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허나, 숨어도 소용없다 (1)
민국일보.
기자, 정만석의 손가락이 노트북 위에서 춤을 췄다.
타다다닥─!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이호열이 누구던가?
수많은 플레이어를 봐왔지만, 그중에서도 그 행보가 가장 믿기지 않는 플레이어! 무엇보다도 호열의 성격은 보도국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인터뷰 따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그 싸늘한 눈빛에선 살기가 느껴진다.
그 정도면 콘셉트가 아니라 진심이다…….
마치 도살장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는 듯한 기분.
“……무례하다고 마법으로 묻어버리면 어쩌지?”
진심으로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들고 온 질문이 자신이 봐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아무리 윗선에서 받아 처먹었어도 그렇지.
이건 대놓고 신화 길드 편을 들어달라는 것과 다름없는 질문이었으니까.
“이호열이 잘도 대답을 해주겠다. 진짜.”
하지만 까라면 까야 하는 사회인의 비애.
정만석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호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질문을 건넸다.
제발, 땅에 묻지만 말아 주세요.
간절하게 빌면서.
그런데.
“대박이다. 대박……!”
이게 웬일이야?
천하의 이호열이 인터뷰에 응해준 것이다.
단답도 아니었다.
이호열의 기준으로 굉장히 성의 있는 답변이었다.
정만석은 어깨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타다다닥─!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저격할 줄이야.”
비열하게 숨지도.
또 훤히 보이는 잔머리도 굴리지 말라니.
그저 받아적는 기자의 입장이거늘.
정만석은 솔직한 심정으로 약간 짜릿했다.
‘……뭔가 얹혔던 속이 내려가는 기분?’
자신을 비롯해 얼마나 시달렸던 기자들인가?
근 며칠 동안 쓰기 싫은 신화 길드 기사를 쓰느라 손가락이 썩어들어가는 줄만 알았단 말이다. 그런 상황에 호열이 대놓고 원흉을 저격한 셈.
문득, 춤추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근데, 이게 무슨 소리지?”
내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라.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니.
정만석은 혹시나 했다.
“……에이, 설마. 권한이 그 권한은 아니겠지?”
권한.
영지를 소유한 플레이어에게 활성화되는 기능.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에야 쓰던 말이었다.
그야 플레이어의 영지가 현실에 업데이트된 전례는 없었으니까.
절레절레.
정만석은 고개를 털어냈다.
막말로 거악, 칠죄종 탐욕을 혼자 쓰러트렸다면 모를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되지.”
제아무리 호열이라고 해도 유스라 왕국에서 권한 기능을 얻을 정도의 관계도, 영향력을 쌓진 못하는 게 당연하다.
정만석은 말뜻을 추측해 봤다.
“뭐, 국왕 하쿠나랑 친우. 그런 관계라는 건가?”
차라리 그쪽이 가능성이 높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만석이 뻐근한 손목을 풀었다.
“뭐가 됐든 대박 특종이니까. 이건.”
게다가 단독 취재.
남에게 빼앗길 염려도 없다.
호열에게 고마워서라도 성의를 다해서 써야겠지.
다시금 정만석의 손가락이 움직이려던 순간.
지이잉─
진동하는 스마트폰.
부장님이었다.
장원급제한다면 이런 기분이려나.
“크흠.”
정만석을 목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그러자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정 기자! 이호열 만났어?
만나기만 했겠는가?
본부대로 인터뷰까지 확실하게 땄다.
정만석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네, 만났죠.”
그런데 어째 반응이 심상치 않다.
-그래? 빨리 만났네? 혹시 취재 중인가? 이호열 가까이에 있어? 그러면 당장 취재 내용 수정하라고! 신화 길드 질문 같은 건 그냥 날려버려!
“……예? 뭐, 뭐라고요? 뭘 날려요?!”
잠깐, 목숨을 걸고 따낸 인터뷰란 말이다.
정만석은 찰나지만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윽박이 되돌아왔다.
-뭐야, 정만석. 너 방금 뜬 영상도 확인 안 했어?
“……영상이요?”
아뿔싸.
그 말에 정만석은 다급히 단톡방을 확인했다.
그러자 그곳엔 넷튜브 링크가 있었다.
그건 가온 측에서 공개한 동영상이었다.
“?”
그 동영상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유스라 왕국.
“……그냥 했던 말이 아니었어?”
그날의 진실이 있었다.
*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떠올랐던 월드급 메시지.
[누군가 유스라 제도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고대 왕국, 유스라 왕국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누군가가 ‘이호열’이었다!
가온이 공개한 영상엔 호열과 거악, 칠죄종 탐욕의 전투가 담겨있었다.
영상 도입부.
거악이 보여주는 위압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ㅁㅊ;; 남태민이랑 레오니가 저항도 못하네
-악마는 저 상태이상이 ㄹㅇ 골치 아프다니까??
-레벨을 생각하셈 650레벨임
그래, 녀석은 650레벨짜리 악마족 몬스터였으니까.
제아무리 랭커라고 해도 대응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남태민이나 레오니가 나약했던 게 아니란 소리다.
그러니까 이어지는 장면의 파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상태이상 따윈 가뿐하게 극복했다는 듯.
거악을 향해 나아가는 호열.
그와 동시에 돌아오는 화면의 앵글.
-뭐냐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 거임? 진짜 모름;;
-지금 이호열이 상태이상 풀어준 거 맞지?? ㄷㄷ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호열이 입을 여는 순간.
남태민과 레오니도 상태이상에 벗어난 것이었다.
그런 호열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영상에 담겨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곳에 내가 있다.]
그 부분에 남겨진 댓글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3:50! 3:50! 3:50! 3:50! 3:50! 3:50! 3:50!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호멘
-가온 나쁜 놈들아 이걸 이제야 공개하냐ㅠㅠㅠㅠ
얼핏 들었을 땐.
오글거리는 게 당연한 말이었거늘.
극적인 상황이 오히려 대사의 맛을 살린 셈이었다.
호열이 아니었다면 남태민과 레오니는 정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래,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활약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믿지 못할 전개가 시작된 건 그다음부터였다.
호열과 마주하자, 거악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어떻게……?]
그리고 시작된 악마 사냥.
그래, 그건 사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일방적인 농락이었다.
화면에 가득 찬 다채로운 마법의 향연.
-왔다ㅋㅋㅋㅋ돌기둥ㅋㅋㅋㅋㅋㅋ
-잠깐만 저 반짝이는 건 또 뭐임??
-생긴 게 꼭 총탄 같은데…… 아니 이건 또 뭐냐?!!
-갑자기 화살이 됐는데???
그건 말로도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 찰나의 시간.
얼마나 복잡한 스킬이 연계된 것이란 말인가? 그 장면을 저배속으로 재생하며 수십 번씩 들여다본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내린 결론도 결국엔 똑같았다.
-그저 호멘
남철민이 호언장담했듯.
분석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마법 활용이었다.
[말이 되질 않는단 말이다. 내가 어째서 인간에게……?]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중얼거리는 거악, 칠죄종 탐욕.
결국, 녀석은 비굴한 제안까지 건네왔다.
[그래! 좋다! 나와 계약을 하자! 나와 계약한다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보이지 않느냐? 이 찬란한 황금 궁전이 모두 네 것이 되는 것이다!]
꼴깍─
거기서 군침을 삼킨 이들이 꽤 많았다.
그야 더없이 혹하는 제안이었으니까.
하지만 호열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 모습이 추악하구나. 어리석은 악마여.]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냉랭한 목소리.
그것으로 전투는 끝이나 다름없었다.
[사, 살려줘! 아, 아직 죽고 싶지 않……!!]
목숨을 구걸하는 거악, 칠죄종 탐욕.
호열의 말대로였다.
거악이라고 한들.
호열의 앞에선 하찮은 악마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자비는 없었다.
어느샌가 손에 쥔 은제 단검.
서걱─
호열이 그대로 거악의 목을 쳤다.
-……와씨. 영화 벌써 끝났냐?
-아니!! 아직 끄지 마셈 쿠키 영상 남았다!!
-뭐야, 이제 보니까 저거 하쿠나 아님? 유스라 국왕이잖아
거악의 지배에서 벗어난 유스라의 왕.
그런 왕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주는 호열의 모습.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름 모를 왕이여.]
그 호열의 마지막 대사와 동시에.
엔딩 크레딧처럼 자막이 떠올랐다.
[누군가 유스라 제도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고대 왕국, 유스라 왕국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집 편집 잘하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바지부터 갈아입고 온다
-그냥 이호열 대사 하나하나가 버릴 게 없음ㅋㅋㅋ
-이호열? 당장 호열 님으로 정정해라
-이거 편집하느라 지금까지 공개 못 한 거면 ㅇㅈ한다
그 파장은 넷튜브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갔다.
속보는 기본.
긴급 편성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국도 있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었습니까? 이호열은 정보 공개를 하지 않은 최상위권 랭커가 확실하다고. 그 증거가 이렇게 영상으로 나온 겁니다!”
당연하게도 전부 호열을 둘러싼 이야기였다.
하지만 영상이 공개됐음에도.
호열에 대한 신비감은 꺼지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그런데 아무리 전투 영상을 분석해도 알 수가 없어요! 심지어는 그 클래스조차 짐작되질 않습니다. 마법사 계열이란 건 확실해 보이는데…….”
“최소 500레벨. 아니, 550레벨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랭킹으로 유명세를 끌기 싫어 비공개로 놔뒀다는 주장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네요. 거악을 쓰러트리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는데. 그 사실을 지금까지 밝히지 않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의문이 드는 게 당연했다.
어째서 지금 시점에서 이 영상이 공개된 것인가?
우스갯소리로 정말 편집에 공을 들인 탓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정말 누구 하나 예상치 못하게도.
대한민국의 한 일간신문에서 나왔다.
──────
[단독] 이호열, “유스라 왕국의 권한은 내게 있다… 숨지도, 잔머리도 굴리지 않는 게 좋아… 원하는 게 있다면 내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라.”
──────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밖에.
실시간으로 폭발하는 기사의 댓글창.
그래, 이건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와ㄷㄷ 상상도 못했다ㄷㄷㄷㄷㄷ
-신화랑 엮인 정치인들 똥줄 타겠네ㅋㅋㅋㅋㅋ
-ㄹㅇ개꼴보기 싫었는데 속시원하다ㅋㅋㅋㅋ
-이런 큰 그림이 있어서 영상 공개한 거였네ㄷㄷ
-이게 영웅이 아니면 뭐임?ㅋㅋㅋㅋ
추잡하게 얽히고설킨 재벌 길드 신화와 기득권층.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그들을 향한.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꼿꼿한 선전포고.
*
대한민국 재계 서열 1, 2위를 다투는 신화 그룹.
신화 그룹의 상징 중 하나인 서울 디럭스 미스 호텔.
최상층 프라이빗 룸.
그곳엔 함께 있어선 안 될 두 남녀가 있었다.
물론, 단지 한 공간에 있다는 것뿐.
침대에 누워있는 건 사내, 혼자뿐이었지만.
“음몽(淫夢)에 취한 모습이 우습구나.”
신화 길드의 마스터, 백이설.
그녀는 황홀한 꿈에 취해있을 사내를 바라봤다.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가고. 어리석기는.”
쾌락에 젖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겠지. 명성, 가족,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내팽개쳐 버린 채 말이야.
“그 바보들처럼.”
훗─
백이설이 코웃음을 치기도 잠깐.
사내의 몸에서 빠져나온 정기가 백이설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백이설의 동공이 순간, 새까맣게 변했다.
지직─
세계 최고의 호텔 중 하나인 서울 디럭스 미스 호텔.
그중에서도 VIP를 대상으로 비밀리에 운영되는 프라이빗 룸이었다.
관리의 수준을 생각하면 전구가 깜빡거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니까 지직거리는 전구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대로라면 상급 악마가 되는 것도 머지않았어.”
백이설이 악마에게 빙의 됐다는 것.
백이설은 창문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 한강이 아닌.
창가에 비친 자신을 보고 말을 걸었다.
“어때? 점점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 같니, 우리 아가씨?”
길고 하얀 손가락이 창문에 비친 백이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고혹적인 음성이 이어졌다.
“물론, 네가 생각한 방식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후회한다고 해도 어쩌겠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인걸.”
올라가는 입꼬리.
그 미소는 틀림없이 악마의 기만이었다.
“그래도 무너트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다.”
정기를 흡수했으니 용건은 끝났다.
백이설은 그대로 프라이빗 룸을 빠져나왔다.
대기하던 수행비서가 따라붙었다.
그러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혹시 기사 확인하셨습니까?”
“이호열 씨 인터뷰를 말하는 건가요?”
“……알고 계셨습니까? 죄송합니다! 혹시나 싶어서.”
프라이빗 룸에 입장하자마자 사내는 재워버렸으니까.
백이설에게 스마트폰으로 속보를 확인할 시간은 충분했다.
수행비서는 백이설의 반응에 흠칫했다.
‘……알고 계셨다니. 자칫 잘못하면.’
신화 길드의 모든 게.
심지어는 오늘을 포함한 그간의 밀회까지.
세상에 훤히 드러날 수도 있는 위기란 말이다.
그런데 백이설에겐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레오니 씨가 아니어서.”
“……?”
“일이 굉장히 피곤해질 수도 있었는데.”
백이설의 말에 수행비서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백이설이 수행비서의 뺨을 어루만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 대표님……!”
“당신에겐 늘 신세만 지는군요.”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하겠지.
수행비서는 자신이 음마(淫魔), 서큐버스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당장 자신 또한 음몽의 희생자란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래, 수행비서뿐만 아니었다.
침대에 나자빠진 정부 관료부터.
기업인, 초신성, 심지어는 랭커들까지.
수많은 음몽의 희생자들이 백이설.
아니, 중급 악마 서큐버스에게 자신감이 되어준 것이다.
‘혼자서 거악을 쓰러트렸다고?’
그게 사실이라도 상관없다고 여길 정도로.
‘후후. 거악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나보구나.’
이호열, 그가 사내인 이상.
자신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
백이설이 수행비서의 뺨에서 손을 뗐다.
“모습을 드러내라고 하셨으니 드러낼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어디까지 드러내길 원하시는 걸까요? 지금보다 더 과감한 의상을 골라야 할까요?”
백이설이 눈꼬리가 휘어졌다.
“내일 일정은 전부 비워두도록 하세요.”
이호열, 그를 만나기 위해 유스라 왕국으로 가겠다.
백이설. 아니, 서큐버스는 꿈에 부풀었다.
‘상급 악마가 뭐야. 내가 거악이 될 수 있을지 몰라!’
자신의 발로 향하는 그곳이.
천적의 영역인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