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프로스트 (1)
신화 그룹.
백이설에게 신화는 언젠가 무너트려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아래에서 무너트릴 수 없다면.
그 꼭대기에 올라서서라도 무너트려야 하는 산.
“독한 년.”
백이설의 어머니는 그렇게 불렸다.
백이설은 아버지, 아니 백 회장의 배다른 자식이었으니까.
불공평한 일이었다.
잘못한 건 백 회장인데 손가락질을 당하는 건 엄마라는 게.
불합리한 일이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결국, 세상을 떠나신 것도.
-부디 조용히 살거라. 설아.
누구 하나 찾지 않는 장례식장에서.
백 회장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백이설은 그 불합리를 참을 수 없었으니까.
독한 년이라고 그랬겠다.
그럼 독한 년의 피를 물려받았을 내가.
이 핏줄을 타고 흐르는 독으로.
신화를 중독시켜 죽여버려야지만 이 원한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격변은 기회였다.
아니, 운명이었다.
과거,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시작했던 아르카나.
그런 아르카나가 현실이 됐다.
백이설은 그 운명을 놓치지 않았다.
제 발로 신화라는 호랑이 소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백 회장에게 인정을 받았다.
──────
[단독] 신화 그룹 백주성 회장, “백이설은 내 딸이다.”
──────
신화 길드의 마스터가 되었다.
신화 길드가 신화 그룹의 정식 계열사가 되었다.
그래서 기쁘냐고?
유감이지만 복수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래, 분명 그랬을 텐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무의식 속에 가라앉은 느낌.
정신이 돌아오는 때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올 때밖에 없었다.
“어때? 점점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 같니, 우리 아가씨?”
호텔의 전경.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저건 분명 자신이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유리의 비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가락도.
심지어는 말 한마디조차도 뱉을 수 없었다.
그런 백이설을 비웃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네가 생각한 방식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후회한다고 해도 어쩌겠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인걸.”
……그 말에 떠올렸다.
그래, 자신의 몸을 차지한 건 악마였다.
균열에서 마주쳤던 서큐버스.
그날의 기억이 찬찬히 돌아왔다.
균열 공략은 실패였다.
악마족 몬스터라니.
그런 변수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었으니까.
찌릿─
백이설은 자신에게 검을 겨눈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서큐버스의 상태이상에 당한 것이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백이설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복수는 이제야 시작됐단 말이다.
백이설은 주먹을 쥐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백이설에게 악마는 속삭였다.
“황홀한 눈빛이야. 마음에 들었어.”
[중급 악마, 서큐버스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정신력이 너무 낮습니다.]
[상태이상 : 빙의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백이설은 착각했다.
악마란 족속이 어떤 족속인지.
영혼을 판다고 그랬나?
거래를 떠나서.
악마에게 인간은 그저 전부 똑같았으니까.
그저 기만에 놀아나는 하찮은 존재.
후회한다고 해봤자 소용이 없단 소리였다.
백이설은 그제야 깨달았다.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래, 악마에게 몸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낙담하고 다시 무의식 속에 잠드는 과정을.
자신은 몇십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건 백이설을 더욱더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다음엔 악마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과연, 하찮은 악마답다.”
‘……?’
그런데 뭘까, 이 목소리는.
하찮은 인간도 아니고 악마라니……?
그건 서큐버스가 아닌 사내의 목소리였다.
서큐버스조차 당황한 걸까.
동요하는 바람에 무의식 속에 잠들었던 백이설이 깨어났다.
그리고 백이설도 보게 되었다.
흔들림 없이 곧은 자세.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마치 악마의 유혹 따윈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이, 이건 말도 안 돼!!”
악마를 사냥하는 호열을.
“아아악!!”
백이설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통쾌하다?
아니,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거나 자신도 악마와 함께 숨을 멎어가는 상태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일단 고마워요.’
호열에게 감사하다는 것.
기억에 떠오르는 서큐버스의 만행.
그건 정말이지,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다.
더 이상 그런 추태를 부리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죽을만한 보람이 있었네.
그래,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
슥스슥─
일정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서명할 때나 들었던…….
그래,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를 긋는 소리.
‘……뭐야?’
뭔진 몰라도.
지옥에 떨어지고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이내, 천천히 눈꺼풀을 뜬 백이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역시나 호열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까와 같은 한결같은 자세로.
무언가를 적어나가는 호열의 모습.
백이설은 눈을 몇 번 깜빡여보고는 현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나, 살았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상황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런.’
서큐버스에게 빙의됐었단 사실도.
그 때문이라고 해도 추태를 부리려던 것도.
호열은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고마움을 떠나 창피한 게 당연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백이설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보던 때였다.
“정신이 드는가.”
“……!”
호열이 말을 걸어왔다.
백이설은 반사적으로 호열을 쳐다봤다가 흠칫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세에 흐트러짐은 조금도 없었다.
……혹시 옆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싶을 정도로.
그 상태로 호열은 말을 이었다.
“상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나누도록 하지.”
……상세한 이야기라니?
빠른 상황 판단.
백이설은 머리를 굴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에게 이런 협상 자리는 익숙했다.
그러니까 입장 정리도 빨랐다.
‘……나는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입장.’
호열은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갑.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목숨까지 구해준 은인이 아니던가?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자.
백이설은 어떤 거래가 됐든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무엇이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애써 굴렸던 머리가 무색하게도.
되돌아온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되물음이었다.
“무언가를 제시해야 할 처지는 그대가 아닌가?”
“……?”
그것은 진정한 갑(甲).
“나는 아직 그대의 제안을 듣지 못했네. 유스라 왕국 재건에 참여하기 위해 신화 길드는 어떤 투자와 위험까지 감수할 수 있는지를. 다음 만남에서는 확실하게 제시하게.”
“……!”
비열하게 누군가의 뒤에 숨지도.
빤히 보이는 잔머리 또한 굴리지 않는.
그야말로 귀족으로서의 자세.
호열의 말에 백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습니다.”
이런 상대를 멋대로 착각하고 오해하다니.
감사와 사과의 뜻을 담아서.
백이설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진심을 담은 제안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한마디로 나사가 빠진 상태.
거기에다가 검기 발산이라는 낯선 전투 방식까지.
그런 나는 기껏해야 350레벨짜리 몬스터.
그것도 고작 한 마리를 쓰러트리는 데에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레벨을 생각하면 그것도 대단한 거였지만.
그동안 쓰러트린 악마족 몬스터의 레벨을 생각하면 확실히 낮은 수준이었으니까.
그 탓에 내 레벨은 230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생각하면 결코 느린 속도는 아니겠지.
‘이미 고기 맛을 알아버린 거지.’
하지만 그 맛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내심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238]
[능력치]
근력 : 38 / 민첩 : 42 / 마력 : 180 / 행운 : 3
[보유 포인트 : 8]
백이설에게 빙의한 악마를 쓰러트렸고.
그러자 단숨에 8레벨이 상승한 것이었다……!
전리품이고 뭐고 마냥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나는 악마를 사냥해야 한다.
나처럼 악마 사냥꾼이 천직인 사람이 또 없을 거다.
‘어쨌든, 자화자찬보다.’
악마족 몬스터.
또 한 번 녀석들의 악랄함을 깨닫게 된다.
확실히 악마는 일반적인 몬스터와 달랐다.
균열이 붕괴되고 놈들이 뛰쳐나온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선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으니까.
‘인간에게 빙의하면 그만이니까.’
왜, 가장 약한 하급 악마 임프만 하더라도.
플레이어에게 쉽게 빙의할 수 있었잖아?
남철민이 당했던 것처럼.
‘그것도 모자라 악마는 강해질수록 비열해진다.’
임프는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릴 정도로 티를 내기라도 하지.
백이설의 경우엔 악마에게 빙의 당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알아차린 이들이 없었다.
스슥─
문득, 나는 필기를 멈추고 입을 열었다.
“심히 나를 번거롭게 하는구나.”
어쩌면 백이설이 특이한 경우가 아닐지도 모른단 소리였다.
지금도 현실, 사회 곳곳에 악마가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겠지.
“내 연구를 방해한 대가는 제대로 받아내겠다.”
……그래, 나는 몰라도.
그랑펠이 그 꼴을 두고 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뭐, 사실 나로서도 나쁜 장사는 아니겠지.
기본적으로 악마족 몬스터는 레벨이 높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악마족 몬스터의 천적이니까.
……오히려 이런 현실을 반가워해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그런 고민에 빠지기도 잠시.
지이잉─
문득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덧이 없구나.”
그래, 하루라도 빼먹으면 서운하지.
오글거리는 대사도 잠깐.
알림을 확인했다.
음, 이건 꽤 중요한 일이다.
나는 드디어 깃털 펜을 내려놓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새롭게 떠오른 신규 업데이트를 확인하기 위해서.
.
.
.
커뮤니티엔 플레이어들의 설레발로 가득했다.
-일해라 레이먼 일해라 레이먼 하니까 진짜 일하기 시작하네ㅋㅋㅋㅋㅋㅋ
-ㄹㅇㅋㅋ 드디어 정신 좀 차렸나?
-그래 이 정도 업뎃은 해줘야 밸런스가 좀 맞지ㅋㅋㅋ
크고 작은 균열이야, 별다른 업데이트 없이 계속 생성되고 클리어되고 있다 하더라도.
최근 신규 업데이트 콘텐츠의 밸런스 조절은 완전 실패였으니까.
아스큐라 백작도 너무하다 싶었거늘.
보물섬의 탈을 뒤집어쓴 거악이 나타날 줄이야.
그때 분위기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했다.
-ㄹㅇ루 지구 멸망하는 줄ㅋㅋ
-이호열 없었으면 진짜 망했을지도ㅋㅋㅋ
-그저 호멘
그러니까 이번 신규 업데이트 내역에 플레이어들이 환호하는 건 당연했다.
이건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업데이트였으니까.
『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지역이 찾아옵니다.
신규 지역, ‘북부 도시, 프로스트’가 추가됩니다.』
프로스트.
그건 아르카나 대륙 북부에 있는 대도시였다.
그래, 작은 마을도 아니고 무려 대도시.
플레이어들이 열렬하게 반응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야 대도시엔 상점과 대장간을 비롯한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했으니까.
-유스라 왕국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유스라 왕국 하나로는 부족하지ㅋㅋ
-ㄹㅇ 도시는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임
대도시 프로스트의 영향력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에도 상당했다.
덕분에 랭커나 대형 길드는 프로스트에서 적잖은 관계도와 영향력을 쌓아뒀었다.
“반드시 가온에게 밀린 순위를 복구해야 한다!”
“……근데 가온도 프로스트에서 꽤 이름 날렸을걸요?”
“듣기 싫다. 무조건 해내야 한다. 희생을 각오하더라도!”
플레이어들뿐만 아니라.
각국의 정부 인사들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생성 위치를 빠르게 파악해야 하네.”
프로스트.
엄청난 가치를 지닌 아르카나의 대도시가 조국의 영토에 나타난다?
대한민국의 마탑 효과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국가 경쟁력의 상승을 기대해 볼 만했으니까.
아르카나의 최고 전문가들.
AAU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엔 코스모의 개발 팀장.
현재는 AAU 지부장.
그들은 화상회의에서 이렇게 의견을 모았다.
“유스라 왕국에 이어서 프로스트의 등장이라. 어쩌면 지금부터 인류의 반격이 될 수도 있겠네요.”
“뭐, 사실 반격은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모르죠? 그 최전방에 선 게 바로 이호열이구요. 그나저나 한국 지사 지부장님. 정말 이호열 플레이어에 대해 아시는 거 없습니까?”
“진짜 묻지 마세요. 저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니까요!”
엄살에 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
.
.
그래, 신규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건.
단 한 사람.
나밖에 없었겠지.
프로스트의 등장으로.
유스라 왕국의 영향력이 옅어질까 봐?
아니, 그따위 이유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눈앞에서 점멸하는 퀘스트창]
프로스트가 꿈과 희망이 가득 찬 대도시가 아니란 것을.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먼저 알아차려서?
아니, 그따위 이유도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부른다고 나타나는 모습이 하인과 다를 바 없구나.”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마왕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