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프로스트 (3)
AAU.
플레이어들 못지않게 충격에 빠진 게 그들이었다.
세계 각국의 지부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프로스트가 함락됐을 줄이야.
그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일단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고요. 이걸로 확실해졌어요. 현실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아르카나 월드 쪽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게 말이죠.”
그 말인즉슨.
아르카나가 단순한 게임이 아닌.
아니, 과거엔 게임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젠 또 다른 세계가 됐다는 걸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그건 그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건……!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다들 프로스트가 어떤 도시인지 알고 있잖아?”
“……제국 수도성과 맞먹을 정도의 공성전 난이도.”
“그래!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소리야. 악마 새끼들이 대체 어떻게 프로스트를 함락시킨 거지? 시간의 흐름을 생각해 봐도 물리적으로……?”
잠깐, 시간의 흐름?
아뿔싸.
왜 시간의 흐름이 똑같다고 생각했을까!
불현듯 설정이 떠오른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달라……!!”
“뭐? 그게 뭔 소리야?”
“젠장, 까맣게 잊고 있었어. 현실의 하루가 아르카나의 나흘이라는 걸!”
현실의 24시간. = 아르카나의 96시간.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남아있던 설정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단순한 설정을 간과하고 있었다.
“……현실보다 시간이 4배 빠르게 흐른다? 그럼 말이 맞아떨어져요.”
“악마 새끼들이 갑자기 강해진 게 아니었다고?”
“빌어먹을, 그럼 프로스트가 함락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거잖아?”
듣고 있던 모두가 순간.
끔찍한 가능성에 도달했다.
“……그럼 현시점에서 아르카나 월드는 대체?”
드높은 성벽을 자랑하는 프로스트조차 무너졌다.
작은 마을, 도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곳곳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인류의 반격은 뭐가 인류의 반격이야. 대체……!”
아르카나 월드가 악마에게 짓밟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악마들이 아르카나 월드도 모자라 현실로 업데이트되고 있다는 것.
AAU는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플레이어들이 악마에게 함락된 프로스트를 재탈환할 가능성은 얼마나 된다고들 봐?”
“……불가능해.”
“최소 600레벨이라고 봤어. 랭커 플레이어들이 프로스트의 영주 자리를 눈독 들일 수 있는 시점을 말이야.”
그런 프로스트가 처참하게 무너졌다는 건.
프로스트를 함락시킨 악마들이 600레벨.
그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런 악마족 몬스터를 현시점의 플레이어들이 쓰러트린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AAU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잠깐만.”
호열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상황실.
벽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에 떠오른 호열의 모습.
흩날리는 눈과 같은 색의 머리칼.
이번에도 정장과 구두.
그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
그 모습은 첫 등장부터 한결같았기에.
그것만으로는 놀라지 않았다.
그래, AAU가 놀란 이유는 호열의 뒤를 따르는 NPC.
아니, 아르카나인들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다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었다.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들의 설정상.
아무리 관계도를 쌓는다고 하더라도 기사단 이끌 순 없을 텐데……?
플레이어에 불과한 호열이 어떻게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한 번도 아니고 연달아 이끌고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이었거늘.
“……그, 그림자 용병단!”
그림자 용병단.
그들까지 호열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저 흑막들이랑도 관계도를 쌓았다고……?”
흑막(黑幕).
그림자 용병단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야 간단하다.
지금까지야 검은 장막 뒤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들은 후반부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래, 굳이 비교하자면 그들은 마탑과 비슷한 위치를 가졌다.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그 영향력은.”
“제국을 넘어 대륙을 흔들 수 있을 정도, 라는 설정이었지?”
“플레이어가 현시점에서 그 진가를 알긴 힘들 텐데……? 물론, 말도 안 되게 비싼 의뢰비 때문에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겠지만.”
“하하…….”
순간, 터져 나오는 헛웃음.
“마탑, 라이언 하트, 이젠 그림자 용병단까지?”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런 헛웃음이라도 뱉을 수 있다는 것.
그건 숨통이 트였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벌써부터 낙담하긴 이르단 소리였다.
호열의 등장으로.
AAU.
그들의 결론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일단, 차분하게 지켜보자고요. 이호열의 행보를……!”
*
모든 것엔 사정이 있다.
“으으, 추워.”
“나약한 소리 하지 말게, 키치 양. 우리에겐 프로스트 탈환이라는 사명이 있는 것을 명심하게.”
“네에~ 알겠습니다. 근데 추운 걸 춥다고도 못하나? 으으, 유스라 왕국이 따뜻하고 햇빛도 잘 들어서 딱 좋았는데…….”
내가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리고 그림자 용병단과 함께 프로스트에 나타난 것에도.
전부 사정이 있다는 말이다.
.
.
.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나는 하르콘과 프로스트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제국 최강의 기사단, 라이언 하트.
그 기사단장인 하르콘이 아니던가.
당연하게도 공성전에 대한 경험도 풍부하겠지.
대충 공성전 팁 같은 거라도 얻을까, 싶어서.
그런데 하르콘의 반응이 의외였다.
“……프로스트가 함락됐다니? 경, 그게 사실인가!”
하르콘이 현실로 업데이트된 시점.
그 시점이 바로 프로스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 원정을 나서던 시점이었단다.
천하의 하르콘이 분에 못 이겨 이를 갈았다.
“경, 내가 그 악마 군단장을 처리하지 못해서 이 사달이 벌어졌다는 것 아니겠는가! 하다못해 내가 폐하의 마지막 명이라도 제대로 수행해 냈다면……! 프로스트는……!”
악마 군단장이라.
‘내가 마왕군 조직도까지 알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클래스 퀘스트.
마왕 토벌과 관련된 놈이라는 게 그 이름에서부터 물씬 느껴진다.
이거 잘하면 날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됐다.
‘악마 군단장, 녀석의 정보를 알 수 있으면…….’
미리 대비할 수 있으니까.
왜, 지금만 하더라도 대비할 게 많았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구마의식] 발동을 위한 악마의 아이템 구매겠지.
마탑에서 지출을 아낀 만큼 철저한 대비가 가능하단 것이다.
청렴결백하게 산 보람이 느껴진다.
그런데.
“경. 우리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함께 하겠네.”
……이거 내 기대치를 한참 넘어선 말이 돌아왔다.
하르콘의 눈빛은 결연했다.
“폐하의 마지막 명은 악마 군단장을 토벌하라는 것이었으니까. 폐하께서 그 명을 거둬들이실 때까지. 우리는 이 세계의 악마 군단장을, 아니 악마를 토벌할 생각이네.”
하르콘이 말을 이었다.
“경과 우리의 뜻이 일치한다는 소리겠지.”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내 뜻이 무엇인가?
바로 클래스 퀘스트의 클리어.
‘퀘스트를 도와준다는 거 아니야, 이거? 그것도 계속해서!’
이보다 든든한 지원군이 또 있을까.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세라.
나는 하르콘에게 곧바로 대꾸한 것이다.
“그대의 긍지를 존중하겠네. 하르콘 경.”
.
.
.
그것이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함께하게 된 사정.
그림자 용병단의 사정?
거기엔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까라면 까야겠지.’
나와 그림자 용병단.
관계는 그 시작부터 철저한 갑을 관계였으니까.
단장, 키치와의 첫 만남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히끅─”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제가 괜히 그 찔리는……. 아니, 흠칫해서요.”
왜, 시작부터 날 보더니 딸꾹질을 해댔었거든.
나는 키치의 자기소개를 듣다가 냉랭하게 말했다.
“이곳, 유스라에서 새 출발을 하고 싶다는 것인가?”
그림자 용병단.
그저 돈이 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해왔다.
키치는 그렇게 자신들을 변호했다.
“……하하, 그렇죠?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네요. 히끅.”
그 말은 사실이었다.
수소문하지 않고 검색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의뢰비가 겁나게 비싼 용병단이다.
그 어떤 의뢰라도 처리해 줄 정도로 강하다.
다만 그 어떤 의뢰도 맡기기 싫을 정도로 가성비가 구리다.
“허나, 유감이군.”
알려지지도, 평가가 나빠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돈에 움직인다?
“나는 그대들과 같은 이들을 싫어한다.”
청렴결백 그 자체.
그랑펠에게 있어선 그보다 긍지 없는 족속이 또 없었으니까.
하쿠나가 어째서 이들에 관한 판단을 자신에게 부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히끅!”
오해는 금물이다.
저건 우는 소리가 아니라 딸꾹질 소리였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도 딸꾹질 때문이란 말이다.
물론, 설령 눈물을 보였다고 한들.
그랑펠이 눈물에 흔들릴 위인이 아니시다.
그러나.
“하지만 그 다짐을 믿어보겠다.”
“히끅? 네?! 다짐이라뇨?”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것.”
스왁─!
나는 그들의 서류에 거침없이 서명했다.
“그대들이 긍지를 찾아낼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그때 키치는 감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그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겠지.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그림자 용병단에게 선언한 것이다.
“그대들의 다짐을 증명할 기회다.”
그래, 그림자 용병단을.
마왕 토벌에 반강제로 끌어들였다.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유스라 왕국이었으니까.
‘빨대를 꽂고 싶으면 그 가치를 증명하란 말이다.’
키치는 말꼬리를 흐렸다.
“돈도 안 되고 위험하기만 한 의뢰네요……?”
과거엔 상상도 못 했던 제안이겠지.
하지만 그 과거는 버린다고 했으니까.
결국, 새 출발을 위해선.
“……그래도 할게요. 아니, 해야죠. 아니, 하겠습니다. 아니, 맡겨만 주세요. 히끅!”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또 조직 사회에 능숙하거든.
.
.
.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자발적으로.
키치를 비롯한 그림자 용병단은 반강제적으로.
그것이 내가 그들과 함께 프로스트에 나타난 사정.
그런데 한 가지 사정은 간과하고 말았으니.
‘왜 하필이면……!’
이번에도 러시아가 코앞인 북해도란 말이냐?
패딩은커녕.
코트 한 벌 걸치지 않은 나의 차림새.
나는 그저 현지 사정이 원망스럽다…….
.
.
.
그러나 뼈에 사무치는 추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현실에 나타난 지옥.
불길이 치솟는 프로스트.
그 주변은 한기는커녕 열기로 가득했으니까.
하르콘은 감정을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드시 탈환하고 말겠습니다, 폐하.”
프로스트와는 큰 관련이 없는.
나조차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거늘.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심정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그러나 제국 최고의 기사단.
그들이 적을 앞에 둔 채.
감정에 휘둘릴 이들이 아니었다.
“경, 저곳에도 생존자는 있겠지?”
기사도.
지킬 것이 있을 때 그들은 더욱 강해지는 법.
두근두근─!
사자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 악으로부터 프로스트를 탈환한다!”
함성과 함께 치솟는 사기.
‘……저런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앞으로도 내 클래스 퀘스트를 돕는다는 거지?’
나보다 뒷배가 든든한 사람이 또 없을 거다.
그런 용맹한 사자 심장의 기사들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하르콘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경. 무엇보다 프로스트의 진입하는 것이 최우선이네.”
나도 동감이었다.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악마들의 왕.
그들의 마수가 뻗쳐오기 시작한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의 왕좌를 무너트려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북부도시 프로스트를 조사하라. (진행 중)
퀘스트의 최우선 목표 또한 프로스트의 조사였으니까.
일단, 저 굳게 닫힌 프로스트의 성문을 여는 게 순서다.
그게 아니라면 성벽을 무너트리든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막막한데 이거?’
이거야말로 공성전이 아니던가?
그것도 아스큐라 백작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진짜 공성전!
공성전에서 수성 측이 유리한 건 상식이었다.
‘결국, 악마니까 함락시킬 수 있던 거겠지.’
그야 악마에겐 상태이상이 있었으니까.
정정당당하게.
공성전을 통해 프로스트를 함락시킨 게 아니라 비열한 수작을 부렸을 게 뻔했다.
그런 주제에.
자기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있다라.
“심히 건방지구나.”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공성전에 있어서.
성문 혹은 성벽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건 공성 무기.
그저 프로스트를 날려버리는 게 목적이었다면.
사실 폭격기를 띄우는 게 가장 효과적이겠지.
‘균열처럼 접근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
이것이 현대 문명의 힘이다.
어떠냐 악마 놈들아.
조금은 우쭐댈 수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생존자가 있어요!”
“뭐, 정말이야? 어디 봐봐.”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 같은데요? 아니, 이미 죽은 건가?”
“이 악마 새끼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
상공의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로는 안쪽엔 확실히 NPC.
아니, 아르카나인들이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들의 생사를 알 순 없다만.
폭발에 휘말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미사일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위력을 섬세하게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
당연하게도 그 무언가는 『마법』밖에 없겠지.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마왕.
프로스트에서 흘러나오는 녀석의 악기(惡氣)는 성벽 밖의 내게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했으니까.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탐색, 간섭, 발현.
신속하게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
나는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
마법을 발현했다.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
나를 포함한 이 자리,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