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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6화 (161/489)

◈ 46화. 비겁하구나

실시간으로 발전해가는 유스라 왕국.

그 재건 속도는 가히 상식을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쏟아붓는 돈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대격변 이후.

그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던 비전투직 플레이어들.

유스라 왕국이 재건에 돌입하자, 그들의 얼굴엔 간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드디어 생산직 떡상의 날이 오는 건가?”

“진짜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이었다. 균열에선 일반인이랑 다를 게 없었으니까. 그래도 내 평생 플레이어로 돈을 버는 날이 오는구나!”

“어이, 김 씨. 떠들지 말고 벽돌이나 날라.”

현실에 나타난 최초의 아르카나 국가.

유스라 왕국에 투자되는 자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일단, 웬만한 기업에 버금가는 대형 길드.

가온과 버서커의 투자금만 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가온과 버서커의 공격적인 투자. 전문가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미래를 내다본 현명한 판단이다. 그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사실 먼 미래도 아닐 겁니다. 이 순간에도 가온과 버서커는 유스라 왕국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셈이니까요.”

“지금 투자하는 금액은 조금도 아까운 게 아니다?”

“네, 그렇습니다.”

실제로 가온과 버서커를 제외하더라도.

무지막지한 투자금을 싸 들고 유스라 왕국을 찾은 길드, 플레이어, 심지어는 국가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적극적이었던 건 중국이었다.

“우린 유스라 왕국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를 원합니다. 대국의 길드, 천하통일이라면 가온이나 버서커보다도 왕국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제안과 함께 내미는 약소한 성의.

그러나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가 누구던가?

그는 탐욕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호열을 보며 얻었던 깨달음까지.

하쿠나는 모든 매력적인 제안을 냉랭하게 뿌리쳤다.

“내 결심에 변함은 없을 걸세.”

그 결심을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호열밖에 없겠지.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설 속 보물섬이라 불리던 유스라 왕국이 아니던가?

사실 채취한 광물만 내다 팔아도 재건 비용 정도야 충당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당사자들이었다.

벅벅─

레오니가 머리를 긁적였다.

“으아아아.”

흘러나오는 절규.

잠자코 있던 길드원들이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언니, 또 왜 저래?”

“뻔하지. 또 쓸데없는 고민 하고 있을걸?”

“아, 그분 생각?”

망언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레오니는 심정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뭔가 일이 굉장히 잘 풀리고 있는데.’

실시간으로 빚이 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은 뭐지?

물질적인 빚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레오니가 느끼는 건 마음의 빚이었다.

그래, 길드원들의 말대로 호열 때문이었다.

“왜? 도대체? 으아아아.”

단순한 호의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친 보상이잖아?

준 도움에 비해 받는 게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레오니는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뜯었다.

‘뭐지? 이럴 인간이 아닌데? 진짜?’

벌써부터 막 좋아하면 안 될지도 모른다.

레오니가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호열과의 첫 만남.

‘맞지. 맞지. 그 치사한 성격에.’

차 한 잔 나눠주지 않는 그 쪼잔한 성격에 말이야.

이런 호의를 그냥 베풀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레오니는 애꿎은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근데 뭘 가져가겠단 거지?’

자신에게서 뭘 가져갈 정도로.

호열에게 부족한 게 있나……?

아무리 고심해 봐도 딱히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멈칫─

머리카락을 못살게 굴던 레오니의 손이 멈췄다.

‘……아니, 설마, 진짜로?’

……그 차가 그렇게 소중한 건가?

나한테 한 잔도 내어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그럼 안 되는데?

‘얼마나 대단한 차길래?’

레오니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씹, 이게 다 너희 때문이잖아!!”

“……뭐라는 거야. 갑자기?”

“언니, 왜 그래? 히스테리 부려?”

어리둥절한 길드원들을 뒤로한 채.

레오니는 다시 고뇌에 빠졌다.

“……이래서야 언제 빚을 갚고, 언제 얻어먹냐.”

“얻어먹어? 뭘? 아, 혹시 그때 그 차 말하는 거야?”

“닥쳐.”

“언니, 그냥 물어보고 사서 먹으면 안 돼?”

“사 먹는 거랑은 다르다고. 니들이 뭘 알아?!”

“……누구 언니인지 몰라도 진짜 진상이다.”

.

.

.

“형, 어떻게 생각해.”

남태민은 형, 남철민에게 물었다.

형제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법이다.

“어떻게 생각하긴 그냥 어떻게 갚을까. 그 생각뿐이지.”

아르카나의 공식 홈페이지.

새롭게 갱신된 길드 랭킹.

두 형제는 그 순위를 다시금 확인했다.

──────

1. 샤이닝 (-)

2. 천하통일 (-)

3. 가온 (+2)

4. 보헤미안 (-1)

5. 이나즈마 (-1)…….

──────

무려 두 계단이나 상승한 길드 랭킹.

이나즈마를 넘어선 것도 모자라 3위로 올라선 상황.

기쁨에 춤을 춰도 모자랄 판에 형제는 담담했다.

“더 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자.”

그야 그 순위 상승을 만들어 낸 건 자신들이 아닌 호열이었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눈앞이 아찔하다. 만약, 호열과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물론, 형도 이 자리에 없었겠지.’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정말 호열에겐 받기만 해온 것 같았다.

어떻게 갚아야 할까.

떠올리면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남태민은 의욕을 다졌다.

“호열 씨가 맡긴 유스라 왕국 재건부터 제대로 끝내자. 형!”

그런데 남철민의 표정이 심각했다.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된 형의 시선.

남태민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새끼들. 또 지랄 시작이네?”

──────

[이 시각 국회는] “길드 랭킹 3위 진입, 정말 축하할 일…… 그러나 신화 길드와의 비협력 아쉬워…… 이럴 때일수록 힘을 합쳐야…….”

──────

지독한 언론 플레이.

한두 번 시달리는 게 아니었다.

신화 길드.

그들이 정치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워낙 노골적이라서 이젠 네티즌들까지 알아차릴 정도였다.

-또 언플 시작이네 신화 새끼들ㅋㅋ

-실력으로 안되니까 추잡한 짓은 다 함

-아니 가온이 왜 지들을 이끌어줘야 함?ㅋㅋㅋ

단순한 욕설부터.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었다.

-얼마나 받아 처먹었으면 정치인이란 놈들이 하나같이 신화 쉴드를 못 쳐서 안달이냐?

함께 댓글을 읽어나가던 남철민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선을 좀 심하게 넘는데.”

“백 퍼센트 동감. 근데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네.”

“뭐가?”

“아니, 신화 그 새끼들이 무슨 수로 그 늙은이들을 꽉 잡은 거지? 뭐, 예전부터 개수작 부린다는 거야 전부터 소문으로 들었는데……. 최근 들어 너무 노골적이잖아?”

“듣고 보니까 그러네.”

남철민은 동생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인이 얼마나 이미지에 민감한 족속인가?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최근 행보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반응이야, 성난 댓글 창만 봐도 알 수 있을 터.

그런 민심에도 계속 신화를 두둔하다니.

남태민이 주먹을 쥐었다.

“하여튼 별것도 아닌 것들이 귀찮게 하네. 정말.”

이게 아르카나였으면 그냥 길드쟁 떴다. 내가.

“아주 그냥 개박살을 내버렸을 텐데!”

슉슉─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

남태민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기도 잠깐.

남철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됐든 하나는 확실하게 해야지.”

“응? 뭘?”

“호열 씨한테 불똥 튀기는 일 없게 하는 거.”

“아, 그거야 당연하지! 근데 어이가 없다. 진짜?”

남태민이 피식 웃었다.

“다들 완전 제대로 잘못 짚었다니까? 신화든, 정치인들이든? 결국, 거악을 쓰러트린 건 호열 씨인데 말이야. 우리가 한 거라곤 진짜 그냥 숟가락만 얹은 건데.”

“그러게. 나도 그게 답답해서 죽겠다. 태민아.”

거악, 칠죄종 탐욕.

무려 650레벨짜리 몬스터를 압도하던 호열.

하지만 세상은 그날의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 같아선 이것 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호열의 전투 영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야 호열 씨 전투 패턴이 분석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사실 걱정할 게 없더라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를걸? 나도 저런 스킬 활용은 본 적이 없으니까.”

유능한 분석관 남철민.

그조차 알지 못하는 스킬로 호열은 거악을 사냥한 것이었다.

이 녹화 영상이 공개되는 순간.

세상은 다시 한번 뒤집히겠지.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호열 씨 의사가 중요한 거니까.”

“맞지. 말 나온 김에 문자라도 남겨둘까?”

“문자? 직접 얼굴 보고 하지, 왜?”

호열이 워낙 바빠야 말이지.

유스라 왕국에 머물러 있어도 보기 힘든 게 호열의 얼굴이었다.

남철민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호열의 일과를 체크했다.

“일단, 마탑에서 퀘스트 진행 중이셨잖아? 그럼 오전 시간은 훅 가버리고. 오후엔 유스라 왕국에 오셔서……. 근데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호열 씨, 최근 들어 하르콘이랑 많이 붙어 다니시네?”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

남태민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설마 또 퀘스트? 에이, 아니시겠지? 아무리 그래도 연관성이 없는데? 호열 씨는 마법사고, 하르콘은 기사니까.”

“글쎄, 난 모르겠다? 분발하자. 태민아.”

“으아악! 형까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마찬가지로 절규하는 남태민.

황새 쫓아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게 생겼다……!

*

스킬처럼 성장을 수치로 확인할 순 없었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있기에 알 수 있다.

고오오─

눈에 띄게 선명해진 검기.

며칠간 죽을힘을 다해서 수련한 보람이 있는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짧은 회상에 빠졌다.

‘말 그대로 진짜 죽을힘이었다, 정말…….’

다시 한번 [천적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300레벨짜리 몬스터와 생사를 건 전투.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쉽지 않았다, 진짜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장 속도네. 호열 경!”

하르콘은 순수하게 감탄을 뱉어냈다.

“말도 안 돼…….”

하르콘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검기 사용자인 예시카, 에노크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생각도 못 했겠지.

그 희미했던 검기를 자신들 수준까지 끌어올렸을 줄은.

‘내 개고생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검기는 생과 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짙어진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이 유스라 왕국이 내게는 생과 사가 오가는 전장이었단 소리다.

최소 300레벨부터 높게는 400레벨까지!

돌아다니는 몬스터 하나하나가 내게 있어선 더 없는 강적.

‘발버둥도 그런 발버둥이 없었을 거다…….’

그런 녀석들을.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채.

검술만으로 쓰러트린다?

검기를 발산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근력, 민첩 스탯.

하다못해 체력이라도 받쳐준다면 모를까.

‘나중이면 몰라도 지금은 어림도 없다.’

검기를 발산하기 무섭게 체력이 빠져나가는 게 현실이란 말이다……! 그러니 『마법』까지 발현해 가면서 발버둥을 쳤단 소리였다.

‘구질구질했지, 정말.’

물론, 내가 내 입으로 그 사실을 말할 리는 없으니.

철컥─

나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훌륭한 가르침이었네. 하르콘 경.”

배울 건 전부 배웠다.

그 뻔뻔한 선언에 하르콘이 지그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르친 게 뭐가 있겠는가? 내가 한 것이라곤 검에 대한 경의 재능이 깨어날 수 있게 약간의 계기를 준 것뿐이지. 예시카, 에노크. 보았느냐?”

하르콘이 두 기사를 바라보며 열변을 토해냈다.

그건 일종의 정신론이었다.

“저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호열 경께서도 사투 속에서 검기를 성장시키셨다.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음가짐……!”

나랑 말이 잘 통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둘 다 꼰대라는 거지.’

한 명은 격식, 다른 한 명은 정신론.

더 듣고 있다간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다.

나는 자리를 떴다.

퇴근할 시간이기도 하고 말이야.

포탈로 향하는데 별안간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남태민?’

가온의 길드 마스터.

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려는 찰나.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저기, 이호열 씨 맞으시죠? 민국일보. 정만석 기잡니다. 실례가 되는 건 아는데, 짧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방금 말했듯.

격식을 중시하는 꼰대.

내 심기는 그의 첫인사부터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순수하게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지적했거늘.

인간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리고 또 유스라 왕국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던 날. 같은 자리에 계셨던 이호열 씨에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최근 들어 커지고 있는 가온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런데 질문을 쏟아내는 정만석은 떨고 있었다.

그래, 내가 평범한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언론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던 이유는 전부 이 까칠한 성격 덕분이었으니까.

정만석 또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겠지.

그러니 떨림을 참고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대충 질문이 무슨 뜻인지도 알겠어.’

가온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라.

다른 언론사가 그랬던 것처럼.

민국일보도 신화 길드 측 사주를 받은 거겠지.

아는 사람만 아는 찌라시 같은 게 아니었다.

‘대놓고 밀어주는 꼴이니까.’

그저 인터넷 뉴스, 댓글만 봐도 알게 되는 뻔한 수작이었다.

나는 정만석을 바라봤다.

그 동공에 드리운 것은 두려움.

‘그 심정, 내가 또 잘 알지.’

위에서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거겠지.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직장인의 비애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바로 전해라.”

그건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행동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화 길드든, 뭐든.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뒤에 숨어서.

사람과 언론을 교묘하게 부리는 꼬락서니를.

드높은 긍지께선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됐든 상관없다. 유스라 왕국에 원하는 게 있는가? 그렇다면 비열하게 숨지 마라. 우스운 잔머리 또한 굴리지 마라.”

그따위 행동은 귀족의 자세와 완벽하게 반대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냉랭하게 말했다.

“내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라.”

“……예?”

“그에 관한 모든 권한은 내게 있으니.”

“……예에에에?”

심기를 제대로 거스른 죄.

삼고초려로도 부족할 테지만.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세상은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시, 실화야. 이 동영상?!”

남태민의 말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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