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프로스트 (2)
고작 몇 시간이나 지났으려나.
설령 ‘마왕’을 데려온다고 하더라도.
이 당당한 태도엔 조금의 변함도 없을 거라고.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말이 아니라 생각조차 씨가 되는구나, 진짜.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악마들의 왕.
그들의 마수가 뻗쳐오기 시작한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왕좌를 무너트려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북부도시 프로스트를 조사하라. (진행 중)
점멸하는 퀘스트창을 응시했다.
악마들의 왕이라니.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그 마왕이 맞는 모양이다.
‘찬물, 아니 이 정도면 얼음물을 끼얹는 거잖아.’
아무리 반전을 좋아해도 그렇지.
유스라 제도 때부터 선을 넘는 업데이트다, 정말.
다 떠나서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 분위기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오랜만에 NPC들 볼 생각하니까 반갑네ㅋㅋㅋㅋ
-마스코트 말론 등장ㅋㅋㅋ
-말론? 그게 누구임?
-말론을 몰라? 츤데레 대장장이 하나 있음
-별명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지? 아마?ㅋㅋ
프로스트가 등장한다.
그 사실에 들뜬 커뮤니티였다.
하지만 나는 퀘스트 내용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프로스트는 플레이어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마왕과 관련됐으니까.’
마왕(魔王).
내겐 가깝고도 먼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야 아르카나가 가상 현실 게임에 불과하고.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시절.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 NPC들은 늘 그렇게 말했다.
-마왕, 녀석들이야말로 우리의 숙적이라 할 수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덕분인가.
마왕에 대한 정보는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나는 깃털 펜을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 거라.”
마왕이 듣는다면.
어이가 없어 할 대사도 잠깐.
나는 그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펜을 움직였다.
──────
1. 마왕은 일반적인 악마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2. 마왕은 하나, 둘이 아니다.
3. 그 마왕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
──────
더 많은 것을 적어봤지만…….
세 줄 요약하자면 이게 적절하겠지.
적어놓고 다시 보니까 더욱더 막막하다.
‘반격이 시작된 게 아니라.’
본격적인 고생길이 시작된 거 아니야, 이거?
한마디로 마왕은 악마족의 보스 몬스터였다.
그러니까 대충 그 레벨을 생각해 보자.
일단, 아스큐라 백작하곤 그 앞 자릿수부터 다르겠지.
‘그렇다면…….’
비교 대상은 거악, 칠죄종 탐욕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된 예상이 될 순 없었다.
그것은 악마 사냥꾼의 직감으로 깨달았던바.
‘칠죄종 탐욕, 녀석은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어.’
녀석에게서 보였던 어린 악마의 모습.
그렇게 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확실히 녀석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랐단 소리다.
내 기억에 따르면.
거악은 마왕보다도 높은 서열의 존재들이었으니까.
내가 말이야.
거악을 쓰러트렸다고 괜히 호들갑을 떨었던 게 아니란 말이다……!
고심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스슥─
한 줄로 덧붙이는 마왕에 대한 평가.
──────
허나, 내겐 하찮은 악마에 불과하다.
──────
그렇다.
상급 악마가 됐든, 마왕이 됐든, 상관없다.
‘……사실 거악이 전리품이라도 떨어트렸으면.’
마왕보다 강하다는, 그 대단하시단 거악이시다.
그 전리품의 수준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겠지.
아니, 거악의 전리품은 고사하더라도.
하다못해 클래스 퀘스트가 보상이라도 줬으면……!
‘뭐, 조금 더 자신감이 생겼겠지만.’
그러나 내 자신감 따위.
그랑펠의 긍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못했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왕을 자칭하며 비열하게 숨진 않으리라 믿겠다.”
그것은 경고였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마왕이여.”
결국,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무거운 긍지에 짓눌려 익사하지 않게 발버둥을 치는 것뿐.
제발, 내뱉은 말만 지키게 해주세요.
나는 간절하게 빌며 상태창을 열었다.
[행운 : 3]
그런 바람을 담아서.
행운에 1포인트를 투자하려다가 조금 더 썼다.
[행운 : 5]
아무리 미신이라고 해도 말이야.
마왕과 조우하는 마당에 숫자 4는 불길했으니까…….
.
.
.
피와 살 같은 내 2포인트……!
무려 2레벨의 가치란 말이다.
그런 내 처절한 발버둥이 닿았던 것인가.
행운은 이번에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마탑의 연구실.
나는 책상 위에 전송된 마도구, 아이템을 확인했다.
──────
[흡혈귀 백작의 오브] - 대여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 장신구 제작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 - 행커치프 제작
──────
대여를 승인한 오브를 제외.
책상 위엔 두 개의 아이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장신구로 제작을 의뢰했거늘.
과연, 요구대로였다.
나는 에메랄드로 장식된 반지를 집었다.
[정순한 에메랄드 반지]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00]
[효과 : 피격 시, 생명력 회복.]
[설명 : 특수한 제작 방식으로 제작된 반지. 명성 높은 대장장이라고 해도 에메랄드의 효과를 이 이상 끌어낼 순 없으리라.]
특수한 제작 방식.
그거야 마탑엔 대장장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제련, 가공, 구성까지.
그 모든 과정이 섬세한 마법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덕분에 최상의 효과를 끌어낼 수 있었던 거겠지.
‘……잠깐, 보통이 아닌데. 이거?’
짧디짧은 한 줄의 효과.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구체적인 조건이 붙지 않았단 소리였다.
쉽게 말해 맞으면 무조건 생명력을 회복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 생명력 회복 효과가 얼마나 될진 맞기 전까진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계속 포션을 먹는 상태와 다름없다.’
……이거, 기대 이상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시선.
나는 단정하게 접힌 손수건을 들어 올렸다.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으로 제작한 행커치프.
과연, 그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다.
은은하면서도 찬란한 빛.
보기만 해도 귀하신 물건이란 티가 난다.
“과연, 훌륭하군.”
그 정보를 확인하기도 전.
입에서 합격이 떨어질 정도.
그러나 그랑펠과 다르게 내게 중요한 건 그 효과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무려 ‘마왕 토벌’이라는 초대형 클래스 퀘스트를 앞둔 상태였으니까.
이내, 손수건의 정보가 떠올랐다.
[대작-비단잉어 비늘 행커치프]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00]
[효과 : 착용 시,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 모든 공격 회피 확률 상승 / 심미 스탯 개방]
[설명 : 더없이 희귀한 재료를 특수한 제작 방식으로 제작했다. 그 가치는 누구도 감히 평가할 수 없을 정도. 대작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으리라.]
……잠깐, 대작이라니!
대작, 아이템 앞에 그 호칭이 붙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말하기 힘들 정도.
그거야 대작 아이템은 아르카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대장장이들도 일생에 한 번 만들까 말까 하다니까.’
왜, 대작 아이템을 경매장에 내놓는 것만으로도 해당 경매장과의 관계도, 영향력이 최대치에 이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당장의 성능.
다른 효과들이야, 미리 확인했던 그대로였다.
남은 건 마탑조차 알아내지 못했던 [심미] 스탯의 효과.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손수건을 곧바로 재킷 가슴 쪽 포켓에 꽂았다.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심미 스탯이 개방됩니다.]
“!”
그와 동시에.
[심미]에 관한 지식이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나는 새롭게 떠오른 상태창을 보며 생각했다.
[능력치]
근력 : 38 / 민첩 : 42 / 마력 : 186 / 행운 : 5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0]
역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됐구나.
‘상중하로 구분된 거겠지.’
심미의 효과를 생각하면 이쪽이 합리적인 표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두 눈으로 효과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마탑의 연구실은 적절하지 않은 장소였다.
그리고 그 전에 끝내야 할 계산도 있고.
‘두렵다. 두려워.’
비용에 상관없이 최고의 결과물을 원한다고 했었나.
청렴결백은 개뿔.
‘그랑펠, 이 호구야!’
하지만 이미 지나간 마당에.
과거의 나를 원망해 봤자 뭣할까?
또한 나가는 돈이 있어야 들어오는 돈도 있는 법.
무엇보다 내겐 아직 확인하지 않은 유스라 왕국에 대한 보상금도 남아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끔찍한 계산서를…….
아니, 양피지를 확인했다.
수십, 아니 수백억이라고 해도 놀라지 말자.
다짐하면서.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
추신.
마탑은 수석 마법사 이상의 권한을 가진 마법사에게는 의뢰 비용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보다 심도 높은 연구로 보답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과연, 행운에 투자한 2포인트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고!
*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신규 업데이트.
북부도시 프로스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치가 포착된 순간.
이나즈마의 길드 마스터.
히사기 카즈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프로스트가 일본 북해도.
홋카이도 인근 해역에 나타난 것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모든 것을 뒤집을 기회가!
히사기는 전율했다.
그간 얼마나 모진 수모에 시달렸던가?
“길드 랭킹 5위라니. 히사기, 이건 수치네. 수치야!”
그래, 수시로 변동되는 게 길드 랭킹이었으니까.
그저 순위가 떨어졌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나즈마의 위에.
그것도 두 계단이나 위에.
“……가온 그 무식한 새끼들이!”
대한민국의 가온이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금 상황을 뒤집을 기회가 왔다.
위이이잉─!
홋카이도로 향하는 전용기.
히사기는 스마트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모든 게 우리 이나즈마의 편이다.’
그야 프로스트가 일본, 홋카이도에 나타났으니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도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걸었다.
프로스트가 홋카이도에서 포착된 순간.
치밀하게 작전에 돌입했다.
타국의 길드가 먼저 프로스트에 접근하지 못하게 번거로운 절차를 내세운 것이다.
‘물론, AAU 협약 위반이다.’
AAU 협약에 따르면.
일본 정부에게 플레이어를 막아설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뒤따를 사회적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이나즈마에게 우선적인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다.
‘반드시 조국에게 보답한다.’
비밀리에 홋카이도에 착륙한 전용기.
세차게 몰아치는 북풍.
히사기가 이나즈마 길드원들을 이끌었다.
“으으, 추워. 이래서 홋카이도가 싫다니까.”
“너, 그거 돌려서 지역 비하한 거지? 이래서 교토 사람은.”
“……뭐야. 지역 비하는 네가 한 거 아니야?!”
“다들 조용.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인다.”
이나즈마가 단독으로 프로스트에 진입하는 것도.
일본 정부가 다른 플레이어들을 막아서는 것도.
전부 프로스트에 위험 요소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발목 잡기도 오래가진 못하겠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한두 시간.”
타국도 프로스트의 가치를 알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신속하게 프로스트의 관계도, 영향력을 확보한다.”
그러니까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온, 그 녀석들보다 앞서는 것.
히사기는 미리 파악해 둔 정보를 떠올렸다.
‘남태민은 프로스트에서 영향력이 가장 높은 플레이어 중 하나다.’
남태민의 클래스는 야만전사, 바바리안.
바바리안은 프로스트 인근 숲에서 전직 가능한 클래스였다.
그런 바바리안 클래스 랭킹 1위가 바로 남태민이었다.
‘프로스트에서 클리어한 퀘스트가 많을 수밖에 없겠지.’
개인으로는 남태민을 따라갈 순 없을 터.
하지만 길드 차원으로 보면 다르다.
히사기는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가온은 유스라 왕국에 많은 것을 투자했다.’
프로스트에 과한 관심과 투자를 할 순 없는 게 당연하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절호의 기회였다.
히사기의 뱀눈이 번뜩였다.
‘우린 다시 가온 위로 올라선다!’
그러나 그 결심은 곧바로 무너져 버렸다.
“……뭐, 뭐야 저게?”
높게 솟은 프로스트의 성벽.
그 성벽 위로 얼핏 보이는 무언가.
길드원 하나가 스킬, 천리안을 발동했다가 기겁했다.
“머, 머리예요! 사람 머리예요, 저거……!!”
“뭐가 저렇게 많아?”
“잠깐만. 저 턱수염은 말론이잖아……?”
“말론이면, 대장장이? 그 마, 말론이 죽었단 거야?!”
그래, 말론뿐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개의 머리가 성벽에 장식되어 있었다.
화르륵─!
그 순간, 프로스트 성벽 안에서 솟구치는 불길.
등골을 타고 오르는 공포.
꼴깍─
마른침을 삼킨 히사기가 곧바로 소리쳤다.
“당장 연락해! 병신같이 플레이어들 붙잡고 있지 말라고!!”
.
.
.
기대가 컸던 만큼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패닉에 빠진 건 당연했다.
“……저런 데에 어떻게 들어가란 거야?”
“프로스트를 함락시킬 정도의 악마란 거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진짜 공성전이야. 이거”
“레이먼 션, 이 미친 새끼! 또 통수를 쳤어!”
샤이닝과 천하통일.
그들을 비롯한 거대 길드조차 프로스트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완벽한 반전이었다.
그러니까 이 암울한 분위기를 다시 뒤집기 위해선.
그에 준할 만한 충격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이호열이다.”
지금처럼.
“아니, 잠깐. 이호열만 있는 게 아닌데?”
그랬다.
호열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내, 경악으로 물드는 플레이어들의 얼굴.
“하르콘이다.”
“뭐야, 이번에도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나섰다고?”
“아니,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 저거 키치랑 그림자 용병단 아니야? 저 괴물들이 왜 이호열이랑……? 설마 라이언 하트 기사단도 모자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