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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66화 (181/489)

◈ 66화. 마탑 (3)

달칵─

찻잔을 기울이는 소리가 연구실에 울렸다.

마르셀로가 차를 음미하더니 작게 탄식을 뱉었다.

“과연, 좋아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접객이라고 해도 고작 녹차 티백 하나를 띄웠을 뿐.

그 태도에 되레 내가 멋쩍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물론, 나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진정한 가치는 그 값어치와 희귀함에 있는 게 아니지.”

아주 그냥 하나에 200원짜리 녹차 티백에 그놈의 의미부여를……!

이쯤 되면 잠자코 듣고 있는 사람도 문제다.

내가 말이야.

이렇게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발산하고 있는데.

“생각할 여지가 많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오히려 맞장구를 치면 어떡하란 말이냐?

물론, 마르셀로가 내 헛소리에 고개나 끄덕이려고 나를 찾아온 건 아니었다.

나는 점멸하는 퀘스트창을 통해서 그 의도를 파악했다.

─마르셀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성공)

─능력을 증명한다. (성공)

─수석의 무게 (반복)▼

─기이에 대한 접근 (진행 중)

새롭게 생성된 퀘스트 목표.

기이(奇異)란.

기이하다, 할 때의 기이를 말하는 거겠지.

알고 있었지만 먼저 입술을 떼진 않았다.

그러자 찻잔을 내려놓은 마르셀로가 운을 떼었다.

“짐작하고 계신 대로 마탑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뭐야?

바로 그 얘기부터 꺼낸다고?

마르셀로의 성격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브레이크라곤 없군.

“그러나 죄송하게도. 지금으로선 그 사정에 대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도 그 사정을 혼자 짐작하고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검증을 거치지 않았단 소리입니다.”

마르셀로가 쓰게 웃었다.

살점 하나 없이 빼빼 마른 얼굴.

게다가 평소에 그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여서인가.

그 쓴웃음에서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달칵─

나는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그 심정을 이해하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진짜 용건은 무엇인가?”

“……짐작하고 계셨군요. 역시, 무엇하나 숨길 수 없겠습니다.”

알아차린 건 내가 아니라 퀘스트창이었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나는 이어지는 마르셀로의 말에 집중했다.

그 핵심만 정리하자면 이랬다.

“마법과 과학,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의 융합. 그 진보된 마법을 저는 ‘기이’라고 칭하기로 했습니다.”

[『기이』]가 그런 뜻이었군.

그렇다면 새롭게 떠오른 퀘스트 목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개념엔 검증이 필요한 법이겠지.”

내겐 그랑펠의 마법적 재능.

거기에 나, 이호열의 과학적 지식이 있었다.

그 두 개념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기이를 활용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은 아니겠지.

수석이라는 마르셀로부터 애를 먹고 있었으니까.

‘그 기초부터 쌓아나가야 한다는 소리야.’

물론, 내겐 필요 없는 과정.

그러나 퀘스트가 있지 않던가?

그 퀘스트를 진행하며 ‘마탑의 피치 못할 사정’에 대해서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 곳에서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인가?”

내 물음에 마르셀로는 정중하게 답했다.

“계속해서 신세를 지는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균열을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균열?

이거, 내가 아는 그 균열 말하는 거겠지.

그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균열 말이야.

근데, 기이와 균열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흠칫하던 순간.

“……!”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였다.

‘……아니, 균열 또한 기이와 같다.’

기이란, 완벽히 다른 두 개념의 융합.

균열 또한 완벽히 다른 두 세계.

현실과 아르카나가 뒤섞인 공간.

나는 그런 균열의 풍경을 떠올렸다.

지하철과 놀의 서식지를 절반씩 섞어놓은 듯했던 풍경.

그래, 그 풍경은 더없이 [『기이』]했었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자네의 뜻을 이해했네, 마르셀로.”

“균열은 두 세계가……. 네? 이, 이해하셨습니까?”

그와 동시에 갱신되는 퀘스트 목표.

─기이에 대한 접근 (진행 중)▼

●균열을 공략하라. (반복)

“당장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균열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면. 기이에 관한 탐구에 큰 진전이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느슨해진 긍지를 긴장하게 하는 퀘스트.

나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다 해야겠지.

준비운동은 필수였다.

부지런히 발버둥 치기 위해서도 말이야.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클래스, 악마 사냥꾼.

[천적관계]가 없다면 나는 미친놈도 아니고, 나사 빠진 놈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니까 만반의 준비를 하자고 결심한 거다. 왜, 꼭 맨몸으로 발버둥 칠 필요는 없잖아?

‘비약초, 포션, 템빨 등등…….’

왜, 활용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써먹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게 내 방식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나에게 마르셀로가 말했다.

“저는 동행할 수 없지만, 균열의 공략 또한 연구의 일부. 아니, 그저 단순한 연구가 아닌 진리를 향한 첫걸음과도 같은 일이겠지요. 필요하신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마탑에 요청해 주시길.”

……‘무엇이든’이라.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내가 마탑에 뭘 요청할 줄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내가 진짜 무엇이든 보여줘 봐?’

정말, 기둥을 뿌리째 뽑는 게 뭔지 보여줘야 하나.

내뱉은 말은 쉽게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알려줄까.

고민하다가 관뒀다.

빌어먹을, 청렴결백.

그랑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나는 쓸데없는 탐욕을 부릴 수 없겠지.

그러나 탐욕과 만반의 준비는 엄연히 다르기에.

마탑의 지원은 챙길 수 있는 선에서 챙겨둬야 한다.

달칵─

나는 번뇌를 거두고 마르셀로에게 찻잔을 들어 보였다.

“그럼, 마저 들지.”

“향이 참 좋습니다. 차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녹차라고 부른다네.”

“녹차라…….”

“유감이지만, 그대에게 나누어 줄 몫은 없네.”

“아아, 그럴 생각은…….”

“허나, 이젠 로켓 배송이 있으니 상관없겠군.”

“……로켓 배송?”

“그냥 녹차와 현미녹차. 무엇을 원하는가?”

“……그 둘은 무엇이 다른 겁니까?”

*

[『기이』]에 관한 접근.

그 기초가 될 균열 공략.

그 준비 과정의 첫 단계는 나를 아는 것이었다.

‘지피지기.’

뭐, 거창하게 말했지만.

그냥 인벤토리를 확인한다는 소리였다.

마왕, 데카라비아.

녀석을 위한 구마의식에서 제물로 바쳤던 세 개의 아이템.

[귀신 들린 명검]

[귀부인의 보석함]

[목을 조르는 넥타이]

그 악마의 아이템은.

데카라비아를 쓰러트리면서 정화된 상태였다.

나는 심미안으로 그 아이템들을 바라봤다.

“나쁘지 않군.”

그야 내가 경매장에서 직접 골랐던 아이템이었으니까.

당연하게도 깐깐하게 골랐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본 건 그 레벨 제한이었다.

‘자금이 많다고 한들, 제대로 써야 아깝지 않은 법이니까.’

나는 가장 먼저 검의 정보를 확인했다.

[무명 대장장이의 유작-장검]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80]

[효과 : 공격 시, 상대에게 높은 확률로 상태이상 ‘출혈’ 발동.]

[설명 : 대장장이의 마지막 작품이다. 원한에 가까운 미련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진가를 되찾았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였다.

[귀신 들린 명검]일 땐 생각도 못 한 능력치잖아, 이건?

무엇보다 유니크 등급의 장검이었다.

효과를 떠나서 기본적인 성능만 따져도…….

구매 금액의 몇 배를 건진 거야, 이게?

‘드디어 훈련용 장검에서 벗어나는구나.’

검술 수련.

그 과정에서 챙겨뒀던 [라이언 하트 기사단-훈련용 장검].

그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난 아이템을 획득했으니까.

이제야 좀 입문자티를 벗을 수 있겠군.

나는 흡족하게 보석함의 정보를 확인했다.

[온기가 담긴 보석함]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보관한 장신구에 일정 시간 ‘온기’를 부여합니다.]

[설명 : 귀족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보석함. 딸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잠깐만, 이것도 유니크라고?

이쯤 되니까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나 보는 눈이 조금 있는 건가?

‘장신구에 버프를 걸어주는 아이템이다.’

꽤나 특이한 형태의 아이템.

[온기] 버프라.

보기만 해서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뭐, 버프의 효과야.

차차 확인해 보면 되는 일이겠지.

마지막으로 나는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명품-스왈린 공작의 애장품]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50]

[효과 : 착용 시, 마력 재생력 소폭 상승 / 심미 스탯 소폭 상승]

[설명 : 스왈린 공작의 넥타이. 복잡한 사연에 걸맞은 저주를 품고 있었지만, 정화된 지금은 박물관에 보관되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번엔 그냥 유니크도 아니고 명품?!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난, 경매에서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그랑펠의 재능이겠지만.’

분명, 심미안이 저주에 가려진 아이템의 본래 가치조차 평가해 낸 거겠지.

이 심미안 하나만 있어도 굶어 죽는 일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몇 배가 뭐야.’

구매 금액의 몇십 배는 되는 이득을 보았으니까.

물론, 감정에 변화는 조금도 없었다.

이따위 사소한 이득에 흔들리기에는.

그랑펠의 그릇이 너무나도 광활했으니까.

나는 태연하게 넥타이를 착용했다.

과연, 명품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다.

‘대작보다야 떨어지지만.’

명품도 수식어가 붙어있는 것만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아이템 중 하나였으니까.

효과 또한 간단하지만 나에게 더없이 간절한 효과였다.

‘마력 재생력 소폭 상승.’

소폭이라 큰 효과는 없겠지만.

브로치보다도 그 활용성이 높았다.

[효과 :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10퍼센트 회복.]

그런 조건 없이 마력 재생력이 상승한다는 것?

전투 도중이나 휴식 중일 때나.

마력을 재생시켜 준다는 소리였으니까.

마찬가지로 소폭 상승.

[심미]는 여전히 [下]등급에 머물러 있었지만…….

‘좋았어.’

경매장에서의 첫 구매치곤 아주 훌륭한 성과였다.

게다가 아스큐라 백작 균열 때 획득했던 [숭고한 약속의 목걸이]도 잊지 않았다.

무려 300레벨 제한 아이템.

내가 이걸 착용할 수나 있을까, 싶었었는데.

그 300레벨까지도 고작 5레벨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거울에 비친 차림새를 확인했다.

‘정장에, 행커치프에, 넥타이에…….’

어째 전보다도 더욱 격식을 차린 것 같은 모양새.

그런 차림새로도 모자라 은발 머리카락까지.

이질적으로 느껴질 법도 하거늘.

어째서인가.

나는 거울 속의 내가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 또한 나다.”

그랑펠, 나의 과거이자 흑역사.

이 이질적인 감정 또한.

흑역사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 중 일부.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포탈을 통해 유스라 왕국으로 향했다.

유스라 왕국에 생성된 신규 균열을 공략하기 위해서.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그게 누구 땅…….

아니, 누구의 ‘권한’ 아래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

.

.

유스라 왕국에 균열이 나타났다.

그 사실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건 없었다.

그저 신규 업데이트된 균열의 숫자가 늘어났을 뿐이었으니까.

그에 관한 정보를 전해온 건 남태민이었다.

“단순하게 균열 개수가 늘어났고. 그중 한 균열이 유스라 왕국 인근에 모습을 드러낸 거죠. 그리고 이건 저랑 형만 알고 있는 건데요…….”

나는 곁에서 속삭이는 남태민을 바라봤다.

……그런 중요한 얘기를 나한테 해도 되는 거야?

나야 물론 고마운 일이었다.

남태민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최강의 플레이어이자 세계 랭킹 3위 가온의 길드 마스터.

그런 남태민이 입수하는 정보와 소문들?

나로서는 알 수 있는 턱이 없는 고급 정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군.”

그리고 그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가 있었다.

내 대꾸에 남태민이 말을 이었다.

“이나즈마가 일본 정부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린 순간! 사실상, 일본 정부가 프로스트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명분도, 이유도 사라진 셈이죠.”

고급 정보 중에서도.

프로스트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 중요했다.

나는 프로스트에서 ‘권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진 프로스트의 주민에게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기에.

나서지 않았지만, 이제 슬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그 꼴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지.’

마왕, 데카라비아 토벌 이후.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정말 끈질겼다.

자신의 영토에 프로스트가 걸쳐있단 사실 하나로, 온갖 이유를 들어대며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 댔다. 그러니까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히사기 카즈마. 그 녀석이 괜히 그럴 리가 없는데요.”

이나즈마가 일본 정부에 등을 돌릴 줄이야.

남태민도 그게 의아한 눈치였다.

‘물론, 내가 신경 쓸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린 게 조금 전이었는데.

“이호열 님을 뵙습니다!”

히사기 카즈마를 포함.

이나즈마 길드 전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 궁전 앞에 이열로 가지런히 늘어선 채로.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머리를 굴려봤다.

나를, 유스라 왕국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남태민에게 들은 정보가 있어서일까.

그 의도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러나.

“유감이지만.”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라야만 한다.

“나는 사전에 약속되지 않는 만남은 가지지 않는다.”

“……!!!”

누가 됐든.

어떤 사정이 있든.

격식과 절차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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