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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80화 (12/489)

◈ 80화. 수석의 품격 (4)

마르셀로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저와 뱅그릿 선임이 보조하겠습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관한 대화.

덕분에 마르셀로는 내가 악마 사냥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악마가 튀어나왔으니까.

여기선 내 전공을 인정해 준다는 거겠지.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마르셀로나 뱅그릿이 전력으로 나서기라도 해봐라.

‘아까 그 흙먼지처럼 콩고물도 증발해 버릴걸?’

콰지지직─!

공간을 찢어발기고 나타난 악마의 손아귀.

크다는 것만 빼면 여전히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허나, 그 강함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마왕보다 강하겠지.’

이건 함정이었다.

그것도 마탑의 선임 마법사, 뱅그릿을 위한 함정.

뱅그릿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의 마력이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원로 마법사께서 어째서……?”

뱅그릿은 생각하고 있겠지.

만약, 자신이 혼자였다면.

지금쯤 자신은 어떻게 됐을까.

그에 관한 대답은 전문가인 내가 대신해 줄 수 있었다.

‘죽거나 빙의 당해서 육체를 빼앗겼겠지.’

원로 마법사의 말에 뱅그릿의 판단력이 흐려졌던 이유.

틀림없다.

그건 상태이상이었다.

상태이상에 걸린 상태에서 저런 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까.

제아무리 뱅그릿이라고 해도 그건 쉽지 않은 일.

그러나 보다시피 뱅그릿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겠다. 열등한 악마여.”

설령 물에 빠지더라도 주둥이는 떠오를 것 같은 나.

“뱅그릿, 지금은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가 있었으니까.

나 또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뻔뻔하게 말했다.

“뱅그릿 톰.”

“듣고 있습니다.”

“이번 전투로 사유 제출을 대신하도록 하지.”

“사, 사유 제출이라면……?”

“정기 학회는 그대의 발표만을 앞두고 중단된 상황. 학회를 재개할 정도의 가치가 그대가 연구한 순수마력학에 있는지를. 이번 정기 학회의 주관자인 내 앞에서 증명하도록.”

“……!”

그래, 피할 수 없는 긍지라면.

이렇게 써먹기라도 해야 한다……!

내가 노리는 건 간단했다.

‘방금처럼 뱅그릿의 마력에 간섭한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지금.

내 마력량에 딱히 부족함은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상대적인 것이다.

내 곁엔 그야말로 괴물 같은 마력의 소유자들이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나는 이 괴물들이 마법을 주고받는 것을 지켜봤다.

‘심지어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었어.’

두 사람의 마법엔 살의가 담겨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저 녀석의 경험치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넋 놓고 있으면 내게 떨어질 건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구질구질할 수밖에 없단 소리였다.

물론 그런 속내가 겉으로 비칠 리는 만무하다.

“처음 학회를 주관하시는 경께서 저보다 나으시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학회 이야기를 꺼내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걸 떠나서.

얼마나 뒤끝 있어 보이겠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한 미친놈이 되는 것까지도 각오했던바.

그런데.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뱅그릿의 반응이 의외였다.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나에겐 희소식이었다.

그렇게 말한 뱅그릿이 어느새 마법을 발현하고 있었으니까.

고오오오오─!

그래, 이번엔 살의(殺意)가 담긴 마법을.

콰드드드득─!

오직 파괴력만으로 마법을 줄 세우자면.

순수마력학의 마법은 한 손가락에 꼽히는 마법.

방대한 마력에 파괴력을 극대화한 간섭이 더해지는 순간.

가공할만한 압력의 마력 광선이 손아귀를 향해 뻗어 갔다.

그때였다.

콰직─!

손아귀가 큼지막하게 조각을 뜯어냈다.

그 조각을 마치 방패처럼 치켜들었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위력을 떠나서.’

엄밀히 따지자면 저건 균열의 조각.

즉 [『기이』]의 조각.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이 합쳐진 방패였다.

어찌보면 가장 순수한 [마법]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마력학의 마법은 저 기이의 방패를 뚫어낼 수 없을 터.

과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쿠구우웅─

균열의 조각과 마력 광선이 부딪혔다.

마력 광선이 흩어지고 사방으로 마력이 흩날렸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냐?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갔는가. 하찮은 악마여.”

애초에 나는 이 상황을 노리고 있었다.

“방패 뒤에 숨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확히는 뱅그릿의 마법 발현 직후.

흩날리는 방대한 마력을!

그런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실로 어리석군.”

곧장 넘실거리는 방대한 마력을 탐색.

더없이 익숙한 과정으로 간섭.

발현.

그러자 떠오른 것은 수백. 아니, 수천 개의 라이트.

뱅그릿이 말을 더듬었다.

“……그 찰나의 시간에?”

기초 마법을 사골처럼 우려먹어서 놀란 건지.

그 경악의 이유를 나로서는 알 수 없다만.

중요한 것은 뱅그릿의 반응 따위가 아니다.

두둥실─

순수마력학의 기초 마법.

순수한 마력 구체, 라이트.

그 마력의 구체는 어떠한 종류의 마법으로도 발현될 수 있다.

물론, 그 간섭 과정에 따라 소모되는 마력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순수마력학이 오직 파괴력만을 극대화하는, 비교적 단순한 간섭에 집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니까.

그러나.

‘나는 아니다.’

그래, 내겐 『마법』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우물만 파지 않았기에.

써먹을 수 있는 [스탯]이 있었다.

[심미 : 下]

[모든 것에 심미적 감각을 추가한다.]

단축키, 매크로 혹은 복붙 신공.

쓰지 않을 때보다야 번거롭지만.

고작 버튼 하나 누르는 것만으로.

그 출력은 몇 배, 수십 배에 육박하는 [심미]가 말이다.

『마법』과 [스탯].

이 또한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의 융합.

즉 이 또한 [『기이』].

하지만 그 효율이 뛰어나다고 한들.

간섭 대상은 무려 수천 개의 마력 구체, 라이트였다.

실화냐.

마력이 빠져나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이 정도면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밑 빠진 독처럼 줄줄 새는 거잖아, 이거?!

“방패 뒤에서 머리를 굴려봤자 소용없다.”

물론, 내색은 할 수 없다.

목부터 척추까지.

빳빳하게 세운 자세.

나는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냥법을 결정하는 것 또한 나의 권한이니까.”

사냥법이라는 것은 마법의 종류.

그랬다.

나는 심미 스탯의 효과를 발동.

수천 개의 라이트에서 각각 다른 마법을 발현한 것이었다.

무엇이 녀석에게 효과적인 마법인가?

고민할 시간에 그냥 있는 마법, 없는 마법 전부 때려 박는 게 효율적일 테니까. 정말이지, 나다운, 무식하기 그지없는 발현이라는 것.

그래도 심미적 감각이 추가돼서 그런가.

“과연……!”

펼쳐진 건 마르셀로조차 감탄할 정도의 장관이었다.

화염, 물, 얼음, 뇌전, 바람…….

갖가지 속성.

온갖 분야의 마법들이 뒤섞인 광경.

그중에는 날카로운 무기의 형태를 띤 것도.

그런 무기를 집어든 병사의 형태를 띤 것도.

그런 병사를 태운 말의 형태를 띤 마법도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한 감상평을 내렸다.

“아직 미숙하군.”

그렇게 말한 이유야 간단했다.

[심미 : 下]

심미 스탯은 아직 ‘하’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지금도 화려한 게 한 폭의 그림 같은데.

나중에 中이나 上으로 향상된다면.

대체 어떤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는 걸까.

“저, 저런 게 미숙하다니요! 대체 어느 부분이!!”

그 진실을 알 턱이 없는 뱅그릿이 절규하다시피 말했다.

심미 스탯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뭐, 엄청 대단한 마법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일단, 화려하니까 먹고 들어가는 게 있다는 거지.

돌격─

이내, 그 수천 개의 마법이 쇄도했다.

역시나 빛을 발한 건 심미적 감각.

정말 살아 움직이는 군단처럼.

손아귀가 들어 올린 균열 조각을 끼고 돌아가며 선회.

녀석에게 데미지를 입히기 시작했다.

[구마의식]은 아까부터 발동된 상황.

녀석에게 심미가 가미된 마법은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잘은 몰라도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뱅그릿이 보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화려하게 날뛰는 것처럼 보이겠지.

이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에게 ‘절단’이 발생합니다.]

*

칠죄종, 질투는 소리쳤다.

“빌어어어어어먹으으을!!”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내 팔이!!!”

잘린 팔이 다시 자라나지 않았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 팔을 앗아간 녀석이 악마 사냥꾼이란 소리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아아아아!!”

칠죄종, 탐욕.

마왕 데카라비아.

그들의 존재가 지옥에 처박힌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 저 녀석에게 당한 것이었다.

조금 전 자신의 팔을 앗아간 그 건방진 녀석에게!!

녀석이 악마 사냥꾼이라는 것.

그건 마주하는 순간 알아차렸다.

녀석은 다짜고짜 자신을 의식으로 초대했으니까.

감히 칠죄종이자 거악이라 불리는 이 몸을……?

애초에 노렸던 것은 마법사 놈의 육신이었지만.

악마 사냥꾼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재밌을 것 같았거든.

성전(聖戰).

그곳에서 악마 사냥꾼 놈들의 표정은 참 볼만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거악인 자신을, 의식 속에 불러들인 순간부터.

녀석의 정신력은 온전할 수가 없었을 텐데.

“열등한 악마여.”

어째서인가.

녀석은 멀쩡했다.

힘겹게 저항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었다, 그런 내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갔는가. 하찮은 악마여.”

“방패 뒤에 숨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실로 어리석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녀석의 정신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칠죄종이자 거악인 이 몸을 오히려 사냥하려 들고 있었다!

……위험하다.

아니, 내가, 이 몸께서 위험하다고?

그래, 이건 천적에 대한 공포.

거악으로서 잊고 있었던 감각을 일깨울 정도였다.

칠죄종 질투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래, 이건 예기치 못한 사고이니라.

이따위 감각?

악마 사냥꾼?

이 몸께선 칠죄종, 거악이시란 말이다.

녀석 곁에 마법사 놈들만 없었어도 저 녀석쯤은……!

그렇게 이를 악물던 순간이었다.

“사냥법을 결정하는 것 또한 나의 권한이다.”

들려오는 서늘한 음성.

그와 동시에 틈 너머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공중에 떠오른 그것은 하나의 군세(軍勢)였다.

“!”

어디서 튀어나온 거란 말이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군단이었다.

수천, 아니 수만은 될 것 같았다.

이내, 군단이 자신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스오오오오─

공포에 질린 나머지 감각이 고장 난 것인가.

뜨거운 열기.

차가운 한기.

저릿거리는 전기.

갖가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장 난 감각이 끊임없이 경고했다.

피해야 한다.

그러나 그 돌진은 더없이 신속해 피할 수 없었다.

마치 마법사 놈들의 마법처럼.

“으아아아아아아악!!”

군단인지, 마법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과 격돌.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자신은 팔 하나를 잃은 채 도망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째서냐?”

인간 주제에 대체 무엇이냔 말이냐?

“인간 주제에에!!”

어떻게.

그런 정신력을.

그런 동료를.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이냐?

질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니, 그뿐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최근 뒤바뀌기 시작한 아르카나 대륙의 판세.

원흉이 됐던 건 악마 사냥꾼들의 결전병기였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드워프 놈들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악크샨 기지는 궤멸.

악마 사냥꾼은 전멸한 지금.

그 결전병기를 작동시킬 수 있는 건.

제작자인 난쟁이 놈들밖에 없을 테니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 결전병기를 작동시켰다는 것?

드워프들이 은신처에서 대륙으로 튀어나왔단 소리였으니까.

흔적만 쫓으면 놈들의 은신처를 찾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드워프들의 흔적은 포착되지 않았었지.

그런 상황에서 녀석과.

악마 사냥꾼과 마주친 것이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것도 저 녀석의 짓이었다고?!”

질투가 들끓었다.

“감히 인간 주제에에에에!!”

녀석은 차원을 드나들었단 소리였다.

결전병기를 작동시킬 정도로 자유자재로.

자신조차.

아니, 그 어떤 거악이라고 해도.

그 정도로 다른 차원에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그 사실을 깨닫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질투에 사로잡혀 잠깐 잊고 있던 감각.

다시금 공포가 깨어났다.

“혹시 녀석은 나보다도 높은 경지에 있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지만.

인정한다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시종일관 자신을 내리깔아보는 듯한 녀석의 시선도.

감각이 따라가기조차 벅찼던 녀석과의 전투도.

차원을 뛰어넘은 녀석의 행적도.

마지막으로.

도망치는 자신을 향했던 경고도.

“오른팔을 잃은 악마여. 내가 그 사실을 기억했다.”

녀석은 악마 사냥꾼.

녀석에게 빼앗긴 오른쪽 팔은 절대 재생시킬 수 없다.

다시 마주친다면.

녀석은 외팔이인 자신을 반드시 알아보겠지.

그다음엔……?

“내가, 이 몸이 지옥에 처박히는 건가?”

나도 탐욕처럼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쉽게 공포가 가시지 않았다.

주제 파악이란 걸 하게 됐다.

“……나는 이 상처로 족하다.”

그래, 아르카나 대륙에 만족하자.

다시는 다른 차원을 드나들 생각조차 하지 말자.

적어도 저 악마 사냥꾼 녀석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동안에는……!!

*

[깨진 차원의 틈]

[적정 레벨 : Lv.900]

[균열 붕괴도 : 51.2%]

급격히 치솟는 균열 붕괴도.

그러던 중 적정 레벨에도 변화가 생겼다.

[적정 레벨 : Lv.900~Lv.1000]

적정 레벨, 무려 일천(一千).

플레이어들이 제각기 소리쳤다.

“이거 뭐라고 드립도 못 치겠습니다. 형님들!!”

“뭐가 어떻게 돼가는 거야? 대체 안에선 무슨 일이……!”

“……이호열, 괜찮은 거 맞겠죠?”

호열과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두 사람이 균열에 입장한 지도 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균열 붕괴도가 치솟는 걸로도 모자라.

균열의 적정 레벨까지 치솟은 상황이었다.

우려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균열 속에서 일렁이는 형체.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

또각─

호열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생채기는 물론, 먼지 한 톨 뒤집어쓰지 않은 모습으로.

그런 호열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

그러나 언제나처럼.

호열은 냉랭하게 선언했다.

“질문은 받지 않겠다.”

그 사유는 더없이 간결했다.

“내부 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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