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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67화 (182/489)

◈ 67화. 악크샨의 유산 (1)

고고하신 그랑펠 님께서.

찾아온 수고나 정성 따위를 고려해 주실 리가.

‘그게 누가 됐든지 말이야.’

이나즈마.

지금이야 가온 밑으로 내려오게 됐지만.

오랫동안 길드 랭킹 최상위권을 지키는 명문 길드였다.

히사기 카즈마?

플레이어 랭킹 무려 6위.

내 옆에 있는 남태민보다도 레벨이 높았다.

대격변 초창기.

그가 창 한 자루를 들고 도쿄에 나타난 몬스터를 쓰러트리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일동 충격─

그래, 그들이 내 말에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런 걸 신경 썼으면 말이야.

‘애초에 마탑 선임 마법사들을 문전 박대하지도 않았겠지.’

마탑의 선임들이 누구인가?

플레이어는 물론이요, 그랑펠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자들.

내겐 그런 선임 마법사조차 삼고초려 시킨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내 고집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가.

히사기가 다시금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이 시간에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내일이라.

시간을 내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굳이 내가 만날 필요가 있을까.

‘그 목적이야 대충 알겠다.’

이나즈마는 일본 정부와 연결고리를 끊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떠난다고 선언한 상태. 히사기는 유스라 왕국을 새로운 정착지로 생각하는 거겠지.

‘그런 목적이라면.’

나보다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를 만나는 것이 옳다.

유스라 왕국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나다.

사실 이나즈마의 입국 심사 정도야.

내 권한으로 처리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

그러나 말했다시피 모든 것엔 절차가 있는 법.

“그보다는 하쿠나 왕과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좋겠군.”

그래, 유스라 왕국은 하쿠나가 통치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하쿠나가 도움을 청할 때만 그 ‘권한’을 사용해 왔다.

왜, 그림자 용병단 때처럼 말이다.

“……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와씨, 예의 바른 거 봐.”

일동 다시 묵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이나즈마 길드원들.

남태민이 혀를 내두르는 것처럼.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겠지.

물론, 나는 그 부담스러운 인사를 흡족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정말, 어디 조직의 보스라도 된 기분이 이런 건가 싶다.

“개과천선했다는 걸까요? 그 뱀눈이 어떻게 저렇게 됐지?”

이나즈마를 지나친 지금.

남태민은 어째서인가 즐거운 눈치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가온과 이나즈마.

한국과 일본.

엇비슷한 길드 랭킹.

길드 마스터의 레벨까지도.

그들은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호열 씨만 안 계셨어도! 한마디 해주는 건데. 제가 또 이나즈마 놈들 속 긁는 거 하나만큼은 자신 있거든요! 아, 근데 또 호열 씨가 안 계셨으면 그것들이 고개를 숙일 일도 없었겠구나……?”

쌓인 게 많긴 많았나 보다.

그런 남태민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기도 잠깐.

나는 균열 앞에 이르렀다.

“적정 레벨 실화냐?”

“뭔진 몰라도 경험치 하나는 확실하겠네.”

“그래도 균열이니까, 우리도 도전해 볼 만하지 않을까?”

몰려든 인파가 많았다.

플레이어에 아르카나인까지.

그 분위기를 보아하니……. 몇몇 플레이어들은 벌써 균열으로 진입한 모양인데? 나서서 유스라 왕국을 수호하려는 모습이 아주 바람직하군.

[퀴른베르크 기계탑]

[적정 레벨 : Lv.400]

[붕괴 진행도 : 0.1%]

……그보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잖아, 다들?

적정 레벨이 이보다 간결할 수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400레벨.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랐거늘.

남태민이 설명을 덧붙였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한때 저게 대체 뭘까. 혼자서 고민 많이 했었는데. 이제야 그 내부를 구경할 수 있게 됐네요!”

퀴른베르크 기계탑.

그건 아르카나 대륙 곳곳에 세워진 탑이었다.

NPC들도 그 존재를 정확히 아는 자가 없고.

그렇다고 그에 관한 퀘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굳게 닫힌 입구를 여는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 중에선.

남태민처럼 내심 기대했던 이들도 있던 모양이었다.

“형님들. 제가 또 누굽니까? 이 한 몸 바쳐서라도 기계탑 내부 확실하게 중계하겠습니다. 자, 그러니까 들어가기 전에 육개장 값이라도…….”

넷튜버들이 몰릴 정도로 말이지.

대륙 곳곳에 솟아있었던 기계탑.

같은 이름의 균열이 세계 곳곳에 생성된 이유가 있었군.

물론, 중요한 건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거침없이 내딛는 구둣발.

그 구두 소리에 집중되는 시선.

하지만 이 순간 내게 중요한 건.

플레이어들의 관심 따위도 아니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아니, 무엇이 됐든지 상관없었다.

말했다시피.

“허가되지 않은 불법 건축물은 용납할 수 없다.”

절차를 지키지 않는다면 본보기를 보이는 수밖에.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진입하셨습니다.]

.

.

.

“……살풍경이네요.”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균열까지 동행할 줄이야.’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내게 적정 레벨 400레벨짜리 균열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파티를 맺은 건 또한 아니잖아?

그러니까 빚을 지는 건 또 아니다.

‘그저 남태민이 자발적으로 나를 따라나선 것뿐.’

나는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과연, 기이한 풍경이로군.”

내뱉은 말대로 [『기이』]한 풍경이었다.

복잡한 기계 장치와 톱니바퀴 사이로.

언뜻 보이는 유스라 제도의 모습.

일단,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내부가 이렇게 생겼구나.”

“근데 뭐가 이렇게 없어? 휑하네?”

“긴장을 늦추지 마.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킁킁─

남태민이 코를 벌름거렸다.

바바리안, 발달한 후각 활용하는 거겠지.

남태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피 냄새 같은 것도 안 나고요?”

무엇보다 입구나 출구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 같은 것도 말이야.

‘……확실히 이상한데.’

내가 낌새를 느낀 만큼.

다른 플레이어들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때였다.

취이이익─!

멈춰있던 톱니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그 충격에 흔들리는 디딤발.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플레이어들.

“시끄럽군.”

물론, 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육체를 지배하는 품위.

몸에 배어든 격식이 이런 상황에서도 곧은 자세를 유지하게 하였다.

그걸 떠나서라도 마탑의 아찔한 계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내리게 된 내가 아니던가?

“시작부터 장난이라니.”

덕분에 나는 꼿꼿하게 고개를 세운 채.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슬슬 감이 잡히는데, 이거?

주위를 살피던 남태민이 흠칫했다.

“뭔가 되게 날카로운 톱니바퀴로 바뀐 것 같은데요?”

그 말대로였다.

벽면에 생김새부터 흉흉한 기계 장치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소리쳤다.

“설마, 함정인가?!”

“미친. 이렇게 거대한 함정은 본 적도 없어!!”

“……잠깐만, 저기 저거 포탈 아니야?”

반대편 끝.

솟구치는 선명한 푸른 빛.

‘탐색, 간섭, 발현의 정도로 보아하니…….’

저건 마도구, 그러니까 아이템을 활용한 포탈이로군.

마탑의 포탈과는 그 간섭 과정에서 차이가 있어 보였지만.

그 효과는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그 방식은 달라도 마탑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거잖아, 저게?

무엇이냐, 이 기계탑.

허나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오직 나뿐이겠지.

플레이어들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충 보니까 함정을 돌파해서 저 포탈에 도달하면 되는 것 같은데?”

그 흥분을 부추기듯.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 함정 돌파]

정교한 함정을 피해 포탈에 도달하라.

그 순위에 따라 보상이 따르리라.

─현재 순위

●1위 : 없음

●2위 : 없음

●3위 : 없음

“호, 호열 씨! 호열 씨도 퀘스트 받으셨어요?!”

“함정 돌파, 확실하게 떠올랐다.”

“그렇구나.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경쟁 컨셉이었나 봐요!”

퀘스트, 그리고 보상은 언제나 반가운 거니까.

남태민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반응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나는 느끼고 있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이 공간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말이야.

무엇보다 저 함정들이 낯설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탐색』 과정을 생략할 정도로 익숙한 대상이란 것이었다.

‘모든 게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

날카로운 톱니바퀴.

장전된 화살촉.

그 모든 게 ‘은(銀)’이었다.

나는 은의 특징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반전 마법』 덕분에 내구도에서 자유로웠지만.

그 이전엔 은제 무기 사용을 아끼던 나였다.

은제 무기는 그 내구도가 형편없었으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사용할 이유가 없다.’

그래, 은은 특수한 광물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용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광물.

그런 은제 무기를 내가 사용한 이유?

그거야 나는 악마 사냥꾼이었으니까.

은이 바로 악마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였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게.

저 함정은 의문스러워 보일 수밖에.

‘은으로 함정을 만들 이유는 하나뿐이야.’

그래, 저건 ‘악마’를 처치하기 함정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다시 한번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

이번엔 클래스 퀘스트였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유산]

생존의 봉화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에 의해 소실된 그대들의 유산을 되찾아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조사하라. (진행 중)

그러면 그렇지!

내가 뭐가 있을 줄 알았다니까?

근데, 잠깐만.

‘……뭔가 이상하다?’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

그래,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악크샨의 결전병기이자 유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내 기억 속의 악크샨 기지는 뭐가 없어도 쥐뿔도 없었단 말이다……!

‘이런 게 있었으면 플레이어들이 도망가지도 않았겠지!’

내세울 거라곤 헝그리 정신밖에 없던 악크샨 기지.

이런 근사한 게 있었으면 진작 보여줘야 할 것 아닌가?

괜히 플레이어들이 계정을 삭제하면서까지 악마 사냥꾼을 때려치운 게 아니란 말이다.

‘그랬으면 덜 고독했을 거 아니냐고.’

그러니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랑펠의 재능이 알아본 탓이었다.

퀴른베르크의 기계탑.

그 초입부터 실감하게 되는 기술력.

마탑과는 다른 갈래로 발전한 기술력이었지만.

감히 마탑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단 뜻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의문은 해결할 방법은…….’

결국 하나밖에 없단 소리겠지.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조사하는 것.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의문은 자연스레 풀리겠지.

그러니까 이 순간,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먼저 가지.”

앞에 보이는 함정을 통과.

반대편의 포탈에 도달하는 것.

그 과정에서 우수한 순위를 기록한다면?

뭐, 겸사겸사 좋은 거고.

‘뭐가 됐든 보상이 주어진다니까.’

그나저나 정장에 구두라니.

누가 봐도 함정을 통과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복장이시다.

그러나 상관없다.

말했다시피.

앞에 보이는 기계 장치는 전부 은으로 만들어진 것들.

내게는 탐색 과정조차 생략할 정도로.

익숙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또각─

이런 함정으론.

내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단 소리였다.

*

퀴른베르크 기계탑.

갑작스럽게 떠오른 퀘스트와 함정들.

그건 유스라 왕국의 균열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 생성된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

그곳에 진입한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같은 퀘스트가 떠오른 것이었다.

“순위에 따라 보상이 주어진다고?”

“딱 3위까지만? 와 빡세네.”

“경쟁 장난 아니겠는데?”

수많은 플레이어를 1, 2, 3위로 줄 세운다.

그 사실만 하더라도 관심이 쏠리기엔 충분했다.

상승하는 시청률.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넷튜버들의 시청자 수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에이, 근데 이거 공평하지가 않잖아?”

그와 별개로 함정 돌파가 시작되기도 전에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도 있었다.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그 결과가 뻔해 보였으니까.

“그냥 민첩 스탯 높은 순서대로 순위 찍히겠지. 뭐.”

함정을 돌파하는 방식이야 클래스에 따라 다르겠지만.

높은 순위를 기록하는 데엔 민첩 스탯이 높은 플레이어가 유리한 게 당연했다.

방패나 마법으로 함정을 막아내면서 전진.

그냥 회피해 가며 전진.

둘 사이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채팅창에선.

벌써부터 몇몇 플레이어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우리 카밀라 누님이 활약 때가 됐지ㅋㅋㅋㅋ

-남태민이 광폭화 쓰면 또 모르는 거 아님?ㅋㅋ

-근데 록스는 어디서 뭐함? 진짜 모름

-ㄹㅇㅋㅋ 자기가 제일 유리한 퀘스트인데 보이질 않네

-본인 카밀라한테 올인함ㅋㅋㅋㅋㅋ 정배 가보자

하지만 그 채팅창이 통일될 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이내, 플레이어들의 퀘스트창에 기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현재 순위

●1위 : 1분 01초

●2위 : 4분 41초

●3위 : 4분 50초

고작 1분 남짓.

2위보다 무려 3분 40초가량 앞선 압도적인 기록.

그 기록의 주인공이 채팅창에 도배되고 있었다.

-그저 호멘

-그저 호멘

-그저 호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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