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늪에서 피어나는 (1)
[포식자의 늪지대]
[적정 레벨 : Lv.500]
[균열 붕괴도 : 0.9%]
균열의 좌표는 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북단.
대한민국과는 이역만리쯤 떨어진 곳이었지만.
마탑의 포탈이 있는 이상.
거리가 문제가 되진 않았다.
“으에취! 뭔 놈의 날씨가 이렇게 추워?”
“냉기 속성 저항이고, 뭐고. 바람이 뭐 이러냐.”
“으으, 차라리 늪지대에 빠지는 게 낫겠다. 정말!!”
그래, 문제가 되는 건 역시나 차디찬 칼바람.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 앞에는 벌써 플레이어들의 베이스캠프가 깔려있었다.
먼저 진입한 플레이어들의 정보에 따르면 균열의 스케일은 포식자 구역이란 명칭답게 광활했다.
“희소식이지, 뭐. 깔린 몹이 많다는 거니까.”
“희소식 맞냐? 적정 레벨 500레벨이라고. 이 균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몰라? 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플레이어들은 겁이란 게 없어요.”
당연히 클리어하는 데까진 꽤 시간이 소모될 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는 필수란 것이다.
물론, 베이스캠프가 도착하기도 전.
먼저 균열에 진입한 이들도 있었다.
추위를 견딜 수 없었거나.
의욕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단 소리겠지.
쑤욱─
걸음마다 발이 빠지는 늪지대의 환경.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이동속도가 소폭 하락합니다.]
그러나 투덜거릴 여유는 없다.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이곳은 강자들이 모여드는 포식자 구역.
보이는 몬스터 하나하나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뜻.
위이이이잉─
그 말은 곧, 저 곤충처럼 보이는 녀석도 보통이 아니란 소리였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사마귀, 스카이 블레이드. 녀석의 앞다리가 반짝거렸다.
스와아아악─!
분명 피해냈거늘.
거센 풍압에 몸이 밀려나는 느낌이 들 정도.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사냥할 맛이 나지.”
최강의 바바리안, 남태민.
덕분에 시작된 클래스 퀘스트를 성실하게 수행해 온 그였다.
처음엔 발동시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야성의 부름]도 이젠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다.
팟!
그런 남태민이 늪지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하락한 이동속도 탓.
점프력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거늘.
“형님들. 남태민 아주 그냥 날아다니는데요?!”
그런 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남태민은 폭발적인 속도로 사냥감을 추적했다.
야성에 휩싸인 동물과도 같은 움직임.
녀석이 남태민의 접근을 저지하긴 역부족이었다.
“이게 또 악마 군단장도 조져봤던 남태민이거든요!!”
강자가 모여드는 포식자 구역?
호열의 뒤를 쫓으며 그보다 더한 녀석들과도 싸웠던 남태민이 아니었던가?
악마 군단장, 호리칸도 그 강적 중 하나.
그러니까 전투는 길지 않았다.
푹─
날개가 뽑히고 앞다리고 뽑히고 그다음엔…….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 모습을 중계하던 사내가 카메라에 대고 외쳤다.
“제가 말씀드렸죠? 눈 호강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ㄹㅇㅋㅋ남태민 그냥 날개 달았네 진짜 ㄷㄷ
-클래스 퀘스트 뜨기 전에도 히사기랑 비볐었지??
-렙차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거였음ㅋㅋ 그때부터
-쟨 그냥 싸움을 잘함ㅋㅋ
전투에 몰입한 시청자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포식자 구역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네임드 몬스터급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단순한 사냥에서도 박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친. 남태민한테 바로 다음 몹이 달려들었는데요?”
심지어 그런 전투가 쉬지 않고 벌어진다니.
괜히 넷튜버들이 컨텐츠 냄새를 맡은 게 아니란 소리.
다른 쪽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와. 버서커가 괜히 미친 광전사라 불리는 게 아니네요…….”
계속되는 전투.
상처를 입을수록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광전사.
레오니에게 포식자 구역은 최적의 사냥터.
“확실히 샤이닝하고 천하통일 쪽은 효율적으로 움직이네요. 길드원들을 파티 단위로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몬스터들한테 습격 각을 안 내주는 것도 그렇고. 무서울 정도로 각이 잡혔네. 다들.”
길드 랭킹 1, 2위.
샤이닝과 천하통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몬스터를 사냥해나갔다.
게다가 균열이 나타난 위치가 위치인 만큼.
간만에 주목을 받고 있는 EU의 길드들까지.
그들의 전투.
아니,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투를 보고 있자니.
정말 콜로세움이 따로 없단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과연, 끝까지 서 있는 투사는 누가 될 것인가?
“누가 됐든 멀쩡하게 서 있긴 힘들 거라고 장담할게요.”
푸욱─
어찌 됐건 이곳은 늪지대였으니까.
그저 서 있는 것만 해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넷튜버로 살다 보면 느는 것은 입담뿐.
덕분에 뱉을 수 있던 말장난이라는 거지.
그러나 장난은 몰라도 장담은 남발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전투를 반복해서 녹초가 됐든.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대가 됐든.
멀쩡한 것을 넘어 고고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사내.
“……떠, 떴다!”
호열이 있었으니까.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 진입한 호열은 늪지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시선이 평소보다 더 서늘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숨을 지키고 지켜보던 넷튜버가 속삭였다.
“비장한 표정이 딱 포식자 구역을 접수하러 온 거 같죠?”
말을 내뱉는 순간.
쏟아지는 채팅.
“으앗. 말실수 죄송합니다.”
그 반응에 넷튜버가 얼른 반말을 주워 담았다.
정중하게 격식을 차렸다.
“정정하겠습니다! 접수하시러 행차하신 것 같으시죠?!”
*
항상(恒常).
나의 차림은 언제나와 같았다.
북극이 코앞이라는 균열의 위치?
이젠 추위 따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한테는 [온기] 버프가 있었으니까.
[온기가 담긴 보석함]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보관한 장신구에 일정 시간 ‘온기’를 부여합니다.]
[설명 : 귀족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보석함. 딸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마왕 데카라비아와의 전투.
장검, 그리고 스왈린 공작의 애장품과 마찬가지로 구마의식의 제물로 바쳤던 아이템. 그 효과는 장신구에 [온기] 버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온기가 신체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켜 줍니다.]
그 효과는 단순했거늘.
체감 상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두툼한 코트를 걸치지 않아도, 기능성 타이즈를 입지 않아도 정말 춥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칼바람을 맞아가며 청승을 떨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성장했구나.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균열에 진입했건만.
나는 곧장 멈춰 서고 말았다.
허리춤 언저리까지 오는 늪지대.
당연하게도 옷이 더러워진다.
그것은 심히 격식에 어긋나는 꼴이다.
모든 건 피곤한 성격 때문이라는 것이다.
늪지대보다 더러운 자취방에서도 잘만 살던 나였거늘.
그래도 이런 차림에 늪지대에 발을 들이는 건 좀 찝찝하긴 하네.
그 탓에 늪과 뜻하지 않은 눈싸움을 하던 도중이었다.
무언가 시야에 들어왔다.
“!”
늪지대를 떠다니는 연잎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연잎이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텐데. 이젠 아니었다. 내게는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이 있었으니까.
“유달리 커다란 잎.”
아르카나 대륙.
모든 광물, 식물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단 말이다.
“흑연꽃이군.”
덕분에 나는 연잎의 정확한 명칭과 특징까지 읊조릴 수 있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과정을 생략할 정도로. 저 연잎이 내겐 익숙한 탐색 대상이라는 거지.
‘사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마르셀로나 뱅그릿처럼 텔레포트를 난사하고 싶었다.
마탑의 수석, 선임 마법사처럼 되고 싶다는 게 너무나도 큰 바람이라고 한다면. 왜, 제시 하인네스처럼 공중부양이라도 하고 싶었다.
‘진짜 마법사처럼 말이지.’
그러나 고작 296레벨.
그보다도 비루한 마력량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있나.
[천적관계]가 발동됐을 때라면 몰라도 나는 마력을 아껴야만 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전투가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이었으니까.
‘이것이 나의 최선이라는 말이다.’
복잡하고 구질구질해도 어쩔 수 없다.
마력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는 현실.
탐색은 생략.
나는 곧바로 연잎에 간섭했다.
내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히 강도를 조정하는 수준의 간섭.
마력을 불로 바꾸고, 전기로 바꾸는 것보다야.
마력 소모가 적은 건 당연한 일.
사뿐.
나는 그 연꽃 위에 올라탔다.
마탑의 계단도 아무렇지 않게 오르내리는 나였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쁘지 않구나.”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진다.
그래, 나의 복잡한 속사정을 알 수 없는 플레이어들에겐.
“……저 스킬은 또 뭐, 뭐죠?!”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나 싶겠지.
그러나 남들의 시선 따위 고려하지 않는 이 몸이시다.
막말로 마탑의 원로 마법사들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거든.
‘아니, 그걸 넘어서 뻔뻔하게 심문까지 했지.’
그러니까.
“듣던 대로 성급하군.”
나한테 문제가 되는 건 몬스터밖에 없단 말이다.
과연, 싸움에 미친 몬스터들만 있다는 포식자 구역.
내 기척을 느끼자마자 달려드는 몬스터가 한 마리.
꿈틀꿈틀─
살기를 내뿜는 새빨간 동공.
늪지대 밑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몸집.
쉴 새 없이 날름거리는 혀까지.
업데이트 내역에서 봤던 이름이 하나 떠오르는군.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 : Lv.530]
시작부터 쉽지 않다. 정말……!
레벨이야,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적정 레벨 500레벨짜리 균열이 아니던가.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보다 높은 레벨을 자랑하는 녀석들만 해도 업데이트 내역에 수두룩했었지. 어쨌든, 맹수 포식자란 수식어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대체 뭘 집어삼킨 거야?’
뱀인가, 뱀 모양 항아리인가.
얼마나 많이 집어삼킨 거야, 이거.
가뜩이나 거대한 크기가 더욱 불어나 있는 모습.
그러나 아직도 배가 차지 않았다는 건가.
키아아아아아─!
녀석이 나를 향해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예상했던 대로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구나.”
그것이 위협에 대한 나의 감상.
“그중에서도 식사 예절부터 배우는 게 좋겠군.”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마력 가성비.
마력 소모를 최대한 줄이면서 전투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선 있는 것 없는 것을 전부 활용해야 했다.
그것도 적재적소에 말이지.
‘진짜 잘 생각했다. 과거의 나야.’
나와 녀석의 레벨 차이는 대충 230레벨.
심지어 녀석은 악마족 몬스터도 아니다.
1레벨, 1레벨의 격차가 큰 아르카나 시스템.
그 점을 고려한다면 녀석과의 1대1 전투는 자살행위나 다름없겠지. 더군다나 내 클래스는 무엇하나 특출난 게 없는 악마 사냥꾼이니까.
그러나 내 특기는 주제 파악.
그 사실을 알기에.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전부터 노력해 온 나란 말이다.
매일 같이 클래스 퀘스트를 반복하면서 [근력], [민첩] 스탯을 향상.
그것도 모자라서 마법 서적 닥치는 대로 읽던 지난날들. 내가 그 개고생을 괜히 해온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그 개고생에는 검술 훈련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냈다.
[무명 대장장이의 유작-장검]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80]
[효과 : 공격 시, 상대에게 높은 확률로 상태이상 ‘출혈’ 발동.]
[설명 : 대장장이의 마지막 작품이다. 원한에 가까운 미련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진가를 되찾았다.]
그랑펠의 재능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건가.
손에 감기는 손잡이의 느낌이 더없이 익숙했다.
한동안 검을 잡지 않았어도 그 감각이 선명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맹수 포식자여.”
나는 몸을 낮추고 말을 이었다.
“사자를 집어삼킬 자신은 있는가?”
라이언 하트.
사자 심장의 기사들이 목표로 하는 무결점의 자세.
당연하게도 내게 습득까지 이르는 중간 과정 따윈 없었다.
나는 그저 하르콘의 자세를 보고 따라 했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단순하게 검을 겨눈 것 같은 이 자세가.
어째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이유 따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이이이잇─?
뭐, 효과만 있으면 된 거 아니겠어?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다가오던 녀석이 멈칫거렸다.
그러고는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키야오오오─!
수많은 맹수, 그리고 자신과 같은 포식자들과 싸워서 살아남은 녀석이었다.
사선(死線)을 넘어온 경험으로. 내 자세에서 하르콘의 기척을 느낀 건지도 모르겠지.
그나저나.
‘……이건 꽤 중요한 정보인데?’
그저 검을 쥐고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다라.
……실용성이 장난이 아니잖아. 이거?
한마디로 허세라는 것이다.
무결점의 자세가 어째서 무결점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했거늘.
그 효과만큼은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나였으니까.
왜, 지금처럼 말이다.
탐색, 간섭, 발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에게 쏟아지는 마법.
검을 겨눈 나를 여전히 견제하고 있는 탓인가.
녀석은 속수무책으로 데미지를 입고 있었다.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에게 ‘화상’이 발생합니다.]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에게 ‘출혈’이 발생합니다.]…….
나는 그 모습을 항상의 자세로 바라봤다.
“식사 중엔 불필요한 대화를 삼가는 게 격식이다.”
혹시라도 자세가 흐트러졌다가 역습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
.
늪지대를 부유하는 연잎.
그런 연잎 위에 올라선 호열.
그 모습엔 조금의 위태로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연잎 위에 피어오른 연꽃처럼 위화감이 없었다.
“……저 스킬은 또 뭐, 뭐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이었거늘.
“거, 검인데요 저거? 어라? 지팡이도 아니고 검은 뭐죠?!!”
그런 연꽃에 생각지도 못한 칼날이 피어났으니.
경악이 튀어나올 수밖에.
더 나아가서.
-ㅁㅊ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그냥 검만 들었는데 몹이 멈춰버렸다고???
-그저 호멘
그 칼날이 보통 예리한 게 아니란 것까지 알게 된 순간.
-잠깐, 나 저 자세!! 저거 하르콘 분석 영상에서 봤었음!!!
-ㄹㅇ??? 무슨 뜻이냐 그 말???
-설마 이호열 하르콘 수준으로 검술까지 쓸 수 있다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건 당연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