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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74화 (6/489)

◈ 74화. 기우에 불과하다 (1)

─수석의 무게 (반복)▲

●토파즈 홀에서 검증을 진행하라. (성공)

●정기 학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라. (진행 중)…….

마탑의 이벤트.

곧 정기 학회가 시작된다.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어떨지 모르겠다만.

내게 정기 학회는 더없이 중요한 이벤트겠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는가.”

왜, 지난 정기 학회를 떠올려보자.

뭣도 모를 그 시절에도 마르셀로의 진보된 마법, [『기이』]를 비롯해서 그저 학회에 참여한 것만으로 유용한 마법을 습득했던 나였다.

그런 마탑의 정기 학회야말로.

내게는 마법적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대형 이벤트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지식은 언제나 흥미를 자극하는 법이지.”

그래, 이번만큼은 이 허세에 공감한다.

무엇보다 균열 공략에 구체적인 명분이 생긴 나였으니까.

보다 적극적으로 균열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상당한 적정 레벨을 자랑하는 균열에.

‘레벨이 부족하면 다른 쪽에서라도 채워야 한다.’

그래서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희소식이란 거지.’

물론, 첫 정기 학회 때와는 달리 나는 처지가 바뀌었다.

퀘스트에도 나와 있듯.

나는 마르셀로의 공동 연구자로서.

수석의 무게를 짊어지게 됐으니까.

“그에 걸맞은 자세를 보여야 한다.”

무게와 자리에 익숙한 그랑펠 님이시다.

덕분에 고된 육체 단련이 끝나자마자.

나는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곧장 책상으로 직행.

책상 위에 가지런히 쌓인 마법 서적에 손을 뻗었다.

그래, 이 묵직한 마법 서적들이야말로.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란 것이다.

“보다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단 뜻이겠지.”

정기 학회에 발표되는 연구.

모든 마법은 검증을 거친 수준 높으면서도 새로운 것들.

내겐 짊어진 무게가 있으니, 과거와는 다르게 무엇하나 대충 지켜볼 수 없겠지.

쉽게 말해서 드높은 긍지께서는 발표자들의 노력을 가벼이 취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스륵─

……결국, 죽어나는 건 이번에도 나라는 말씀.

어째, 최근 들어 자취방에 가본 기억이 나질 않는데.

마탑의 연구실.

프로스트.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

다시 마탑의 연구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그 세 곳만 오고 가고 있었다.

이럴 거면 아예 이사하는 게 낫겠군.

탄식을 삼키기도 잠깐.

“잡념은 여기까지다.”

촤르륵─

나는 마법 서적을 펼쳤다.

투정이 무색하게도 무서울 정도로 집중했다.

집중이 필요할 정도로 살피는 서적은 다름 아닌 ‘비약초’에 관한 서적이었다.

토파즈 홀에서 이뤄졌던 사전 검증.

내가 통과시킨 몇 안 되는 연구들.

그중 하나가 바로 비약초의 육성법에 관한 연구였으니까.

“새롭군.”

마탑에서도 낯선 분야라고 했으니까.

내게도 낯선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랑펠이 누구던가?

자신조차 낯선 주제를 정기 학회에 세울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 연구를 통과시킨 책임을 지고 있는 셈이었다.

결국, 사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된 게 뭐가 이렇게 많아.’

치유학, 약학, 제조학…….

외울 건 뭐가 또 이렇게 많다는 말이냐.

그랑펠의 재능이 없었다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다. 진짜.

하지만 무엇이든 마음먹기에 달린 법.

‘피할 수 없다면.’

그래, 즐기자.

행복한 미래를 꿈꾸자.

비약초의 육성법.

그 연구가 미래에 값비싼 영약이 되고 포션이 되리라.

김칫국이라도 마셔보자고.

물론, 이제야 체념한 머리와 다르게 육체는 이미 즐기고 있었으니.

“기대되는구나.”

스륵─

연구실엔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게 당연하다.

*

삑─

채널을 돌려본다.

-가온 길드와 더불어 이호열 플레이어의 가치는 감히 측정하기조차 힘들다고 할 수…….

삑─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에 떠오른 메시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해결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건 역시나 이호열 플레…….

삑─

-여기서 보여준 기계 장치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스킬. 온갖 플레이어들, 클래스를 수소문해봤지만. 저런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는 찾을 수가 없…….

어떻게 된 게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이호열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이다.

“에휴.”

최강희 여사는 바닥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핑계를 내세울 수도 없었다.

“뭔, TV만 틀면 얼굴이 나오니까.”

솔직한 심정으로 같이 사는 바깥양반 얼굴보다도 아들내미 얼굴을 더 자주 보는 것 같았다. 자기 얘기를 하는지, 모르는지.

싹둑─

바깥양반, 이준욱은 무언가를 집중해서 오려내고 있었다.

“당신 또 신문 오려요?”

“엉?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아주 그냥 신문에 이호열 아들내미 이름만 나왔다 하면 가위를 꺼내 가지고는.”

“허허.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하기엔 그 입가가 귀에 걸렸다.

신문 기사 스크랩.

최강희 여사의 말대로 이준욱의 새로 생긴 취미였다.

누군가는 궁금해서라도 묻겠지.

딸부잣집 막내아들.

아들내미가 나온 신문을 오려서 보관하는 게 뭐가 그렇게 이상한 일이냐고.

물론, 최강희 여사에게도 할 말은 많았다.

“당신, 그렇게 모은 기사만 한 박스도 넘는 거 알아욧? 아니, 박스가 뭐야. 이놈의 집구석 어디를 들추기만 하면 신문지가 튀어나오는데……!”

“어허. 이 사람아. 다 그게 나중에 추억이 되고…….”

“이 핸드폰으로 뉴스도 보는 세상에 말이야. 지난번에 신문 캡처하는 법도 예림이가 알려줬잖아요? 꼭 종이신문을 오려서 모아야 한다느니. 제대로 정리도 안 하면서 아주 그냥 고집은.”

그랬다.

하루 이틀.

신문 한 줄 두 줄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이호열.

아들의 이름이 나온 기사?

일간 신문 하나를 사면 거짓말 조금 보태 하나 걸러 한 기사에 호열의 이름이 보였다.

정치, 경제, 심지어는 연예 스포츠 신문에서까지.

호열의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흐아암─ 뭐야. 둘이 또 싸워?”

“싸우긴 누가 싸운다고 그래. 이 좋은 날에.”

“저저, 아주 그냥 저 가위는 끝까지 손에서 안 놓지.”

3호, 이예림에겐 익숙한 풍경.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TV 속 동생의 얼굴도 더없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요것 봐라? 이예림이 입맛을 다셨다.

“엄마, 내일모레 생일인데 호열이한테 연락 없었어?”

“바쁜데. 걔가 연락할 정신이 어딨겠니.”

“아니, 암만 바빠도 엄마 생일 까먹는 아들내미가 어딨대?”

아무리 잘나간다고 한들.

동생은 동생.

아들은 아들.

이예림이 큼큼 헛기침을 뱉었다.

“내가 아주 하늘 같은 누나로서 한마디 해야겠어.”

물론, 그건 핑계.

이예림의 속내는 시커멨다.

그저 동생을 놀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거, 내가 자취방에서부터 알아봤다니까?”

왜, 닭가슴살부터 샐러드 재료까지.

언니들은 이호열에게 속았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거든.

그래, 이예림은 그때부터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런 이예림의 시선을 끈 건 다름 아닌 연예 신문에서 접한 호열의 기사.

이예림이 냉전 중인 갱년기 부부 사이를 파고들었다.

“엄마! 엄마는 외국인 며느리 어떻게 생각해?”

여기서 외국인 며느리는 제시 하인네스였다.

제시가 자신의 길드도 뒤로 하고 호열에게 합류했던 사건은 여러모로 큰 화제를 끌었으니까. 물론, 보는 것처럼 이예림의 촉을 끌기도 했고.

“이 가시나. 너 또 쓸데없는 소리 하려고 그러지?”

“……이씨. 재미없게. 그럼, 아빠!”

“엉?”

“아빠는 재벌집 며느리 어떻게 생각해?”

여기서 재벌집 며느리는 신화 길드 마스터, 백이설이다.

호열에게 몇 번이고 문전박대당했던 그 백이설 말이다.

지금이야 잠잠해졌지만, 그땐 충격이었지.

팜므파탈로 여자들 사이에서 은근히 인기를 끌던 백이설.

그녀가 자신의 동생, 호열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다니.

‘언니들도 호들갑 장난 아니었지. 그때.’

혹시 호열이한테 우리도 모르는 마성의 매력이 있는 거 아니냐며 말이야.

그러나 이런 이예림의 망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콩!

“아야! 엄만, 왜 머리를 쥐어박고 그래?!”

“이 가시나는 꼭 뭔 일만 있으면 호열이 놀려먹으려고.”

“놀리는 게 아니라 분명 뭔가 있다니까? 엄마가 남녀 사이에 그 복잡 미묘한 관계를 알긴 알아?! 그게 썸이라도 타는지 누가 아냐고!”

싹둑─

잠자코 신문을 오리던 이준욱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까. 아주 척척박사니까 느그들을 낳았지.”

그것도 연년생으로 사 남매를…….

물론, 그 말을 끝맺을 순 없었으니.

결국, 최강희 여사께서 폭발하셨기 때문이었다.

“다들 조용!!”

두 사람 다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에 불을 지폈다.

아들이 날마다 TV에 얼굴을 비춘다고 하더라도.

어머니의 마음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호열은 플레이어였다.

지금까지야 걱정하는 쪽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호열은 위기랄 것도 없이 잘해내고 있었지마는…….

자식 걱정은 끝이 없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란 말이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는지.”

가끔 들르면 밥이라도 한 끼 제대로 챙겨 먹일 텐데.

호열이 워낙 바쁜 걸 알았기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알아챈 이예림이 말했다.

“이러니까 아들내미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는…….”

그러나 등짝을 얻어맞기도 전에.

툭툭─

“……이게 무슨 소리래요?”

무언가 창문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창문 쪽으로 향한 이준욱이 기겁했다.

“으억! 저, 저게 뭐야?”

열린 창문으로 파고드는 무언가.

그건 날개 달린 종이뭉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이 발현된 편지였다.

파닥파닥─

날갯짓하던 편지가 정확하게 최강희 여사의 품에 떨어졌다.

살아 움직이는 편지라니.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게 무슨 영화 같은 상황이냐, 싶었겠지만.

이젠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우, 우리 호열이가 보낸 거겠죠?”

그랬다.

사실 그 외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동그랗게 말아서는.

촛농으로 봉인한 편지에선 기품이 흘러나왔으니까.

이예림이 은근하게 물었다.

“얜 톡으로 하지. 뭔 이렇게까지 한대? 그치, 엄마?”

“그러게. 한창 바쁠 텐데…….”

“으이구. 마음에도 없는 소리!”

잘했다, 내 동생.

아무리 바빠도 엄마 생신은 챙겨야지.

최강희 여사의 밝아진 얼굴에 이예림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저나…….

“엄마, 얘 진짜 미쳤나 봐!”

촛농을 뜯어내자 들어온 건.

이게 대체 몇 자란 말인가?

쓰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을 것 같은 장문의 편지.

“……호열이가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니?”

그것도 단어 하나하나에서 격식이 묻어져 나오는 글줄들.

물론, 편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최강희 여사가 둘둘 말린 편지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자세히 볼 것도 없었다.

그 외관이 더없이 익숙했으니까.

이예림이 흠칫했다.

“티백 아냐, 그거? 녹차? 뭐래, 그거?”

빼곡한 편지.

마침내 그에 관한 추신을 찾아낸 최강희 여사가 말했다.

“……비약초? 비약초로 만든 차라는데? 호열이가?”

*

편지를 보내는 데엔 영화처럼 올빼미도 필요 없었다.

필요한 건 그저 조금의 마력뿐.

창문을 열자 비행을 시작한 편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말이야.

격식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참석하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엄마, 최강희 여사의 생신이 내일모레였다.

정기 학회만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 가족 행사에 참석했겠지.

그런 의미에선 정기 학회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왜, 글로 적은 것만 하더라도 수백 줄인데.

그걸 말로 전한다고 생각해 봐라.

‘심지어 그걸 누나들 앞에서?’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정말로.

어쨌든, 비약초로 만든 차를 동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분 다 건강을 챙기셔야 할 나이셨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비약초로 만든 차가 도움될 거다.

포션과 영약의 재료가 되는 비약초가 아니던가?

우려낸 차도 그와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게 당연했다.

‘책을 들여다본 보람이 있네.’

당연하게도 그건 비약초에 관한 지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기 학회를 앞두고 온갖 마법 서적을 들춰본 덕분에 비약초의 활용법에 대해서도 대충이나마 감을 잡은 참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직 멀었다.”

물론, 감을 잡았다는 거지.

깨달았다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비약초에 관한 지식은 마법처럼 본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한 마디로 외워야만 하는, 암기 과목이라는 거지.

게다가 비약초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자라는 식물이었다.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

자라나는 비약초만 하더라도 수백, 수천만 가지라고 했지.

그런 비약초에 대한 지식을 쌓는 다라…….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인가.

의심부터 들었거늘.

말했다시피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말도 되니까.’

스륵─

그러니까 아쉬운 사람이,

레벨이 아쉬운 나는 우물을 팔 수밖에 없단 말이다.

다시금 들여다보는 비약초 관련 서적들.

그러나 나의 독서는 오래가지 않았다.

──────

비약초는 아르카나 대륙에 자라는 식물의 한 분류로서…….

──────

“……!”

문득, 그 구절에서 떠올린 것이다.

마왕, 데카라비아.

녀석에 관한 정보를.

그래, 데카라비아는 새를 사역마로 부리며.

모든 광물과 ‘식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식물.

그렇다는 건 비약초에 관한 지식도 포함된다는 거잖아.

그래, 내게는 그런 데카라비아가 남긴 전리품이 있다.

[불순한 지식의 오망성]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그것도 이름과 등급부터 심상치 않은 전리품이……!

‘……잠깐, 이거 불순한 지식이라는 게 설마?’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게다가 일희일비하지 않는 그랑펠의 성격까지.

그러니까.

그저 무심하게 내뱉을 뿐이다.

“모든 가설엔 검증이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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