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8화 (163/489)

◈ 48화. 허나, 숨어도 소용없다 (2)

치밀하게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다.

당연히 해내야 할 일을 해냈을 뿐.

그러니 세운 업적은 떠벌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을 숨기는 것 또한.

귀족의 태도와는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결국 피곤한 성격 때문이라는 거지.’

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찻잔을 들었다.

달칵─

“심히 유난스럽구나.”

정말이지 담백한 감상이시다.

과거의 나였다면 말이야.

티타임은 개뿔.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반응이란 말이다.

폭발적, 아니 그것도 부족하다.

말 그대로 핵폭발 수준의 파급력이었다.

일단, 가온 측에서 공개한 거악과의 전투 영상.

‘그 모습이 녹화되고 있었을 줄이야.’

원래는 몬스터의 패턴 분석 목적이었다고 했나.

거기에 우연히 내 모습이 찍힌 덕분에 나는 수고를 던 셈이었다.

아직도 내 말에 흠칫하던 기자, 정만석의 표정이 생생했으니까.

“그저 믿으면 되는 것이거늘.”

무슨 교주처럼 말하는 나였지만.

그게 어디 믿기 쉬운 소리란 말인가?

유스라 왕국의 권한이 내게 있다는 건.

내가 유스라 왕국에서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웠고, 그 업적을 바탕으로 막대한 관계도와 영향력을 쌓았단 소리와 다름없었으니까.

현시점에서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업적?

기자로서의 눈치가 있다면.

그쯤에서 알아차렸을 거다.

내가 거악에게서 유스라 왕국을 구해낸.

월드급 메시지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겠지.

거악, 칠죄종 탐욕.

녀석은 650레벨, 그것도 악마족 몬스터였으니까.

“결국, 하찮은 악마에 불과했다.”

지금이야 뻔뻔하게 말하고 있지만.

라이언 하트 기사단, 가온과 버서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드넓은 황금 궁전에서 녀석을 찾지도, 찾는다고 해도 마력 고갈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아는 건 오직 나 혼자뿐.

게다가 편집 덕분일까.

영상 속의 나는 내가 봐도 강해 보였다.

정말 무슨 히어로 영화 보는 기분도 조금 나고 말이야.

그래, 다 좋았단 말이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지.

‘빌어먹을 흑역사.’

언제나 이놈의 입방정이 문제다……!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름 모를 왕이여.]

하쿠나에게도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 왔거늘.

내 흑역사를 바로잡을 시간은 대체 언제 오는 거냐고!

무엇보다 치욕스러운 건.

그 영상이 넷튜브를 비롯한 온갖 포털사이트를 장식했다는 거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애증의 존재들이 내게 톡을 보내왔단 소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ㅊ놈

굳이 동영상 링크까지 첨부해서 보내온 메시지.

나의 원수, 이예림이었다.

-열아 어째 갈수록 멋있어진다잉?

-근데 그 중2병 컨셉은 언제까지 고집하는겨?

-아니다 보니까 계속해도 되겠다~ 반응 좋네~

2호, 이지윤은 하나도 아닌 세 개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막내야! 갈수록 듬직해지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아랑이도 삼촌이 왕자님 같다고 난리야! 언제 삼촌 볼 수 있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봐.

큰누나, 이은혜.

……그래, 큰누나는 착하니까.

그런 뜻으로 보낸 게 아니겠지만.

‘……아랑아. 당분간 삼촌 볼 생각하지 말아줘.’

첨부된 사진.

TV 속 나를 보고 해맑게 웃는 아랑이의 모습.

조카에게 흑역사를 들킨 듯한 이 기분.

이 쪽팔림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조금의 내색도 없다.

더없이 꼿꼿한 자세.

나는 차분하다 못해 경건하게 답장을 보냈다.

-전부 누님들께서 지켜봐 주신 덕분입니다.

빌어먹을, 예절과 격식.

윗사람인 누나들에게 공손한 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곧바로 웬수의 메시지가 올라온다.

-언니들 얘 진짜 미쳤나봐

……됐다.

말해봤자 더 이상 말해봤자 피곤해지는 건 나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어서 떠오르는 큰 누나의 장문 메시지.

-엄마 아빠도 이번에 네 모습 보고 걱정 같은 거 한시름 덜어내신 것 같았어! 그전까지 말씀은 안 하셨어도 걱정 많이 하신 것 같았거든ㅜㅜ

어쨌거나 긍지 덕분에 가족들 걱정은 시키지 않게 됐으니까.

내가 오늘만큼은 효자다.

‘이제부터는 내 걱정만 하면 되겠구나.’

나는 치솟는 불길에 기름을 들이부은 참이었으니까.

‘왜, 신화 길드 말이야.’

신화 길드는 내 심기를 거스른 죗값을 제대로 치르고 있었다.

언론 뒤에 숨었던 만큼 그 역풍을 제대로 맞고 있는 거겠지.

“허나, 부족하다.”

물론, 네티즌의 댓글 폭격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인터뷰가 아니었으면 말이야.’

내가 이런 치욕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을 터.

나는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이 수치심은 몇 배로 돌려주고 말겠다…….

*

방송국 사이에선 눈치싸움이 한창이었다.

누가 먼저 이호열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것인가!

현재의 이호열의 화제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저 단독으로 이호열을 앵글에 담는 것만으로도.

최소 20퍼센트는 넘기는 시청률을 보장받겠지.

그러나.

“진짜 시청률에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그 호랑이 굴로 기어들어 가고 싶겠어?”

“안 그래도 까칠한 성격이 더 까칠해졌을 텐데.”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설 수 있을까.

가뜩이나 취재하기 어려웠던 이호열.

그런 이호열이 사실 650레벨 몬스터를 혼자 쓰러트릴 정도로 강했단다.

그것도 모자라 여태까지와 다르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 상황이다.

투데이 아르카나, PD 현용석.

일명 시청률에 미친놈도 이번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종진이 헬기 타다가 죽을 뻔했던 게 얼마 전인데. 또 사지로 보낼 순 없지. 이번엔 내가 한 번 참아줄게. 종진아.”

현용석조차 그렇게 나오는데.

다른 방송국 상황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호열은 포기하자.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방송국 놈들이 아니었다.

이호열만큼은 아니고, 또 이호열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열렬한 반응이었지만…….

시청률 하나만큼은 보장된 곳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신화 그룹 본사 반응은 어때?”

신화 그룹 빌딩.

설치된 포토라인에는 방송국 카메라와 기자들도 가득 차 있었다.

사실상 이호열에게 공개적인 저격을 받은 신화 길드였다.

그 신화 길드는 신화 그룹의 계열사와 다름없었으니까.

찰칵─

연습 삼아 플래시를 터트리던 기자 하나가 수군거렸다.

“그나저나 보통이 아니네요. 신화도.”

“그러게요. 정면 돌파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하여튼 우리 같은 일반인들로서는 플레이어들의 머리를 따라갈 수가 없다니까요?”

신화 길드의 마스터, 백이설.

그녀는 이호열의 인터뷰에 대한 답을 곧장 내놓았다.

──────

[속보] 신화 길드 백이설, “이호열, 찾아가겠다.”

──────

다시 봐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태도였다.

아아─ 입을 풀고.

대본을 숙지하던 앵커가 감독에게 말했다.

“깔끔하게 인정해 버린 거잖아요? 비열하게 숨은 것도, 잔머리를 굴린 것도 다 자기들이라고. 뭐,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잡아떼려고 했으면 끝까지 잡아뗄 수 있었을걸? 왜, 우리 방송국만 해도 봐봐. 신화 놈들이 높으신 분들 멱살을 꽉 휘어잡고 있잖아.”

“하긴 보도국에서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었죠. 자기들이 무슨 욕받이냐고.”

이젠 여론조차 돌아선 마당에 정면 돌파라니.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다는 건가?”

앵커가 중얼거리자 감독이 대꾸했다.

“아, 백이설 씨는 처음 보는 거지?”

“……네? 그렇죠. 실물은 처음이죠?”

“그럼, 그럴 만도 하지. 이따가 한번 봐봐.”

“예? 뭘 봐요?”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게 될 테니까.”

“……?”

보면 알게 된다니.

의문이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커지는 대답.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 나왔다!”

찰칵─!

곧 백이설이 포토라인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그러나 백이설은 눈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어깨 위에 걸친 코트.

아래로 언뜻 보이는 파격적인 의상.

그러나 그보다도 화려한 외모.

백이설.

그녀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면 알게 될 거라고 했었나.

앵커는 백이설과 마주하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예쁜 걸 넘어서.’

매혹적이었다.

그녀에겐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건 자신의 본업조차 잊게 할 정도였다.

감독이 넋이 나간 앵커에게 뻐끔거렸다.

-뭐해? 큐 싸인 떨어졌어!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앵커가 입을 열었다.

“네, 저는 지금 신화 그룹 본사 앞에 나와 있습니다!”

.

.

.

마탑.

포탈에서도 백이설의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취재진은 떨어져 나갔다 해도 넷튜버 플레이어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에게도 이건 시청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 큰 떡밥이었으니까.

왜, 딱 봐도 각이 보였다.

“저도 균열 뺑뺑이 돌던 시절에 신화 길드 놈들한테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니까요?! 네, 주작은 하지 말라고요? 어떻게 아셨어요?”

극과 극.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이호열.

마찬가지로 비호감의 끝을 달리는 신화 길드가 아니던가.

그 결과가 어떻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일.

넷튜버들에겐 이보다 좋은 기회도 없었다.

-이게 화제가 되는 것도 웃긴다ㅋㅋㅋ

-ㄹㅇㅋㅋ 호열 님을 뭘로 보는 거임? 다들

-신화 길드 마스터에 재벌이면 다냐? 그렇게 따지면 이호열 뒤엔 유스라 왕국이 있는 건데ㅋㅋㅋ

-버르장머리 없게 뭐 이호열?! 저게 미쳤나

“맞습니다. 우리 호열 형님이 정의 구현 제대로 해주시겠죠!”

적당히 이호열 편을 들었다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신화는 정치인들 등에 업은 게 팩트라;;;;

-ㄹㅇ 그냥 좀 쉽지 않을 것 같은디?

-그리고 백이설이 협상 하나는 기가 막히잖아

-능력은 확실하지 ㅇㅇ;;

“역시 시청자 형님, 누님들.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또 적당히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시청자를 끌어모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거기에다가 살짝 눈치를 보면서 수금까지.

“그럼 또 우리 호열이 형님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리액션 시원하게 한 번 가볼까요? 예? 응원하는 건 이호열인데, 돈은 왜 제가 받냐고요? 아니, 저도 먹고살아야지…….”

자신을 둘러싼 소란.

그러나 그녀는 작게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어디 마음껏 지껄여 보렴.”

어리석기는.

그 반응이 뒤바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백이설, 아니 서큐버스는 포탈을 향해 나아갔다.

몸에 남아있는 백이설의 기억이 포탈이 어떤 것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해줬다.

서큐버스는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혀를 찼다.

‘어리석은 인간 주제에.’

쓸데없이 귀찮게 한다.

이내, 서큐버스의 시야에 들어온 유스라 왕국.

과연 이곳에선 고향의 분위기가 풍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고향이려나.

언제까지나 자신은 지옥에서 태어난 악마였으니까.

서큐버스는 곧장 황금 궁전으로 향했다.

‘저게 내 손에 들어온단 말이지.’

이호열.

그가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을 거란 상상은 하지 않았다.

백이설의 육체를 차지한 뒤, 자신은 급격하게 성장한 상태였으니까.

그래, 백이설의 기억에 남아있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레벨이 올랐단 소리겠지.’

상급 악마를 넘볼 수 있을 정도로.

거기에다가 이호열도 어쩔 수 없는 사내가 아닌가.

“무슨 용건이십니까?”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이 여기사와는 다르게.

그녀를 멈춰 세운 건 예시카였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유스라 왕실 근위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백이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백이설입니다. 이호열 씨를 만나러 왔답니다.”

예시카는 두말하지 않았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난 예시카였거늘.

서큐버스의 눈은 예리했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순진하구나.’

이호열, 그를 신뢰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내는 전부 똑같은데 말이야.’

예시카의 실망한 얼굴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황홀했다.

그래서일까,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서 워낙 떠들어대야 말이지.

“드디어 도착한 거 같은데요?”

“쉬는 타이밍에 좋아요, 구독 부탁드립니다.”

“……저도 들어가 보라고요? 아니, 제가 저길 어떻게 들어가요? 너무하십니다, 정말! 라이언 하트 기사단한테 칼 맞아 죽을 일 있습니까!”

그리고 예시카가 돌아왔다.

“……?”

그런데 어째서인가.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예시카는 이번에도 두말하지 않았다.

“돌아가시랍니다.”

……잠깐만, 뭐라고?

도, 돌아가라고?

서큐버스는 어이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

제대로 전하지 않았겠지.

“똑바로 전한 건가요? 신화 길드의 백이설이 찾아왔다고…….”

예시카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만남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 돌려보내라.”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분명 그리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적─

“…….”

그러나 넷튜버들이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뭐야, 그냥 거절도 아니고 문전박대?”

“분명 허비할 시간이 없다 했죠? 그럼 백이설과의 만남이 시간 낭비와 다름없다는 소리……?”

“혀, 형님들! 이거 백이설이 제대로 차인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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