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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3화 (158/489)

◈ 43화. 검은 오랜만이군 (3)

차를 음미하며 그 감정 내용을 확인하기도 잠깐.

딸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핵심부터 말하자면 이러했다.

“아쉬운 일이구나.”

일단, 아이템의 레벨 제한을 낮추는 방법은 마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흡혈귀 백작의 오브]

[등급 : 유니크]

[제한 : Lv.400]

[효과 : 공격 시, 높은 확률로 추가 피해 적용.]

[설명 : 흡혈귀의 혈액으로 가득 찬 오브다. 마력과 접촉할 때마다 그 혈액이 터져 나와 대상에게 피해를 준다.]

공격마다 높은 확률로 추가 피해라니.

나와는 궁합이 잘 맞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거늘.

‘마법은 창의적인 발현이 가능하니까.’

막말로 돌덩어리 하나를 잘게 쪼개서.

적에게 날려버린다고 생각해 보자.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마다 추가 피해 효과가 적용되는 거니까.

데미지는 배 이상이 되는 셈이었다.

혹시라도 그 효과만이라도 살릴 수 있을까, 싶어서 감정을 의뢰했었다.

‘400레벨은 너무 먼 이야기니까.’

내 레벨은 고작 226레벨에 불과하단 말이다.

‘물 건너갔군.’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추신에 시선이 갔다.

-[흡혈귀 백작의 오브]는 마탑에서도 살펴보기 힘든 효과를 가졌습니다. 그 이질적인 효과가 악마의 마도구와 관련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바. 그렇기에 정식으로 [흡혈귀 백작의 오브]에 대한 연구 목적의 대여를 요청합니다.

“대여 요청인가.”

확실히 악마의 아이템은 흔치 않았으니까.

게다가 [흡혈귀 백작의 오브]는 그 수준이 높았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스스스─

곧바로 양피지에 깃털 펜을 휘갈겼다.

그 요청을 받아들이겠다.

당장의 효과를 떠나 나한테는 인벤토리만 차지하는 아이템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천하의 마탑이 아이템을 먹고 튀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이지.”

그래, 주고받는 게 있지.

나는 괜스레 브로치를 한 번 내려다봤다.

‘……이게 또 할 말이 있어야 하니까.’

혹시라도 육망성 브로치를 반납하라고 했을 때.

[흡혈귀 백작의 오브]를 내밀면 어떻게든 미룰 수 있지 않을까?

마탑에 널린 마도구 수준을 고려하면 그냥 잊고 넘어가는 가능성도 있을지 모른다.

‘내가 손해지만 400레벨까진 참아준다. 너그럽게.’

누가 알겠는가?

좋은 연구 결과가 나와 내게도 득이 될지도.

그 쓸데없는 기대도 잠깐.

다음 내용으로 넘어간다.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재료 아이템답게 내 요구 사항에 맞게 제작이 가능한 모양.

과연, 마탑이었다.

제작하기 전이지만.

대략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을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감정 결과, [피격 시, 생명력 회복] 효과 부여가 확인됩니다.

과거,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마탑이 어떻게 플레이어들의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제작하기 전에 효과를 알 수 있다니!’

그 효과에 적절하게 장비를 제작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감정을 받은 이유가 있었구나.

그나저나 내가 이런 고급 서비스를 공짜로 이용하고 있다니.

‘약간 출세한 기분이 드는 게 나쁘지 않네.’

피격시, 생명력 회복이라.

무엇보다 그 범용성이 좋은 효과였다.

딱히 클래스를 가리지 않는 효과라는 거지.

‘나중에 되파는 것까지 생각하면…….’

확실히 [장신구] 쪽으로 제작하는 게 낫겠군.

감정 결과에서도 [장신구] 제작을 추천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착용할 수 있게 레벨 제한도 내 수준에 맞출 수 있으니까.

“이 또한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다시금 깃털 펜을 집어 들기도 잠시.

마지막 아이템,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

가장 궁금했던 감정 결과를 확인했다.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제작 시, 제작 아이템에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효과 부여 / 회피 확률 상승효과 부여 / 심미 스탯 개방 효과 부여]

[설명 : 같은 무게의 보석과도 바꿀 수 없다는 비단이다. 워낙 희귀하기에 그 가치는 누구도 감히 평가할 수 없으리라.]

무엇보다 의문이었던 건.

바로 [심미] 스탯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나오지 않았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탑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의외의 결과였다.

“으음.”

……마탑도 알지 못한다?

양피지엔 분명 ‘확인된 바 없는 미지의 능력’이라고 적혀있었다.

미지와 진리를 탐구하는 마탑답게.

[흡혈귀 백작의 오브]와 마찬가지로 추신이 덧붙여 있었다.

말하나 마나 정중한 대여 요청이었다.

그래, 궁금하겠지.

미지의 능력.

[심미]의 효과를 확인해야만 그 직성이 풀릴 거야.

하지만.

“유감이군.”

이건 나도 양보할 수 없겠는데?

‘이쪽은 연구 목적이 아닌 생존 목적이란 말이다……!’

물론, 레벨 제한이 낮을수록 장비의 절대적인 성능 또한 떨어지겠지만.

지금 내가 어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란 말인가?

어떤 재료가 됐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제작해서 써먹어야 하는 게 내 현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랑펠의 심미안.

“이미 쓸 곳을 정해둔 참이다.”

그 드높으신 안목께선 이 비늘 비단으로 무엇을 만들지, 처음부터 염두에 둔 참이었으니까. 이내, 내 시야가 허전한 재킷 주머니로 향했다.

스슥─

그런 나는 최종적으로 양피지에 답신을 적었다.

──────

[흡혈귀 백작의 오브] - 대여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 장신구 제작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 - 행커치프 제작

──────

행커치프.

‘……정말 나라면 상상도 못 했겠지.’

손수건이라니.

어쨌거나, 격식과 미적 감각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아이템이었으니까. 거기에다가 그럴싸한 효과까지 챙길 수 있다면 좋으련만.

‘뭐, 까보기 전엔 모른다는 거지?’

[심미] 스탯의 효과.

그건 나에게 달린 게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추신으로 몇 마디를 덧붙이는 것 정도겠지.

-비용에 상관없이 최고의 결과물을 원한다.

스슥─

아주 나답게 말이다.

-마탑의 능력을 기대하지.

.

.

.

……그나저나,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마티스 딘 카를!

그 선임 마법사의 메시지를 잊고 있었다.

뒤늦게 그 내용을 확인해 본다.

아뿔싸.

[현자의 심심풀이]와 같은 증명 거리를 던져준 거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했을 것을. 이건 단순한 부탁에 불과하지 않은가?

-……부유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물론, 얼굴도 친분도 용건도 알 수 없었지만.

넓게 보자면 같은 직장 동료 아니겠는가?

굳이 따지자면 나는 비정규 임시직이지만 아무튼.

‘아직 기다리고 있는 건가?’

약속 장소에 나가기는커녕 사내 메시지를 읽씹한 꼴이라니.

‘잠깐, 부유 정원이라면…….’

마탑의 사교장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찾기야 어렵지 않았다.

연구실에 배치된 서적 중엔 마탑의 구조에 대한 서적도 있었거든.

물론, 사교장이란 사전 지식도 거기서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책상에 앉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여튼, 격식과 절차를 중시하는 이놈의 성질머리!

그것에 융통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상호 간의 합의된 약속이 아니라면 직장 동료라고 해도.

설령 약속 장소에서 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들.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장을 때려치운 건 신의 한 수였다고!

지시한 내용에 따를 수 없다며.

바락바락 상사에게 대드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심지어는 그 머리카락까지 은발.

‘……진짜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기다리고 있을 마티스에겐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고집이 꺾이지 않는다는 건.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인터뷰 거부라든가.

플레이어들에게 예절 교육부터 받으라고 했다든가.

말하자면 끝도 없지, 그 경험에 대해선…….

-곤란하군.

그랬다.

달랑 네 글자.

그것이 나의 답신이었다.

그런데 곧바로 양피지에 글자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내일 오후 시간은 괜찮은가?

거절당한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칼답이었다.

이쯤 되니 그 목적이 궁금해진다.

선임 마법사, 분명 내 자격을 물고 늘어질 게 뻔하거늘.

나는 깃털 펜을 들었다.

-그것 또한 곤란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곤란하다.

오후엔 선약.

그러니까 검술 수련 일정이 잡혀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거절의 의사를 전달.

그러나 이번에도 즉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다음 날 오전 시간은 어떤가?

……이래서야 삼고초려가 따로 없잖아?

제갈량의 마음이 흔들린 이유를 조금은 알겠는데.

물론, 그랑펠의 고집은 제갈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했으니.

승낙한 이유는 정 따위에 흔들린 게 아니요, 단순하게 약속 시각이 오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야 오전엔 어차피 마탑에 있으니까.’

어째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뀐 것 같다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전이라면 만나줄 수 있다.”

……그래, 나 잘났다. 정말.

*

꾸욱─

검을 쥐어본다.

슉─

검을 휘둘러 본다.

그 일련의 행동을 반복해 본다.

‘빌어먹을, 악마 사냥꾼.’

안타깝게도 단순하게 행동을 반복한다고 [스킬]이 생성되진 않았다.

아르카나에서 스킬이란 건 각 클래스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야.’

꼭 클래스 고유 스킬이 아니더라도.

다른 계열 클래스의 스킬은 일반적으로 습득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스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마법』이 그 무언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검기』 또한 그중 하나인 것 같다.

고오오─

나는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바라봤다.

내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쉽지 않겠지만 검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게.”

거기엔 이해나 깊은 깨달음 따윈 없었다.

“자신이 검이고, 검이 자신이다…… 앗?!”

마법과 마찬가지로 직관적인 터득.

그저 보고 따라 하는 것만으로.

나는 검기 또한 따라서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르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 설마! 진정으로 가능할 줄은 몰랐거늘!”

물론, 내 검기는 하르콘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정확하게는 희미하다는 게 맞겠지.

예시카, 에노크와 비교해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호열 경,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곤 있는 건가!”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하르콘.

그러나 그가 저렇게 표현하지 않아도 나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야 검기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몸으로 체감하는 중이었거든.

‘……어째서 체력을 강조했는지 알 것 같다.’

검기에 휘둘린다고 했었나.

정말이지, 그 말을 백분 이해할 수 있었다.

뭉텅이로 체력이 깎여나가는 기분이다……!

그저 검기를 발산하는 것만으로 등줄기에 땀이 흐를 정도였다.

실시간으로 육체에 피로가 누적되는 느낌은 덤이었다.

새삼스럽게 현실을 자각했다.

‘중간 과정을 건너뛴 거나 다름없으니까.’

검기란.

분명 검술의 극에 가까운 경지겠지.

나는 그 경지를 밑 빠진 독에 채워 넣은 셈이니까.

체력이든, 뭐든 극심하게 소모되는 게 당연한 거겠지.

거기에다가 내 레벨을 생각해 보자.

고작 226레벨이다.

하르콘은 고사하고 430레벨의 예시카, 400레벨의 에노크와도 엄청난 격차가 난다.

근력과 민첩의 차이?

그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동안 마력에 포인트를 올인해 온 나였으니까.

그럼에도 엄살은 부리지 않는다.

그 부족함을 보완할 방법이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클래스 퀘스트!’

무려 체력과 근력, 민첩 스탯을 동시에 보완할 완벽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니까 내색하지 않는다.

나는 검기를 거둬들이며 뻔뻔하게 말했다.

“오늘은 유달리 햇볕이 따사롭군.”

날씨를 핑계 삼아서 식은땀을 닦아냈다.

……발버둥도 이정도로 뻔뻔하게 치면 재주다.

하르콘의 요란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전부터 확신하고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네. 호열 경! 그대는 검의 길을 걸어야 하네. 다섯 손가락이 뭔가? 적어도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는……!”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늘어놓던 하르콘이 말했다.

“사실상, 내가 가르칠 건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끝나긴 뭐가 끝나!

하르콘 같은 스승을 또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아직 뜯어먹을……. 아니,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

검기의 습득 여부를 떠나 어딘가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심정 같아서는 내 깨진 밑독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지금부터는 실전에서 깨닫는 단계니 말일세.”

“실전이라.”

“그렇다네! 때마침 이보다 좋은 환경도 없겠지. 유스라 왕국, 주변엔 마물들이 넘쳐나고 있으니까.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검기는 더욱 짙어지고, 그 고유의 색을 띠는 법이니까.”

아하, 그런 뜻이었구나.

그렇다면 괜히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천적관계가 발동하지 않았을 때.’

내 전력은 어느 정도나 되는 걸까?

솔직하게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내 주제를.

내 클래스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악마 사냥꾼.

악마를 사냥할 때가 아니면.

그 나사가 몇 개는 빠진 듯한 성능을 보여주는 클래스.

그런데.

‘……어라?’

털썩─!

나는 쓰러지는 몬스터를 보며 생각했다.

이거 기대,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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