안의 뒤를 이어 이인자의 자리를 차지한 길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가이버는 이호열의 등장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뭐가 아쉽다고 이런 균열에 진입한 거지?’

아무리 포식자 구역이라고 해도.

이호열에겐 너무 쉬운 수준의 균열일 터.

분명, 다른 목적이 있는 거겠지.

‘……설마 그 다른 목적이?’

혹시 가온이나 버서커.

그게 아니라면 다른 길드와 관련된 일이라면?

송골송골.

순간, 가이버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반드시 내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는 것.

그에 걸맞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것.

가이버의 가슴 속에 조급함이 싹트기 시작했다.

“페이스를 끌어올리겠다. 1팀 재진입!”

“1팀은 아직 마력 회복이 덜 끝났을 텐데요?”

“상관없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다.”

그러던 중 메시지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정령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

이호열이다.

정령과의 계약이 목적이었구나.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잠깐.

‘……정령이 여기에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던 건가?’

역시 대단하군, 이호열.

그러나 이호열이 대단한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이버는 뒤따르는 메시지에 집중했다.

무려 경험치와 드롭율 상승 버프.

가이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템포를 끌어올린 판단이 옳았다.’

그 어떤 길드보다 빠른 진행 속도.

덕분에 가이버는 늪지대에 중앙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신의 선물이군.”

대박을 거머쥘 기회를!

균열 중심부에선 몬스터가 서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귓가에 분석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관으로는 누더기 거인. 그리고 흑철수리로 예상됩니다.

이어서 전해지는 업데이트 내역의 정보.

[누더기 거인 : Lv.600]

[흑철수리 : Lv.600]

무려 600레벨의 네임드급 몬스터.

그 두 마리의 몬스터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같은 레벨만큼이나 치열한 전투인가.

두 마리 모두 적잖은 피해를 입은 것 같았다.

가이버가 입맛을 다셨다.

“적의 적은 아군인 법이지.”

그래, 이건 두 마리의 네임드 몬스터를 사냥할 기회였다.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벅찼을 테지만. 녀석들은 서로에게 집중한 상황. 그 틈을 노린다면 일망타진이 가능하리라.

‘다만, 빼앗기기 전에.’

경험치, 드롭율 버프가 활성화된 지금.

다른 길드들도 자신들처럼 속도를 내겠지.

이런 기회를 눈앞에서 놓칠 순 없었다.

성기사 랭킹 1위.

클래스 퀘스트의 보상으로 획득한 스킬.

[성전사의 가호] 발동.

촤아아아악─!

가이버에게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이버가 소리쳤다.

“나를 중심으로 뭉쳐라. 돌격한다.”

인접한 아군에겐 공격력, 방어력 버프를.

적에겐 지속적인 피해를 주는 스킬.

클래스 퀘스트의 보상답게 그 효과는 말할 것 없이 걸출.

“오오! 이게 가이버 씨의 스킬!!”

“효과가 상당하잖아.”

“역시, 괜히 랭커가 아니야.”

그로 인한 사기진작 효과는 덤이었다.

슈슈슉─!

가이버의 지휘에 따라서.

쏟아지는 화살 비와 공격 스킬들.

가이버를 선두로 돌격하는 플레이어들.

“누더기 거인부터 처리한다!”

흑철수리가 물고 늘어지는 틈을 타서 뒤를 노린다.

펄럭─!

“?!”

그러나 그 계획은 흑철수리의 날갯짓에 물거품이 됐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흑철수리가 방향을 바꾸고는.

후방의 서포터 플레이어들을 노린 것이다.

가이버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게 대체?”

방금까지 서로 죽일 듯 싸우던 놈들이.

순식간에 힘을 합쳐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가이버가 다급하게 외쳤다.

“전원 후퇴! 후방을 보호한다!”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

돌격의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젠장,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가이버는 이를 악물었다.

‘조급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내 판단이 잘못된 건 아니다.

이런 패턴은 너무하지 않은가?

이건 함정이었다.

누구라도 걸릴 수밖에 없는 교묘한 함정 말이다……!!

*

……와, 살벌하게들 싸운다.

포식자 구역에선 플레이어가 없을 때도 몬스터들끼리 전투를 벌인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저것들 정말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고 있잖아?

고고한 시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님프가 입을 열었다.

“저는 어찌해야 할까요. 호열 님.”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약 정령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계약 조항을 떠나서라도 정령은 계약자의 성질에 영향을 받게 되니까. 한 마디로 님프의 빠릿한 상황 파악은 나의 영향이라는 말이다.

어디 보자.

늪지대를 부유하는 연잎 위에서.

나는 전황을 지켜봤다.

‘이제 곧 늪지대 중심부인가.’

님프의 말에 따르면.

중심부에선 더욱더 활발히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었지.

그 중심부에 전리품이 있는 탓이었다.

‘그 증거로 여기서부터 서로들 멱살을 잡기 시작했고.’

플레이어는 뒷전.

자기들끼리 사투에 한창인 몬스터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말이지.’

저 전투에 난입하고 싶었다.

두 녀석 다 기운이 빠졌으니까.

둘 다 사냥하고 경험치든 전리품이든.

날로 먹고 싶었단 소리였다.

‘날로 먹는 게 아니라 상식적인 판단이지.’

솔직히 누가 이런 기회를 외면할 수 있겠냐고.

그러나 전투에 미친 만큼.

다른 의미로 미친 내가 아니던가?

나는 님프에게 말했다.

“서로의 긍지를 건 전투다.”

그래, 긍지에 미친 나란 말이다……!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전리품을 쟁취하기 위해서.

포식자 구역으로 몰려든 몬스터들.

그 행동을 그랑펠의 긍지는 합당하다 여기는 거겠지.

게다가.

“그 사투에 난입하는 것은 긍지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 틈에 끼어들어서 뒤통수를 노린다?

역시나 긍지에 부합하는 이유가 없다면.

나는 절대 날로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님프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인다.

“과연, 그런 뜻이 계셨군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을 짓지 말아줘.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는 애원도 잠깐.

나는 미련을 버렸다.

‘솔직하게 사냥할 자신은 없다.’

사실 날로 먹기 위해 젓가락질 할 기운도 부족하지.

무엇보다 님프와의 계약으로 빠져나가는 마력량이 부담이 됐다.

계약을 맺은 만큼 님프도 전투에서 활약하겠지만, 그 도움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정령을 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확인한 정령, 님프의 능력은 단 하나.

사색 겨우살이의 성장을 촉진했던 축복뿐.

사실 그것만 해도 님프와의 계약은 엄청난 성과였다.

왜, 나는 거기서 『비약초의 육성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그 순간, 목격했거든.

[스킬], 『마법』과는 또 완벽히 다른.

정령의 {자연} 능력을……!

그건 정령학 관련 서적에도 명시되어 있던 바였다.

‘다른 마법사들은 몰라도 나한테는.’

그 말이 뜻하는 건 간단했다.

써먹을 수 있는 기이의 가짓수가 늘어난다는 것.

나는 기이의 가능성을 지난 균열에서 목격했단 말이지.

‘『마법』만으로는 뚫어낼 수 없던 균열 조각.’

그 마법도 어디 보통 마법이었냐고.

파괴력이라면 마탑에서도 한손에 꼽힐 뱅그릿의 순수마법이었다.

나는 그런 뱅그릿의 마법으로도 뚫지 못한 균열 조각을.

[심미]와 『마법』이 합쳐진 [『기이』]로 뚫어냈었단 말이다.

‘[{기이}]가 될 수도, {『기이』}가 될 수도 있다.’

쉽게 말하자면.

{자연} 또한 살 구멍, 파놓은 우물이 됐다는 뜻이겠지.

그것도 쉽게 마르지 않는 우물이!

“마치 태풍의 눈 같군요.”

잡생각은 거기까지.

님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유유자적이란 말이 어울리는 나의 모습.

중심부, 전리품에 가까워질수록.

몬스터들끼리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서로 싸우느라 나 같은 저레벨 플레이어한테는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거겠지.

나야 뭐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레벨만큼 전리품도 중요하니까.’

무엇보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포식자 구역.

포식자라 불리는.

네임드급 몬스터를 끌어당기는 전리품은 과연 무엇일까?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래, 상태이상에 걸린 것처럼.

서로를 싸우게 만드는 그 전리품 말이다.

‘악마의 아이템일 확률도 낮지 않다.’

그래.

악마가 관련됐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그랑펠의 긍지는 두고 볼 수 없다는 거겠지.

‘정말 나서서 피곤하게 산다.’

이내, 늪지대 중심부에 다다랐다.

시야에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뭔가를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린 것 같은 플레이어들을.

‘이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좀비 거인과 거인 못지않게 커다란 독수리.

두 마리의 몬스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내가 생각만 했던 걸 실천한 모양인데?’

그 결과, 개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저 꼴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저 플레이어들은 동료라도 있지.

나는 혼자였다.

‘경험치, 드롭율 버프를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별다른 저항도 못 해본 채.

그대로 황천행이었겠구나.

말 그대로 남 좋은 일만 하다 죽었을 뻔했다는 말이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려도 부족했건만.

나는 뻔뻔하게 지껄였다.

“긍지를 가벼이 여긴 죗값은 큰 법이지.”

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커다란 바위가 바로 이곳에 모인 이들이 갈망하는 전리품입니다. 정확히는 저 바위 안에 있을 무언가가 모두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겠지요.”

보는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여태껏 누구도 전리품을 차지할 수 없었는가?

전투가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이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저 바위를 부수고 전리품을 차지할 틈을 주지 않은 거겠지.

그러나.

“저건 바위가 아니다.”

그 전제부터 잘못됐다.

말했듯 저건 바위가 아니었으니까.

“씨앗이다.”

그래, 지식이.

정확히는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으로 습득한 지식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건 바위가 아닌 식물의 씨앗이라고.

“……씨앗?”

하위 정령이라고는 해도 숲의 정령이었다.

숲의 정령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의 씨앗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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