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늪에서 피어나는 (3)
유스라 왕국.
자본과 노동력이 투자된 고대 왕국은 어느덧 그럴싸한 도시의 모습을 갖췄다. 과거 아르카나의 대도시에 버금갈 정도로 번화한 모습으로.
“이야. 하루하루가 다르네.”
황금 궁전 광장 앞 모퉁이.
황금 송아지 주점엔 플레이어들이 모여있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지금처럼 주점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었지.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옛날 생각나네. 안 그러냐?”
아르카나가 현실이 되고 자신들이 플레이어가 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리운 주점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잠시나마 그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도 들었거늘.
“와, 장난 아닌데, 저 몹들?”
주점 외벽에 걸린 대형 스크린.
재생되는 화면이 이것이 추억이 아닌 현실임을 각인시켜 줬다.
플레이어들은 물론, 이제는 NPC가 아닌 아르카나인들에게도.
아직 대낮이거늘.
만취하신 그림자 용병단 단장님께서 주정을 부렸다.
“에이씨. 저거. 저 덩어리 머리 좀 치우라고 해봐아아.”
술잔을 쥔 키치의 손이 움찔거렸다.
키치를 자극한 건 화면을 가로막고 있던 근육 덩어리.
“그냥 팍! 때리고. 슉! 피하고.”
락키드였다.
그 덩치 때문에 불편해 하는 이들이 하나둘이 아니었건만.
“답답하게 뭐하는 거야, 저 새끼들!!”
“……아씨. 귀청 떨어지겠네.”
“뭐라고? 크게 말하쇼. 안 들리니까!!”
따가운 눈초리만으로는.
현대문물에 매료된 락키드를 막을 순 없었다.
락키드가 맥주를 통째로 집어 들었다.
꿀꺽꿀꺽─
싸움이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이라니.
생각만 해도 흥분돼서 목이 타는군.
락키드가 연달아서 잔을 비우곤 말했다.
“단장! 우린 저런데 갈 계획 없나?”
“히끅. 가도 너는 안 데리고 갈 거야아. 짜식아.”
“뭐, 뭐라고?!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주 그냥 화면 다 가리고. 내가 괘씸해서라도……. 히끅!”
풀썩─
그 술주정을 끝으로 테이블에 뻗어버린 키치.
“잠깐, 단장!!”
락키드가 키치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뭐가 좀 보이네.”
“저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참…….”
“참자. 저 근육 덩어리 성격 잘 알잖아.”
플레이어들이 락키드의 진상에 혀를 내둘렀다.
그들의 추태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림자 용병단과 같은 아르카나인.
탐험가 연맹이었다.
“민폐도 저런 민폐를. 괜히 제 얼굴이 다 빨개지네요.”
“아니요. 사람 사는 게 다 이렇죠. 뭐.”
“그래도 포식자 구역이니까. 흥분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탐험가 연맹.
말 그대로 탐험가들이 모인 집단.
연맹의 가입 조건은 간단했다.
하나, 탐험가일 것.
당연하게도 탐험가 클래스 플레이어라면 탐험가 연맹에 가입하는 게 기본이었다.
탐험가 클래스가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위험 지역을 탐험해야만 했다.
그러나 전투 계열 클래스에 비교하면 형편없는 탐험가의 전투력.
그런 탐험가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정보력 덕분이었으니까.
“왜, 포식자 구역엔 진귀한 것들이 많거든요.”
탐험가들끼리는 서로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돕고 사는 것이 강호의 도리.
연맹 탐험가의 말에 박휘강의 눈이 반짝였다.
“몬스터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벌인다는, 그 전리품 말씀하시는 거죠?”
“뭐, 그건 흔히 알려진 정보고. 다른 전리품도 있죠.”
“다, 다른 전리품도 있나요? 저런 늪지대에?”
“물론이죠. 그런데 이거 계속 말을 해서 그런가? 목이 조금 타네~”
물론, 정보를 맨입으로 주고받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박휘강이 눈치껏 맥주를 주문하자 탐험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고, 괜찮은데. 그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꼴깍─
그리고는 은밀하게 말을 이었다.
“크. 비약초라고 들어보셨죠?”
비약초?
물론, 알고 있다.
포션의 재료가 되는 풀 같은 것들.
“그쵸. 흔히들 포션 재료라고 생각하는 약초들이요. 그런데 그건 정말 흔히 알려진 비약초들의 효과고요. 정말 진귀한 비약초들이 또 따로 있거든요? 근데, 참. 이건 탐험가들 사이에서도 아는 사람이 극소수인데…….”
말꼬리를 흐린다는 것.
맥주에 어울리는 안주가 없다는 뜻.
역시나 눈치 빠른 박휘강이 주문했다.
“여기 치킨도 되죠?”
어떠냐, 이것이 현대문물 치맥이다.
정보를 내놓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겠지?
과연, 닭다리 하나를 뜯고 나자 탐험가가 술술 말을 뱉었다.
“귀한 비약초는 신체 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 준대요.”
“……네? 그, 그런 게 가능해요?”
“가능하니까 귀한 대접을 받는 거죠. 그중에서도 최고는 마력을 영구적으로 증가시켜 주는 비약초들. 한때 아는 탐험가들 사이에서만 소문이 쫙─ 돌았었죠. 그거 하나만 발견해도 몇 달은 놀고먹어도 된다고.”
“!”
“포식자 구역처럼 특수한 지역에 그런 희귀한 비약초가 자라날 확률이 높다고 들었거든요. 우리 같은 탐험가들은 정말 목숨을 걸어야 획득할 수 있겠지만. 생명수당은 톡톡히 된다는 거죠.”
신체 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 준다?
그건 [스탯]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 준다는 뜻이었다.
박휘강이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스탯을 얼마나 상승시켜 주는지는 모르지만.’
단, 1이라고 해도 그 효과는 엄청났다.
1레벨의 가치와 맞먹는다는 소리였으니까.
물론, 레벨업을 제외하더라도.
스탯을 올리는 방법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 방법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었다.
‘클래스 퀘스트는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클래스 중 단 한 명.
그것도 조건을 갖춘 자만 시작할 수 있는 게 바로 클래스 퀘스트.
대다수의 플레이어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소리.
그러니까 비약초가 엄청난 가격에 거래된다는 것도 과장은 아니겠지.
‘고레벨로 갈수록 레벨 하나 올리기가 힘들어지니까.’
이내, 박휘강이 팬심을 담아 기도했다.
‘제발!’
호열 님이 어떻게 비약초 하나라도 습득하시기를……!
호열 덕분에 넷튜브 구독자도, 조회수도 떡상했던 박휘강이 아니던가? 마음 같아서는 이 귀한 정보를 호열에게 전하고 싶었건만…….
방법이 없었으니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친. 저 스킬은 또 뭐야?!”
그런 박휘강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환되는 앵글.
화면에 떠오른 호열의 모습.
거기엔 마법도 모자라서.
검까지 손에 쥔 호열이 있었으니까.
“뭐야, 저거?”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락키드였다.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락키드는 검을 쥔 호열의 자세를 알아봤다.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단장하고 그 노인네가 괜한 말을 한 게 아니었잖아!”
그들의 말대로 호열은 강자가 분명했다.
들끓는 락키드의 전투 본능.
도전하면 안 되는 상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피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호열의 활약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이어지는 호열의 마법, 서리.
그 발현에 주점에는 다시금 경악이 터져 나왔다.
“느, 늪지대가 얼어붙고 있잖아.”
“빙결 마법도 보통 빙결 마법이 아닌 것 같은데?!”
“야, 너 빙결계 특화잖아. 저 스킬 이름이 뭐야?”
“몰라. 저런 스킬은 나도 배우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잠자코 화면을 지켜보던 락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추운 건 프로스트에서 눈 맞았던 걸로 충분하지.”
진상, 락키드조차 분노를 조절하게 하는 호열.
그 광경에 박휘강은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호열에게 비약초가 필요하기나 할까?
그래, 필요한 건 기도가 아니라 믿음이었구나.
깨달음을 얻은 박휘강이 경건하게 읊조렸다.
“호멘.”
*
광활한 포식자의 늪지대.
각자 사냥에 집중하던 플레이어들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호열 씨도 오셨다고? 정말?”
-몰랐는데. 바로 균열 들어가셨다고 하더라고.
“아니, 형! 좋아하시는 차라도 좀 챙겨 드리지!”
반가워 하는 남태민, 남철민 형제부터.
“언니, 들었어?”
“…….”
“이호열 균열에 진입했대~”
우린 분명히 말했다?
싸우느라 몰랐다고 핑계 대면 안 돼?
전투에 완전히 몰입한 광전사, 레오니.
“상도덕이 없네, 정말!”
그리고 샤이닝 길드에까지.
평소답게 엄살을 부리는 드미트리였지만.
이번만큼은 저 엄살에 공감할 수 있었다.
팟!
카밀라가 활시위를 놓고는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욕심이 많네. 우리 호열 씨는.”
욕심쟁이, 이호열.
제시도 모자라서 이런 균열까지 클리어하러 오다니.
“……우리 호열 씨? 둘이 아는 사이도 아니잖아?”
“그 부분에서 되묻는 게 맞아?”
“뭐? 그건 또 무슨 뜻인데?”
“아니야~ 네가 왜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줄 알겠어~”
“아니, 왜 또 갑자기 지랄인데?!”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샤이닝의 길드 마스터, 록스는 그 다툼에 끼지 않았다.
계속되는 전투.
그와 별개로 굴러가는 머리.
언더독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자신에게 시간을 낭비할 여유는 없었으니까.
‘이호열이 균열에 진입했다.’
그가 경험치가 부족해서 이런 균열을 찾았을까?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적정 레벨 500레벨 균열에서 사냥을 해봤자 호열의 요구 경험치엔 기별도 가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그래, 호열에겐 분명 균열을 찾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록스의 추측은 맞아떨어진 듯싶었다.
“잠깐만.”
궁수 계열 클래스의 정점, 보우 마스터.
정점이란 칭호에 걸맞게 광활한 그녀의 시야.
카밀라의 시야에 호열이 포착됐다.
정확하게는.
“우리 호열 씨가 또 뭘 하고 계시는 걸까?”
허공을 수놓은 계단.
그 계단을 당당히 밟고서는.
어딘가로 향하는 호열의 모습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래야 이호열이지.
짐작하고 있던 록스를 포함.
모든 플레이어의 관심이 호열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
……슬슬 랭커들이 엄살을 부렸던 게 이해가 되는데.
1레벨이 오를 때마다 늘어나는 요구 경험치가 상당하다.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 : Lv.530]
[잔혹한 청소부 : Lv.550]
보다시피 레벨이 더 높은 몬스터를 사냥했거늘.
상승한 레벨은 10레벨이었다.
[레벨: 324]
내가 아르카나의 복잡한 경험치 시스템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겠지만.
200레벨 대에서 500레벨 대 몬스터를 잡는 것과 300레벨 대에서 500레벨 대 몬스터를 잡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뜻이겠지.
실제로도 차이가 있기는 했다.
‘여유가 생겼달까.’
검술과 마법의 동시 운용.
나는 처음과 다르게 잔뜩 긴장하지 않아도 적을 쓰러트릴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이 무시무시한 적응력 또한.
무지막지한 마법적 재능도 모자라서.
그에 뒤지지 않는 육체의 잠재력을 지닌 그랑펠 덕분이겠지.
[역병 서린 석궁] - [등급 : 매직]
[역병 서린 석궁 볼트] - [등급 : 매직]
[하찮은 보관용 허리띠] - [등급 : 레어]
[잔혹한 청소부]를 쓰러트리고 획득한 전리품 역시도 셋.
뭔가를 주렁주렁 들고 다니던 이유가 있었군.
세 개의 전리품 중 눈여겨 볼 만한 건 [하찮은 보관용 허리띠] 정도겠지. 인벤토리를 소폭 확장시켜주는 실용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탈락이다.”
그랑펠의 심미적 관점에서는 형편없었지만.
‘파는 건 의미가 없다.’
청렴결백한 성격을 떠나서.
내겐 균열 클리어 보상금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과거의 이호열이었다면 하루도 편히 잠이 들지 못할 정도의 거액이 통장에 쌓여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정산받을 보상금이 훨씬 많단 말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오늘 경험으로 확실하게 느꼈다.
우물은, 살 구멍은 많이 파놓을수록 좋다는 걸 말이야.
그런 내가 떠올린 건.
마탑에 존재하는 스무 개의 학파 중 마법부여학이었다.
정기 학회를 준비하면서 마법부여학에 관한 서적 또한 수십 권을 읽었었지. 학파의 핵심을 정리하자면 두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아이템에서 효과를 추출할 수 있다.
추출한 효과를 다른 아이템에 부여할 수 있다.』
듣기만 해서는 쉬워 보였거늘.
문제는 그 과정에 있었다.
아이템, 마도구는 천하의 마탑조차 정복하지 못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까.
효과를 추출, 그 효과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날려 먹는 아이템이 한두 개가 아니라고 들었거든.
‘항상 기가 죽어있었지. 아마.’
마법부여학 선임 마법사, 키코 아르민.
가뜩이나 작은 체구.
그것도 모자라 허리까지 잔뜩 굽히고 다니던 그녀였다.
만약, 마탑이 실적을 따지는 기업이었다면.
키코의 마법부여학은 언제나 적자를 기록하는 부서였겠지.
키코가 눈치를 보는 것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따위 사정 따윈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뻔뻔하게 선언했다.
“모든 성공엔 반드시 실패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 나는 마탑의 기둥을 뿌리 뽑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마탑의 자본, 아이템을 제물로 마법부여학을 진보시키겠노라.
그 재료가 될 게 바로 [하찮은 보관용 허리띠]라는 것이다.
‘인벤토리 여유도 많을수록 좋으니까.’
앞으로는 균열에서 챙길 게 많을 것 같았거든.
왜, 지금처럼 말이야.
스스스─
나는 전투가 끝나자마자 계단을 발현했다.
계단을 오르는 이유야 간단했다.
츄키라 나무 꼭대기에서 발광하던 비약초.
사색(四色) 겨우살이를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사색 겨우살이라니.’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그를 통해 습득한 방대한 지식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대박이라고.
사색 겨우살이는 신체 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그러니까 스탯을 영구히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사색.
네 가지 빛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그것도 무려 4포인트의 능력치를.
단순하게 따져도 무려 4레벨의 가치.
끔찍한 단련 클래스 퀘스트 몇 번의 가치냐, 이게?
게다가.
정기 학회의 사전 검증에서 비약초의 육성법.
그 연구의 가능성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 연구가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는다면…….
‘사색 겨우살이 같은 비약초를 양산할 수 있다.’
내가 괜히 요란을 떤 게 아니란 말이다.
다시금 깨닫게 된다.
역시 우물은, 살 구멍은 많이 파놓아야 한다는 걸……!
그 엄청난 효과에 걸맞게.
사색 겨우살이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자라났다.
사람이 됐든, 몬스터가 됐든.
보는 이라면 매료될 수밖에 없는 외관과 효과를 자랑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나무 꼭대기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마터면 나도 지나칠 뻔했었지.’
[잔혹한 청소부]가 나무를 갉아대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대의 희생에 감사하지.”
긍지높게 감사를 전하고.
[행운]에 포인트를 투자한 나를 칭찬하고.
가슴 벅찬 미래를 그리며 계단을 오르기도 잠깐.
나는 거목의 정상에 도달.
사색 겨우살이를 발견했다.
……그런데 무엇이냐.
사색 겨우살이보다도.
“……!”
희귀한 ‘존재’가 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