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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78화 (10/489)

◈ 78화. 수석의 품격 (2)

……다시 생각해 보자.

내가 지껄인 대사 중에 뭔가가 있었나?

“그대의 고충을 이해하네.”

그건 그냥 인사치레였다.

그래, 마탑 수뇌부가 이번 일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니.

게다가 그런 엄청난 일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니.

하루하루가 고뇌요, 스트레스의 연속이었겠지.

마르셀로가 야위어가는 이유가 괜히 있던 게 아니었다.

“비로소 수석의 무게를 실감하는군.”

역시 수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그다음 대사도 그런 뜻에서 뱉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간만에 외출이군요.”

마르셀로가 나를 따라나선 것이었다.

절대 움직이지 않는 마탑의 마법사들.

그중에서도 수석 마법사인 마르셀로가.

나와 동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화냐.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 때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들과 달리 마탑의 마법사들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에도 별다른 활동이 없던 존재들이었으니까.

제국의 황제조차 마탑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했단 말이다.

‘……플레이어 최초가 아니라 역사상 최초 아닐까, 이거?’

그런 생각에 속마음이 들뜨기도 잠깐.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그래, 마르셀로가 움직인 데엔 이유가 있을 거야.’

다르게 말하자면.

[퀘스트 : 마탑의 진실]

마법사의 탑엔 모순이 존재한다.

모순을 밝혀내고.

마탑과 진리를 바로 세워라.

─마탑의 수뇌부와 얽힌 뱅그릿 톰을 확보하라. (진행 중)

이 퀘스트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소리겠지.

딱 봐도 그래 보였다.

퀘스트 목표가 뱅그릿 톰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니까.

뱅그릿 톰이 누구인가?

무려 마탑의 선임 마법사였다.

만약, 뱅그릿이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온다고 생각해 보자.

‘나 혼자서는 절대 무리다.’

마법에 관한 재능, 지식을 떠나서.

내 레벨은 고작 296레벨.

덕분에 절대적인 마력량이 형편없었으니까.

[천적관계]가 발동될 일도 없겠고.

나는 마력의 체급 차이로 뱅그릿에게 압살을 당하겠지.

그렇게 주제를 파악하자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과거.

예절을 들먹이며 뱅그릿을 문전박대했던 나의 모습……!

괘씸죄가 추가돼도 억울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건.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었다.

마르셀로, 내겐 그보다 든든한 지원군도 없었으니까.

“아직 청중들이 남아있었군.”

로비까지 내려오자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뭔가 속닥거리는 게 놀란 눈치가 확실하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나도 경악을 했었으니까.

물론, 지금처럼 내색은 못 했지만.

“괜찮은가?”

남의 시선, 평가 따위야 하찮게 여기시는 나는 상관없었지만.

마르셀로는 아닐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나 본데?

“이곳까지 내려온 순간, 예상했던 일입니다.”

그렇겠지.

지금 마르셀로는 마탑의 수뇌부.

그들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리가.

‘뭐, 나도 다를 바 없고.’

이런 복잡한 사정이 있는 줄 몰랐거늘.

마탑의 수뇌부와 마르셀로.

나는 그 사이에서 마르셀로의 라인을 타버린 것이었다.

……빌어먹게 어렵다. 사회, 아니 마탑 생활!

게다가.

정기 학회 주관자로서의 긍지가 걸린 문제가 아니던가?

설령 마르셀로가 나서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놈의 긍지께서는.

기어코 뱅그릿을 강단에 세워야만 직성이 풀렸을 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마르셀로가 말을 덧붙였다.

“또한 경에게 언제까지 빚을 지고 있을 순 없습니다.”

빚?

나한테 빚을 졌다고?

뭐, 나 몰래 부유 정원에 외상이라도 달아놨나 싶었건만.

애초에 공짜잖아. 선임 마법사 이상은.

게다가 내가 마탑에서 앞으로 뜯어먹을 게 얼마인데…….

나도 모르는 빚 정도야 상관없었다.

그래야 나도 청렴결백 따지지 않고 필요한 걸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개의치 말게나.”

“……?”

“모든 일엔 순리가 있는 법이니.”

그 순리는 당연하게도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다는 것.

마탑의 기둥을 뽑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란 거지.

내 말뜻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가.

마르셀로가 흠칫하더니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포탈에 도달.

잡담은 자연스럽게 끝났다.

이제부터는 뱅그릿의 확보.

그 하나의 목표만 생각해야겠지.

‘그래서 어디로 튄 거냐, 뱅그릿 톰?’

그에 대한 답은 마르셀로가 내놓았다.

순간, 마르셀로의 몸에서 일렁이는 마력.

……소름이 끼칠 정도로 광범위한 규모의 발현!

방대한 마력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마법도 아니었건만.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실감했다.

다행이다. 마르셀로가 내 편이라서.

그래도 내가 인복 하나는 괜찮다.

새삼스럽게 깨닫기도 잠깐.

마르셀로가 마력을 거둬들였다.

“이 세계에 뱅그릿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격하는 순간.

마법의 구조를 파악하는 그랑펠의 재능.

덕분에 조금 전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도 파악한 나였다.

그래, 마르셀로는 그 찰나의 시간.

이 세계, 지구에서 뱅그릿의 위치를 추적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뱅그릿의 마력을 탐색.

전세계라는 광범위한 지역에 간섭.

추적 마법을 발현한 것이다.

……진짜 상상초월이다.

괴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전 세계에 간섭이라니.

대체 마력량이 얼마나 된다는 거야.

물론, 나는 놀란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답이 나왔어? 뭔 소리야. 또.”

“우리 헛수고한 것 같은데? 저건 무슨 암호도 아니고!”

“이 세계 없다면 어디 있다는 거야?”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나는 그 뜻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뱅그릿이 이 세계도, 아르카나 대륙도 아닌.

[『기이』]의 공간.

균열 속에 있다는 사실을.

*

마르셀로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개의치 말게나. 모든 일엔 순리가 있는 법이니.”

그건 호열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마르셀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개의치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마탑은 악마 사냥꾼에게, 악크샨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단 말이다.

그러나 호열은 그 빚을 갚으라고 하기는커녕 순리라고 말했다.

‘……저는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호열은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기에.

그런 과거를 순리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일까.

마르셀로는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욕심이 생겼다.

‘저도 그 미래를 목격하고 싶습니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서둘러야만 했다.

그것이 마르셀로가 호열과 동행한 이유였다.

‘이번 수는 명백히 악수였습니다.’

그것은 원로 마법사들을 향한 읊조림.

그 목적은 알 수 없다만.

원로 마법사들은 뱅그릿 톰을 마탑 밖으로 떠밀었다.

뱅그릿의 의지일 순 없었다.

마탑의 마법사는 수뇌부의 승인 없이는 마탑을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내가 아는 뱅그릿은 그런 사내가 아니다.’

그래, 그것은 동료에 대한 확신이었다.

능력에 비해 자존감이 지극히 떨어지는 그 사내가 마탑의 규율을 어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장담할 수 있었다.

‘이 악수가 되려 그대들의 목을 죄어갈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뱅그릿의 신병 확보가 우선이었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뱅그릿의 증언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마르셀로는 원로 마법사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결코 살려두지 않겠지.’

마르셀로는 지체하지 않았다.

추적 마법을 발현.

뱅그릿의 위치를 특정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계획적이다.’

서울, 아니 지구라는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뱅그릿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순수마력학의 선임 마법사.

섬세하게 마력을 다루기로 유명한 뱅그릿이 아니던가?

그는 단서가 될만한 마력흔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뱅그릿은 균열 속에 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군.”

역시나 호열에게 설명 따윈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균열 속에 있다면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균열.

그곳은 마르셀로조차 이제야 첫발을 내디딘 [『기이』]의 공간이었으니까.

그런 균열 속에 있는 뱅그릿을 찾아내는 것?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그런 곳에 있었군. 뱅그릿 톰.”

……일이거늘?

설마, 호열 경께서는 그의 위치를 찾아냈다는 것인가!

말했다시피 호열이라고 해도 마법으로 균열 속 뱅그릿을 감지하는 건 불가능할 터.

대체 어떻게 뱅그릿의 위치를 알아냈단 말인가?

경악하는 마르셀로.

그런 마르셀로에게 호열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이엔 기이로 맞서야 하는 법.”

.

.

.

그대로 포탈에 진입.

뒤바뀌는 풍경.

나는 탄식을 머금었다.

……아주 그냥 말은 잘한다. 그것도 허세 넘치게.

‘그냥 문자를 받은 게 전부면서 말이야.’

내가 뱅그릿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던 이유?

간단했다.

남태민한테 전달받았거든.

정확히는 남태민을 통해 내게 전달된 AAU의 정보를 말이야. 그 메시지엔 신규 업데이트 내역과 균열의 위치가 첨부되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신속하지.’

대격변 이후.

균열에게 시달렸던 인류였다.

덕분에 균열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

그거 하나만큼은 마법보다 빠른 게 당연했다.

왜, 요즘 인공위성은 사람 얼굴도 촬영할 수 있다는데 말이야. 균열 찾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란 것이다.

‘한마디로 과학의 힘이란 거지.’

기이엔 기이로 맞선다…….

그러니까 또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이거?

물론, 같은 말을 해도 잔뜩 힘을 줘서 말한 덕분인가.

“지난번에 언급하셨을 때와는 또 다른 발현……!”

마르셀로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정말 대단합니다. 역시 저는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여기서 지난번은 티타임을 가졌을 때겠지.

손가락만 까딱하면.

필요한 물건이 마탑 앞까지 도착한다고.

로켓 배송의 위대함을 설파하던 나였다.

나는 그저 다른 앱을 실행했을 뿐이거늘.

마르셀로에겐 그게 새로운 발현으로 보이는 모양.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의문이 있다면 언제든 묻게나.”

이걸 듣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고작 알려줘 봐야 스마트폰 사용법 정도면서 말이야.

생색은 엄청나게 부린다. 진짜.

물론, 지금은 사이좋게 떠들 상황이 아니었다.

뒤바뀐 시야.

이내, 모습을 드러낸 균열.

마르셀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저것이 기이의 공간, 균열이군요.”

그래, 저 균열 안에 마르셀로가 있다.

확신할 수 있는 이유야 간단하다.

신규 업데이트 내역.

그리고 균열에 접근한 순간.

떠오른 메시지.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을걸?

*

호열을 제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플레이어는 제시 하인네스가 유일했다.

퀘스트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탑의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

만에 하나 그가 폭주라도 하기 시작한다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거예요.”

플레이어들이 뱅그릿을 자극하게 놔둘 순 없었다.

제시는 샤이닝을 통해 상황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허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신규 업데이트? 뭐야, 오늘 목요일 아니잖아?”

예상치 못한 업데이트 내역이 떠올랐으니까.

예정된 신규 업데이트가 아니어서일까.

그 내역은 간단명료했다.

“……이런 미친. 이게 뭐야?!”

하지만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

신규 균열, ‘깨진 차원의 틈’이 추가됩니다.

적정 레벨 : Lv.900

──────

“……적정 레벨이 900레벨이라고?”

“오류 아니야? 오타라든가?”

“그, 그래! 9랑 6을 뒤집어서 썼을 수도 있잖아?”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탑에서 터진 사건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업데이트 내역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잠깐, 내가 상상하는 게 현실이 된 건 아니겠지?”

“마탑의 선임 마법사. 그 괴물이 저 균열 안에 있다고?”

“적정 레벨이 900인 것도 이해가 되는데……?”

900레벨.

실로 압도적인 수치.

그건 퀘스트에 목숨을 걸었다고 다짐한 플레이어들조차 포기하게 할 정도였다.

아니, 플레이어뿐만 아니었다.

길드들도 이런 큰 위험을 감수하기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뒤따를 수밖에 없는 생각.

“……그럼 저 균열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더 나아가 저런 균열이 붕괴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소식이 전해진 건 그때였다.

“호열 씨?”

이호열.

그가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남태민은 직감할 수 있었다.

호열이 저 균열에 진입할 생각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문자를 보냈다.

“제가 거기서 도움이 될진 모르겠는데요.”

곧바로 협력하겠다고.

남태민은 주먹을 쥐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냐고?

어차피 호열이 없었다면 프로스트에서 죽거나, 죽는 것보다 못한 상태로 살아가야 했겠지.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호열이 형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맨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겠습니다.”

그런 남태민이 비장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지이잉─

진동이 울렸다.

“?!”

……어째 옛날 생각이 나는 답장이 도착했다.

곤란하군.

그때 받았던 답장보다는 딱 두 글자 더 많았지만.

담긴 뜻은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내부 사정이다.

“……내부 사정?”

남태민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

.

.

이건 마탑 내부의 사정이란 말이다.

어떻게 보면 집안싸움이라는 거지.

물론, 지원군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적정 레벨이 900레벨인 게 뭐 어쨌단 말인가?

저 균열 안에 마탑의 선임 마법사가 있다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내 옆에는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가 있단 말이다.

그래, 이것은 근거 넘치는 자신감.

고상한 표현으로 호가호위라는 것이다.

[깨진 차원의 틈]

[적정 레벨 : Lv.900]

[균열 붕괴도 : 4.8%]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더없이 뻔뻔한 목소리로.

“신속히 끝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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