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57화 (172/489)

◈ 57화. 우리의 긍지가 일치하는군 (1)

─마왕 소환 의식을 저지하라. (진행 중)

●악마 군단장을 처치하라. (0/10)

조사를 마쳐서인가.

새롭게 떠오른 퀘스트 목표.

보고 있으니까 점차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막아서던 이유가 있었어.’

마왕 소환 의식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기 위해.

마왕군은 필사적으로 앞길을 막아서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보니까 마왕군이 우르르 몰려온 이유도 짐작됐다.

이렇게 빨리 방어선이 무너질지 몰랐던 거겠지.

“생존자를 신속하게 대피시킬 방법이 있겠는가?”

하르콘이 그림자 용병단에게 물었다.

“글쎄.”

글쎄?

그래서 방법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키치가 딴청을 피우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그러다가 다급하게 누군가를 불렀다.

“……알카리. 포탈, 포탈이 필요해. 히끅.”

알카리라면 내게 포션을 권하던 노인이었다.

포탈을 발현할 수 있다면 마법사 계열 클래스겠지.

‘포션 제조 쪽에 조예가 깊은 것 같던데.’

써먹을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한 번쯤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리께서 계셨기에 나서지 않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알카리가 내 눈치를 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나저나 내가 있어서 나서지 않았다니.

단단히 오해하고 있군.

‘물론, 발현할 수야 있겠지.’

마탑의 포탈만큼은 아니더라도.

나 또한 포탈을 발현할 수 있었다.

어떤 고위 마법이라고 한들.

그저 보는 순간.

탐색, 간섭, 발현의 과정을 깨달아 버리는 그랑펠의 재능이 있었으니까.

마력만 뒷받침되면 포탈을 발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마력을 아껴야 한다.’

방금 전 마왕군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마력을 소모해 버렸단 말이다.

누가 알았단 말이냐?

생존자가 이렇게, 그것도 적지 않게 있을 줄이야.

“……감사합니다. 기사님들.”

“아니. 우린 인사받을 처지가 아니란다.”

“또 고맙습니다. 모험가님……?”

나는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소녀를 바라봤다.

……제발 좀 겸손해라.

감사 인사를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지 말란 말이다.

나는 빳빳한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나머지는 전부 악마와 맞서 싸운 건가.’

숨어있던 생존자들은 전부 노약자들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가 불가능한 이들.

빠르게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킬 필요가 있겠지.

‘다만 혼란을 더할 필요는 없다.’

자신들이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생존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 눈치였으니까.

그들에게 안전하면서도 익숙한 장소라.

굳이 말하지도 않아도 한 곳밖에 없겠지.

“좌표는 유스라 왕국으로 설정하겠습니다.”

알카리가 눈치껏 포탈을 소환했다.

좌표 사이의 거리와 포탈의 이용자 수가 꽤 많았기에.

상당한 마력이 소모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카리가 포션을 물처럼 들이켰다.

하르콘이 예시카를 포함한 몇몇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그대들은 생존자들이 안정을 취한 뒤에 합류하도록.”

생존자들의 이동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이 또한 기여도로 측정되는 건가.

나는 반짝거리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

─현재 기여도 : 32,700p

──────

……엄청난 상승 폭이었다.

하르콘이 내게 말했다.

“경.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신속하게 결착을 짓고 다른 생존자들 또한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생존자들이 이 거리에만 있으리란 법은 없을 테니까.”

“나 또한 같은 생각이네.”

“이런, 내가 경에게 괜한 소리를 했군.”

착한 일을 하니 기여도가 따라온다는 걸 알았으니까.

반대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신속하게 결착…….

그러니까 마왕 토벌을 끝마쳐야 할 테지만.

‘마왕 소환 의식이라.’

나는 기억을 더듬어봤다.

스쳐 지나가는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의 말.

그러나 뚜렷하게 도움이 되는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악마라면 몰라도 마왕까진.’

무려 10년 하고도 2년 전.

시대적 배경이 다르단 소리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모든 의식엔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

[구마 의식]에도 악마의 아이템이란 제물이 필요하듯.

분명 마왕 소환 의식에도 제물이 필요하겠지.

‘……잠깐.’

그렇게 생각하니까 불현듯.

거리의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피와 시체가 끊이질 않던 거리.

나는 뒤를 돌아 다시 한번 그 참상을 바라봤다.

그건 마치 피와 시체로 그어진 하나의 선이었다.

“……!”

그 직선이 프로스트 중심가로 연결되어 있었다.

‘설마, 이 시체와 핏물이 제물이라는 건가.’

나는 그쯤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은 섣부른 추측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추측이 사실이 된다고 해도.

내 행동에 변함은 없겠지.

무릎을 꿇고 채 감지 못한 시신의 눈을 감겨줬다.

이들을 외면한 채.

마왕 소환 의식을 저지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래, 가슴 속 긍지가 그리 말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내 추측이 맞아떨어진다면…….’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오히려 저쪽이었다.

그야 시신을 수습하는 이 긍지 넘치는 행동이.

마왕 소환 의식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깽판을 치는 수준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유감이지만, 장단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

AAU.

지부는 바쁘게 움직였다.

마왕군의 등장.

확실히 거악 때와는 다른 상황이었으니까.

한국 지부, 성현준은 USB를 뒤졌다.

“제발. 제발. 뭐라도 좀 있어라……!”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코스모에서 사용하던 USB였다.

혹시라도 백업해 뒀던 작업 파일이라도 있을까.

성현준은 간절히 바라며 폴더를 뒤지기 시작했다.

“거악은 듣도 보도 못한 거였지만 마왕은 다르니까.”

선배, 윤수겸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자신의 업무 노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했다.

“……차, 찾았어요. 선배!”

“뭐? 어디 봐봐.”

“구체적인 정보는 아닌데. 여기 컨셉이요.”

“그래. 맞지.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었어!”

마왕.

먼 훗날 아르카나에 모습을 드러낼 보스 몬스터들.

그 시점은 정말 훗날이었기에.

찾아낸 백업 파일에서도 기본적인 콘셉트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어디란 말인가?

손가락만 빨던 거악 때를 생각하자.

“맞아. 컨셉은 현실에 존재하는 마왕에게서 따왔었지.”

그 콘셉트가 바뀌지 않았다면.

프로스트에 나타난 마왕 또한 현실.

그러니까 전설이나 설화 속에 존재하는 마왕이리라.

그나마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다행이다.”

“다행은 무슨. 그래서 문제는 마왕이 어떤 놈이냔 거야.”

“아, 그걸 알아내야 하는구나……!”

탁─!

성현준이 자신의 이마를 쳤다.

그때 윤수겸이 노트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도 찾았다.”

“어? 뭔데요, 선배?!”

“마왕 레이드 스테이지 구성 컨셉.”

스테이지 구성이라니.

그건 정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정보였다.

윤수겸이 쯧 혀를 찼다.

“근데 이것도 컨셉에 불과해서.”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이 컨셉은 남아있을 확률이 높아.”

“어디 봐요. 마왕 소환 의식?”

윤수겸이 확신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 끝에 익숙한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현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여도 시스템! 선배, 이거 설마?”

“맞아. 진행 중인 퀘스트에도 기여도 시스템이 있지.”

“근데 그 퀘스트는 프로스트 탈환이 목표잖아요.”

“그래, 근데 크게 보면 말이야.”

윤수겸은 모니터에 프로스트의 지도를 띄웠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대도시, 프로스트.

윤수겸이 프로스트의 성벽을 따라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어쩌면 프로스트를 탈환하는 게 마왕 소환 의식을 저지하는 것과 똑같이 취급될지도 몰라. 왜, 프로스트 도시 전체를 마왕 소환 의식 장소라고 생각하면 말이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성현준은 다시금 윤수겸의 노트를 살폈다.

그러자 그 말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성현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플레이어들의 프로스트 탈환 퀘스트 진행도에 따라서 마왕 소환 의식이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거네요? 선배 말은?”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거야.”

“만약, 마왕 소환 의식이 성공하면……?”

“거악 때처럼.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기적은 흔히 일어나는 게 아니기에 기적이라 불린다.

게다가 거악과 다르게 마왕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성현준이 한숨과 뒤섞인 말을 내뱉었다.

“누구든 기여도 좀 팍팍 따줬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현재 기여도 선두가 누구야?”

“음, 공개한 플레이어 중에선 천하통일이요.”

딸깍─

성현준이 말을 이었다.

“천하통일 마스터, 류오쥔춘. 기여도 1,800.”

“……천팔백?”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 수치를 확인하니 어째 불안감이 더욱 심해졌다.

덜덜덜.

윤수겸이 다리를 떨다가 다시금 물었다.

“그럼 공개 안 한 플레이어들까지 예상한다면?”

“……그렇다면 역시 이호열이겠죠?”

“그래, 이호열이 아니면 그건 정말 중대한 버그다.”

이호열의 활약!

그건 개발자의 시점에서 봐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지막지한 내구도를 자랑하는 프로스트의 성벽을 단숨에 무너트리질 않나.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그림자 용병단.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그들을 지휘하질 않나…….

“지금쯤 어디까지 전진했을까요?”

프로스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그 탓에 프로스트에 진입한 호열의 모습을 촬영하긴 어려웠으니까.

호열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는 VBC의 화면에도 연기만 찍혀있을 정도였다.

윤수겸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야 모르지.”

다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우린 우리가 할 일을 다 하는 수밖에.

윤수겸이 이내, 말을 이었다.

“계속 지켜보자고. AAU 체면이 있지. 적어도 마왕의 정체는 밝혀내야 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월급 루팡 소리 들을 수도 없잖아?”

“그래도 이호열이라면 5천 포인트 정도는 땄겠죠? 에이, 아무리 그래도 5천은 너무 많나? 그럼 한 3천 포인트라도……?”

“어허. 지금 그런 거 생각할 때야?”

*

내 추측이 맞는다면.

가파르게 상승하는 기여도만큼.

──────

─현재 기여도 : 50,900p

──────

마왕 소환 의식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추측은 확신이 됐다.

“……뭔가 큰 게 날아오는데? 아, 겁나 귀찮아.”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네, 저건.

어쨌든 그림자 용병단이 아니던가.

성격을 떠나 그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집단.

그가 잘못 봤을 리는 없겠지.

그나저나.

‘……날아오고 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래, 쫄려서 뒈지시겠나 봐?’

뛰는 것도 아니고 날아올 정도면 말이야.

마왕 소환 의식이 방해를 받아서 똥줄이 타고 있다는 거겠지.

머리를 굴린 보람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뭐야, 저거.

비유가 아니라 진짜 날아오고 있다는 뜻이었잖아?!

펄럭─!

날갯짓 소리.

그와 동시에 걷히는 프로스트의 매캐한 연기.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새였다.

지옥에 사는 새가 있다면 저렇게 생겼을까, 싶을 정도로.

그 생김새가 없던 조류 공포증까지 생기게 할 정도였다.

녀석의 붉은 동공이 이쪽을 응시했다.

직감할 수 있었다.

저 거대한 새가 악마 군단장이라는 것을.

─마왕 소환 의식을 저지하라. (진행 중)

●악마 군단장을 처치하라. (0/10)

점멸하는 퀘스트창이 그를 증명했다.

그래, 저런 녀석을 10마리나 처치해야 한다는 거지?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나뿐만 아니었다.

누구보다 악마 군단장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던.

하르콘이 있었으니까.

“폐하.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고오오─

검기를 발산하기 시작한 하르콘의 검.

그런 하르콘의 검이 이제까진 볼 수 없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검기(劍氣).

성장할수록 짙어지고 고유의 빛을 띤다고 했었던가.

‘그 경지까지 올라섰구나.’

그랑펠의 재능.

덕분에 나는 하르콘의 성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마음이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내 전우가 저렇게나 강하다.

물론, 지옥 악마 군단장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내려오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겠지.

허나, 생각처럼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하르콘에게 날개를 달아줄 순 없어도.

계단을 놓아줄 순 있거든 내가.

다만, 그전에 녀석의 움직임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저 날개를 꺾기 위해 적합한 마법.

그러면서도 마력을 최대한 아낄 수 있는…….

내가 마법을 선정하던 와중이었다.

쿠르릉─!

스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일순간 하늘이 어두워졌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고.

먹구름이 드리웠다.

‘……이건.’

그 먹구름 속에서 지직거리는 뇌전(雷電).

이건 이전에도 본 적이 있던 마법.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스킬]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제시 하인네스.”

그에 화답하듯.

[천벌]이 악마 군단장.

녀석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지지지지직─!

그 위력이 아스큐라 백작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악마 군단장에게 원한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마력의 소모량 따윈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더없이 감정적이고 거친 발현이었다.

나는 뻔뻔하게도 그 스킬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군.”

……부족하긴 개뿔.

정작 부족한 건 내 레벨이거늘.

그렇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나도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수 있단 말이다.

나는 곧바로 계단을 발현했다.

“경. 폐하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겠네.”

이내, 하르콘이 계단을 밟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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