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55화 (170/489)

◈ 55화. 심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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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여도 : 11,6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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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포인트 돌파.

마찬가지로 비교 대상이 없어서 얼마나 높은 건지.

알 방법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말이야.

그쪽 기여도는 몇이냐고.

곁에 있는 플레이어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

하지만 사사로운 공적에 연연하지 않는 것 또한 그랑펠의 긍지였으니.

“고작 쓰레기를 치워냈을 뿐이거늘.”

그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기여도라니. 당치도 않구나.”

이렇게 말을 내뱉는 게 감상의 전부였다.

그렇다.

이 또한 지극히 당연하시다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자.

‘아니, 억울해서라도 자화자찬을 좀 해야겠다.’

상승한 기여도로도 알 수 있듯.

나는 버스의 승객으로서 역할을 다해낸 셈이었다.

내가 발현한 계단 덕분에 성벽 위를 점거한 플레이어들.

그들은 원거리에서 확실하게 아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견제는 말할 것도 없겠지.’

지원을 넘어선 선제공격까지.

‘나머진 뭐 더없이 익숙한 거니까.’

방벽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쯤이야.

내겐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발현이었으니까.

그런 나의 보조를 받고 있는 게 누구던가?

“경의 도움으로 한결 움직임이 편해졌군!”

그러니까 나는 뻔뻔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

‘버스 요금은 확실하게 냈다고.’

결코, 날로 먹지 않았단 것이다……!

또각─

그러니까 프로스트에 입성하는 지금 순간에도.

나는 먼지 한 톨.

피 한 방울 뒤집어쓰지 않았단 소리였다.

그런 나의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프로스트’에 진입하셨습니다.]

북부도시에서 지옥으로 떨어져 간다.

그 수식어가 바뀔 만큼.

프로스트는 참혹한 풍경이었다.

거리 곳곳에 경비병들의 시체가 널려있었고.

사방이 피로 흥건했다.

“……빌어먹을.”

그 참상에 하르콘을 비롯한 라이언 하트 기사들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중에서도 몇몇 기사들.

그들이 바득바득 이를 가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올 정도였다.

하르콘이 차디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도시인 프로스트인만큼. 우리 기사단에도 프로스트가 고향인 이들이 적지 않다네.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긴 쉽지 않겠지.”

과연, 억누르고 있는 게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정말이지 잔혹한 풍경이었으니까.

‘가상현실 게임 같은 게 아닌 현실이다.’

널브러진 시체는 더 이상 NPC가 아닌.

프로스트의 주민.

피에 젖은 거리.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까지.

이 모든 게 진짜, 현실이란 것이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구역질을 참지 못했겠지.

저기 보이는 플레이어들처럼.

“……잠깐, 나 속이 안 좋아. 우웩.”

“너무 무리하진 마.”

“꼭 이럴 필요까진 없는 거잖아……. 씨발!”

시체는커녕 고기 핏물을 빼는 데에도 인상을 구기던 게 나였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긍지가 있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굽혀지지 않는 그랑펠의 긍지가.

그건 이러한 참상 앞에서도.

헛구역질을 한다거나.

눈가를 찌푸린다거나.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말했다.

“시신을 수습하지.”

시신을 수습하겠다.

나의 말에 하르콘이 짐짓 놀라 되물었다.

“시신을 수습하다니……. 경, 진심인가?”

하르콘뿐만 아니었다.

빤히─

키치를 비롯한 그림자 용병단은 내게 미친놈 보듯 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나도 나 자신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니까.

‘언제, 어디서 마왕군이 달려들지 모르는데 말이지.’

프로스트는 그 초입부터 건물로 가득했다.

건물, 건물마다.

골목, 골목마다.

매복한 마왕군이 기습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란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체를 수습한다?

정말, 죽고 싶어 미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한두 번도 아니었으니까.

모든 건 이 빌어먹을 놈의 긍지 때문이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는 고귀하다. 상대가 누구든 그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의 자긍심은 더없이 무거우며 흔들리는 일이 없다. 그 무게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 그 긍지가 말해주고 있었다.

프로스트를 지켜가다 전사한 이들.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긍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긍지에 어긋나는 일?

설령 가라앉아 익사해 버리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긍지를 거스를 수 없겠지.

그러나.

‘……내가 얌전히 가라앉아 죽을 것 같아?’

말했다시피 한두 번이 아니었다.

쥐뿔도 없이 아스큐라 백작 앞에 섰을 때도.

심지어는 그 대단하시다는 거악 앞에서도.

나는 죽다 살아난 경험들이 있기에.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였다.

건물에 기댄 채 숨을 거둔 프로스트의 병사에게 다가갔다.

아직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병사의 눈을 감겨줬다.

“그대의 긍지는 내가 이어받도록 하지.”

그래, 가라앉힐 수 있다면 가라앉혀 봐라!

나는 누구보다 발버둥 치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으니까.

그런 나의 행동에 하르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 하트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널브러진 시신을 고이 눕히고.

채 감지 못한 그들의 눈을 감겨줬다.

그러던 중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투구를 써서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집무실에서 발버둥 치던 나를 호위하던 예시카였다.

“……그리고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정말로.”

예시카는 투구 밑에서 울먹이고 있었다.

‘……뭘, 죄송하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내 뒷담화라도 했나.

그런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왜, 상사 때문에 퇴근 못 하는 그 기분.

‘나도 잘 알거든.’

그래도 내가 또 눈치 하나는 괜찮은 편이었다.

나는 곧장 깨달았다.

예시카의 고향이 프로스트라는 사실을.

물론, 악마에게 소중한 것을 잃은 심정을.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랑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감정에 치우치지 말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니까.”

……그냥 좀 위로해 주면 어디 덧이라도 나는 거냐.

이럴 때마다 과거의 나.

그랑펠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어진다.

세상 사람들이 말이야.

다 너처럼 초인적인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아느냐고 말이야.

다행히도 예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하르콘의 정신론 교육이 효과가 있던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던 찰나.

“……!”

문득,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잠깐 뭐야, 이거?

*

열 개의 성문.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공성전.

“……됐다!”

“그래, 양심이 있으면 열려야지. 새끼들아!”

“쏟아부은 포션이 몇 병인데!”

뚫릴 기색이 없던 성문이 드디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호열이 공략해 낸 성문을 제외하면 그 속도는 전부 엇비슷했다.

“미친, 저 새끼들 포스 장난 아닌데?”

마왕군이 무너진 성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똑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성벽 위 플레이어들의 존재.

“……잠깐, 저거 플레이어들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저길 어떻게 올라간 거지?”

“설마, 벌써 다른 쪽에서 넘어온 건가?!”

그랬다.

호열이 발현한 돌계단.

그들은 그 돌계단을 올라 성벽 위를 점령한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이 성벽 위를 달려 다른 지역 성문에 도달.

마왕군 제압을 돕기 시작했다.

“역시 옮기길 잘했다, 그치?”

냉정한 사회.

당연하게도 거기엔 남을 돕기 위한 마음은 없었다.

모든 건 각자의 경험치와 기여도를 위해서였다.

“콩고물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 게 바보였지.”

“진짜로. 거긴 차원이 다르다니까? 봤지, 너도?”

“사냥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어. 그냥.”

호열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리고 그림자 용병단까지.

그들이 가는 곳엔 숟가락을 얹을 곳조차 마땅치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차라리 다른 성문 쪽으로 넘어가자고.

슉슈슉─!

그런 플레이어들의 지원 사격.

그건 마왕군의 대열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모자라.

“……생각보다 적지 않아?”

예상했던 것보다.

뛰쳐나온 마왕군의 머릿수가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호열. 그쪽으로 병력을 집중시킨 거야.”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졌다.

이건 기회였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에.

여태껏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던 샤이닝.

머리를 굴리던 록스가 판단을 내렸다.

“빠르게 프로스트 중심부까지 전진하자.”

“오케이~ 저쪽한테는 약간 미안해지네.”

“미안하긴 개뿔. 우리 챙기기도 바쁜 상황에.”

“……근데, 우리 공주님은 또 어디 갔어?”

활시위를 당기던 카밀라가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스킬을 쏴대던 제시가 보이지 않았다.

록스와 드미트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제시가 멋대로 사라지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지.

이호열,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사라졌다라.

“으음……. 난 왠지 알 것 같은데~?”

하지만 카밀라는 입을 다물었다.

미쳤다고.

제시한테 미움을 사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

.

.

호열 쪽으로 마왕군의 병력이 집중됐다.

그 소식은 누군가에겐 기회.

누군가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

가온과 버서커.

유스라 왕국을 완전히 비워둘 수도 없는 일.

그 탓에 분산된 전력에 본의 아니게 공동 전선을 펼치던 두 길드였다.

“……뭐라고?”

“이런 씹.”

남태민, 레오니는 동시에 멈춰 섰다.

예상보다 수월하게 프로스트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게 전부 호열 덕분이었다니…….

레오니가 빠득─ 이를 갈았다.

“빠져서 미안한데. 내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레오니는 곧장 호열 쪽으로 합류할 생각이었다.

……걱정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아니, 절대 아니지.’

어디 호열이 누군가에게 걱정을 받거나 도움을 받을 위인이란 말인가?

이건 단순한 고집이었다.

더 이상 받기만 할 순 없다는 내 자존심.

“나는 무조건 찬성이야. 언니.”

“그 결정, 그 결심 끝까지 응원해.”

“닥쳐 그냥.”

남태민도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호열 씨 쪽으로 합류한다.”

호열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

거기에 그림자 용병단까지.

그들의 수준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물량에는 장사가 없는 법.

큰 도움은 될 수 없을지라도 머릿수를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두 길드의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결국, 남태민이 걸음을 멈췄다.

“먼저 가. 곧바로 뒤따라갈 테니까.”

무너진 프로스트.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

남태민은 말없이 시체를 수습했다.

혹시라도 아는 얼굴이 있을까, 걱정하면서.

그 끓어오르는 분노를 곱씹으면서.

그런 남태민의 퀘스트창 또한 점멸하고 있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클래스 퀘스트 : 야성의 증명]

“……!”

두 차례씩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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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여도 : 3,3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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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시체를 수습했을 뿐인데.

기여도가 상승했다.

이거, 상승한 기여도가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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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여도 : 19,6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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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했다.

착하게 사니까 복이 오기도 하는구나……!

당연하게도 기여도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울며 겨자 먹기.

육체를 지배하는 긍지 때문에 했던 미친 짓이었단 말이다.

‘기대를 안 해서 그런가.’

뭔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색은 없었다.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림자 용병단.

단원 중 하나가 지붕 위에서 말했다.

“아주 그냥 대놓고 몰려오는데. 젠장, 귀찮아졌잖아.”

그저 시체의 눈을 감기고.

바닥에 눕혔을 뿐이거늘.

그럼에도 시간이 지체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탓에 마왕군의 후속 병력이 몰려들고 있는 거겠지.

이내, 시야에 들어온 마왕군.

개성이 없던 [마왕군 보병]과는 외관부터 달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추가 업데이트 내역을 통해 확인한 녀석들의 레벨.

[마왕군 마물 기병 : Lv.400]

[마왕군 백인대장 : Lv.420]

[마왕군 투사 : Lv.420]…….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녀석들은 내가 얼마 전 사냥한 백이설.

아니, 서큐버스보다 나약한 악마라는 사실을.

‘그래서 머릿수가 어쨌다고?’

그 물량 또한 상관없었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

내겐 『마법』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너라.

나의 경험치, 기여도들아.

물론, 건물로 가득한 전장은 비좁고 복잡했다.

아군은 물론, 자칫하면 건물이 붕괴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조차도 내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흐트러진 [행커치프]의 모양새까지도.

“낭비할 시간은 없다. 단숨에 끝내도록 하지.”

그래,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스탯, [심미]의 효과를 확인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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