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늪에서 피어나는 (5)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플레이어들에게 정령은 환상 속의 존재였다.
“아니, 정령이란 게 진짜 있긴 한 거야?”
“누가 봤으면 벌써 넷튜브에 올라왔겠지.”
“뭐, 던져둔 떡밥 같은 거 아닐까? 언급만 해둬서 기대감을 끌어올린 다음에. 신규 업데이트 때 신규 클래스 정령사가 등장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왜, 정령을 목격한 플레이어도.
정령과 관련된 클래스를 가진 플레이어는 없어도 정령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했으니까. 서적과 NPC들이 떠드는 이야기들이 그 증거였다.
“근데, 그래서 그 업데이트는 언제 한대?”
“이번 주에도 이번에도 그런 내역은 없는데?”
“아니, 잠깐. 나 전직도 안 하고 몇 달째 기다리고 있는데?”
하지만 그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었다.
말했다시피 정령이란 존재는.
극소수만 목격할 수 있는 희귀한 존재였으니까.
자연스럽게 정령에 관한 관심은 서서히 식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이후엔 말할 것도 없었다.
균열이 나타나고, 현실에 몬스터가 돌아다니는데.
존재하는 지조차 알 수 없는 정령?
뜬구름 잡는 소리와 다름없었으니까.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균열에서 정체불명의 메시지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시청자 여러분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랬다.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 진입한 플레이어에게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누군가가 정령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누군가 정령과 계약을 맺었단다.
“아니, 전투하기도 박찼을 텐데. 계약이라뇨!”
“그것도 어디 보통 계약입니까? 정령과 계약이랍니다. 떡밥만 무성하던 그 정령 말입니다!”
“지켜만 보는 저희로서는 믿기 힘든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콜로세움이나 다름없는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정령과 계약했다는 누군가가 누구인가?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단 한 사람밖에 없지 않았던가?
늪지대.
끊이지 않는 진흙탕 싸움.
그 가운데서 마치 늪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홀로 고고했던 플레이어가 있었으니.
바로 그 이호열이 분명했다.
“거봐! 내가 분명 뭐가 있다고 했지?!”
이호열이 누구인가?
적정 레벨 900~1,000레벨 균열에서도 멀쩡하게 귀환한 플레이어. 그런 이호열이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단순하게 경험치를 위해 포식자의 균열을 찾진 않았을 터.
-사실 계단 떠올랐을 때 다들 짐작하지 않았음??
-ㄹㅇㅋㅋ 그러니까 다들 빡집중 빡기대했지ㅋㅋㅋㅋ
-근데 이건 그 기대 이상인디?
-정령은 상상도 못했다 진짜ㄷㄷㄷㄷ
쏟아지는 채팅, 그대로였다.
다른 플레이어도 아니고 이호열이었기에.
한껏 고조됐던 기대감.
그리고 그런 기대감에 당연하다는 듯.
이호열이 화답한 것이었다.
“이호열 플레이어는 실망하게 하는 법이 없군요!”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
직접 메시지를 확인한 플레이어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아니, 놀랐다면 오히려 더 놀랐겠지.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고?”
“아니, 진짜 뭔데! 검술로도 모자라서 이젠 정령이야?!”
“그만 징징거려봐. 무슨 메시지가 계속 떠오르는데?”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가 계약을 축복합니다.]
[포식자의 늪지대에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의 축복이 깃듭니다.]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획득하는 경험치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획득하는 전리품의 가치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정령왕의 축복.
축복의 효과는 무려 경험치와 전리품 드롭율 상승.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가장 희귀한 버프였다. 높은 레벨만큼이나 아르카나의 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조차.
“겨, 경험치랑 드롭율 상승 버프라고?!”
“나도 한두 번밖에 본 적이 없는 버프인데.”
“10퍼센트도 아니고 20퍼센트 상승이잖아……?”
“또 얼마나 대단한 일을 벌인 거야, 이호열!!”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록스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 짐작을 제대로 뛰어넘어주시는군.”
과연, 레벨 격차만큼.
자신과 이호열의 눈높이엔 격차가 있다는 거겠지.
당연하게도 보는 그림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와씨. 정령은 생각도 못 했는데. 역시!!”
남태민은 순수하게 감탄을 뱉었다.
그래도 다른 플레이어들보다는 호열에 대해 아는 게 많다고 자부했건만. 아무래도 호열의 그릇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정령과 계약? 갑자기?”
……차 한 잔 얻어 마시기 어렵네, 진짜로.
메시지 때문인가, 광전사의 광기 때문인가.
레오니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각자 호열과 얽힌 관계가 다르니까.
메시지에 대한 반응은 각자 다른 것이 당연한 일.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메시지 속 누군가는 이호열이 분명하다는 것.
그러니까 대다수의 관심은 허공에 떠오른 계단으로.
호열이 모습을 드러낼 계단으로 쏠리는 게 당연했다.
넷튜버들이 벌써부터 입맛을 다셨다.
“정령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가 확실하게 전달하겠습니다!”
사실 정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그저 최초라는 타이틀이 더 중요한 것.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또각─
“!!!”
호열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
『정령과의 계약』
수박 겉핥기라고 해도 그것은 그랑펠의 엄격한 기준.
정령학 관련 서적도 몇 권을 읽었던 나란 말이다.
정령에 관한 기초적인 상식이 있다는 거지. 당연하게도 정령과의 계약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실 내심 안도했다.
‘만약, 중급 정령을 만났다고 해봐.’
아르카나 대륙의 정보고, 계약이고, 뭐고.
모든 게 그림에 떡에 불과했겠지.
그건 계약 조항 때문이었다.
『정령은 계약자의 성질에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
성질이라는 것은 계약자의 전반.
그걸 쉽게 말하자면 나는 플레이어니까.
플레이어 기준으로 고려했을 때.
‘내 상태창에 영향을 받는다는 거겠지.’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그녀가 대식가인 이유도 정령과의 계약 때문이었다.
-“보시는 것처럼 제가 연비가 좋지 않거든요.”
상위 불의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
파이어 드래이크는 계약자인 페이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모양이었지.
한마디로 계급값을 한다는 소리였다.
그것조차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라서 식사량 수준에서 끝난 것이라고, 페이얀은 다람쥐처럼 부푼 얼굴로 말을 이었었다.
-“그래도 마력 탈진으로 고생하던 때에 비하면야.”
마탑의 선임 마법사가 어떤 존재들인가?
무엇보다 나는 뱅그릿 톰과의 전투에서 그의 마력량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건 따라잡을 수 있다는 엄두조차 들지 않는 압도적인 마력량.
같은 선임 마법사니까.
페이얀의 마력량도 뱅그릿과 큰 격차가 나지는 않을 터.
그래, 상위 정령이라는 건.
압도적인 마력의 소유자인 페이얀조차 마력 탈진을 호소하게 하는 존재란 말이었다……!
‘나한테는 하위 정령도 차고 넘친다.’
그러니까 주제 파악은 자연스럽게 끝났다.
게다가.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습니다.”
계약 성립.
님프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비루한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말이다!
그동안 레벨업으로 획득한 포인트를 마력에 올인하다시피 투자. [육망성 브로치]와 [명품-스왈린 공작의 애장품]으로 마력 재생력을 끌어올렸기에 망정이지…….
정령이 괜히 정령이 아니구나, 진짜.
정령학이 마탑에서도 괜히 선택받은 마법사들의 학문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 당혹스런 속내를 드러내는 일은 없다.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변화했군.”
계약자 성질.
그러니까 나의 영향으로 님프는 그 외관부터 변해있었다.
그 몸집은 여전히 요정처럼 작았거늘.
어째서인가, 그 작은 몸집에선.
이전과 다르게 기품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런가요? 이 또한 호열 님의 영향력 때문이겠지요.”
……그나저나 그 말투는 또 무엇이란 말이냐?
그랑펠의 엄격한 기준에도 어긋나지 않는 격식 차린 말투.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정령이 계약자의 성질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의 참뜻을.
나, 그랑펠의 영향을 받았으니까.
변화한 님프의 자태 또한 이해가 된다.
지금보다 훨씬 뭐가 없던 시절에도 하르콘에게 ‘경’ 소리를 듣던 내가 아니던가? 그것도 모자라서 상태창에 존재하는 [심미] 스탯의 영향까지.
‘이거 겉모습만 봐서는 하위 정령이 아니라.’
무슨 정령여왕 같잖아?
나는 그런 님프를 바라보며 침음을 삼켰다.
이런 게 바로 거울 치료, 반면교사로구나.
‘비루한 나랑 계약한 덕분에.’
그 외관만 그럴싸해진 님프의 모습.
좋지 않은 영향력을.
괜한 물을 들인 것 같아 책임감을 느낀다.
진심으로.
님프가 절제된 고갯짓으로 바뀐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우아하게 늘어진 나비 날개, 풍성하고 길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그랑펠의 심미안으로도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복장까지.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저는 제 변화가 마음에 듭니다. 호열 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래, 그래도 계약 당사자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래도 부담스러운 사극 말투는 어떻게 하고 싶었거늘.
속내는 드러낼 수 없기에 속내인 법.
“지적할 곳이 없군.”
님프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곧바로 사색 겨우살이에 손을 뻗었다.
내겐 여유가 없었으니까.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에도 마력이 빠져나간다…….’
유난을 떨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정도의 소모량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메시지를 확인했단 말이다.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의 축복 담긴 축하 메시지를.
‘경험치에 드롭율 상승 버프까지.’
축복은 [포식자의 늪지대]에 내려진 것이었으니까.
다른 플레이어들도 똑같은 효과를 누린다는 뜻.
조금만 머뭇거려도 몬스터가 남아나지 않겠지.
나약함을 탓하며 징징거릴 시간도 아깝단 말이다.
그래, 레벨이 부족하다면 올리면 되고.
레벨업만으로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마력이라면.
비약초를 씹어서 삼켜서라도 도달하면 되는 일이다.
내게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단 말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살랑살랑─
님프가 우아하게 사색 겨우살이를 향해 날아갔다.
“이 사색 겨우살이를 필요로 하시는 거라면.”
“?”
“제가 축복을 내려 드리겠습니다.”
……축복이라고?
갑자기 축복이 웬 말이란 말인가.
정령에 관한 지식은 수박 겉핥기 수준에 불과한 나였다.
그러나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사르르─
그저 한 차례.
님프가 사색 겨우살이를 어루만졌을 뿐이거늘.
고오오오─
사색 겨우살이의 빛이 더욱 선명해졌으니까.
“……!”
사색 겨우살이는 성장할수록 그 빛이 더욱더 짙어진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그를 통해 습득한 아르카나 대륙 모든 식물에 관한 지식.
‘이거, 혹시?’
그리고 나는 거기서 목격했다.
『비약초의 육성법』
엄청난 잠재적 가치를 가진 연구가 나아갈 방향성을!
*
또각─
위에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
기다리던 넷튜버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호열. 아니, 호열 님이 내려오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넷튜버들의 스트리밍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방송국들도 있었다.
그동안 환상 속 존재처럼 취급받던 정령이 아니던가?
정령의 실체가 밝혀지는 상황.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화제가 분명해 보였으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그런 정령과 계약한 게 누구인가?
바로 이호열이었다.
“실시간 시청률 15퍼센트 돌파……!”
그 기대감이 시청률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도 정령에 관한 지식은 아르카나의 서적이나 입에서 입을 통해 많이 알려진 편이었다.
덕분에 현실적으로 상황을 보는 이들도 있었다.
“능력을 떠나서 상위급 정령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들이 아니라고 하니까요.”
“이호열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높은 계급의 정령과 계약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계급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플레이어 최초로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런 의견은.
호열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사라졌다.
날갯짓하는 정령의 모습.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흘러나오는 기품.
“저, 저게 정령……?”
“후광 뭐야.”
“저건 예쁜 걸 넘어서 아름답잖아…….”
그 자태는 호열의 곁에서도 빛이 바래지 않을 정도.
그 모습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누군가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저 정령 누가 봐도 못해도 상위, 아니 정령왕급 아닙니까?!”
.
.
.
빤히─
곳곳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님프가 입을 열었다.
“과연, 호열 님께서는 이런 자리에 계시는군요.”
그러더니 우아하게 말을 이었다.
“저 또한 계약 정령으로서 이런 시선에 익숙해지겠습니다.”
너, 그랑펠에게 제대로 물들었구나.
그러나 그 말이 현명하다.
이놈의 성격이 달라질 일은 없을 테니까.
님프, 네가 적응하는 쪽이 편할 거란 뜻이지.
‘물론, 집중되는 시선 따위 내 알 바가 아니다.’
말했던 것처럼.
나는 한시가 바쁜 사람이란 말이다.
랭커인 그쪽들과 다르게 내 레벨은 형편이 없단 말이다.
경험치, 드롭율 버프 1분 1초가 아쉬운 입장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않았다.
이곳은 전투가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
곧바로 검을 꺼내 들었다.
[레벨: 324]
나는 아직 경험치가 고프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