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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41화 (156/489)

◈ 41화. 검은 오랜만이군 (1)

환영한다는 쪽지까지 보냈거늘.

……어째 잠잠하다.

나는 양피지에 휘갈긴 글씨를 바라봤다.

‘사과도 제대로 전했는데 말이지.’

다음 증명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가?

뭐,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게 아니더라도 할 일이야 넘쳐날 지경이었으니까.

일정이 빡빡하단 소리다.

나는 읽고 있던 마법 서적을 덮었다.

‘슬슬 가보자.’

유스라 왕국으로.

언론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유스라 왕국에 관한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누구보다 신이 난 건 대한민국의 매스컴이겠지.

가온과 버서커.

오직 두 길드만 수행하게 된 유스라 왕국 재건 퀘스트.

──────

[단독] 전문가 日, “가온과 이나즈마 순위 변경 확실시돼……. 3위 진입도 꿈이 아니다.”

[이 시각 국회는] “가온이 이끌고 신화가 뒷받침하는 미래를 꿈꾼다…….” 이번 성과는 국책의 결과물이라는 자화자찬 이어져…….

[단독 인터뷰] 남태민 인터뷰 거절,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

──────

그런 기사들을 보고 있으면 말이다.

플레이어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다, 정말.

상상해도 얼마나 피곤한가?

뭔 한마디만 해도 쏟아지는 훈수에.

계속되는 억측에.

인터뷰 요청까지.

‘그런 의미에선 감사할 수밖에 없군.’

이 까칠한 성격에 말이야.

-비켜라. 인내심의 한계다.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그러므로 질문은 받지 않겠다.

카메라 앞에서 필터로 거르지 않고 내뱉었던 말들.

……정말 다시 떠올려도 오글거려 죽을 것 같은 대사였지만.

그래도 그 덕분인가?

내겐 섣불리 기자들이 다가오는 일이 없었으니까.

아니, 기자들뿐만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었다.

마탑의 로비.

포탈 주변에 몰린 많은 플레이어들.

“아니, 그냥 그 시간에 균열이나 돌자니까……?”

“헉. 이호열이다. 이호열!”

“쉿! 일단, 다 입부터 다물어.”

흐르는 정적─

시끄럽던 그곳이 일순간 조용해진다.

과거의 나였다면 안절부절못했으리라.

이것들이 날 따돌리나.

괜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확실하다.

이런 반응에도 슬슬 적응되고 있었으니까.

나는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 침묵을 흡족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과 비슷한 그림이 떠올랐다.

‘……하긴.’

이 성깔은 잘나가는 플레이어들만 모아둔 랭커들 앞에서도.

심지어는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 앞에서도 한결같았었지.

그러니까 이 정도는 굳이 감상을 남길 필요도 없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또각─

나는 포탈에 진입하며 생각했다.

어떻게 갈수록 뻔뻔해지냐, 호열아.

.

.

.

유스라 왕국을 찾은 이유야 간단하다.

‘하르콘을 만나야 해.’

그에게 ‘검기’에 대한 의문을 물어봐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할 건 확인해 봐야겠지.

청렴을 떠나 얻은 걸 활용하지 않는 건 멍청한 거니까.

‘암, 그렇고말고.’

히든 퀘스트를 성공하며 획득한 보상.

유스라 왕국과의 관계도, 영향력이 최대치로 상승한 나였다.

그 결과, 유스라 왕국에서의 [권한] 기능이 활성화됐다.

‘제대로 알아두자.’

나는 그 권한 기능을 정확히 파악해 둘 생각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왜, 인터넷에서 적잖이 떠들어 대야지 말이야.

-ㄹㅇ 가온이랑 버서커는 축복받은 거 아니냐?

-퀘스트로 관계도, 영향력 쌓아두면 나중에 왕국 재건 끝났을 땐 작위 같은 것도 받을 수 있는 거잖아? ㄷㄷ

-샤이닝이나 스칼은 속 터지겠다ㅋㅋㅋㅋ 유스라 왕국에선 레오니랑 남태민한테 존댓말 써야댈지도 모름ㅋㅋㅋㅋ

관계도와 영향력.

그에 따른 작위 획득의 가능성까지.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내려오는 상식이요.

그게 바로 플레이어들이 관계도와 영향력에 집착하는 이유였다.

‘물론, 규모에 따라서 중요성이 달라지긴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의 영향력.

한 국가에서의 영향력.

그 둘을 같은 선에 두고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왜, 마을 촌장이 작위를 줄 순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유스라 왕국에서의 관계도와 영향력의 가치는 말하면 입만 아플 정도였다.

무엇보다 유스라 제도는 최초로 현실에 등장한 아르카나의 국가였으니까.

-일단 포텐이 미쳤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전설 속 보물섬인데ㅋㅋ

-작위고 뭐고 광산 소유권 하나만 따도 ㄹㅇㅋㅋ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발전 가능성!

원래부터 그 자원이 풍족한 유스라 왕국이거늘.

최초 등장 국가가 되면서 그 자원을 백분 활용하며 발전할 기회가 닿은 것이었다.

플레이어들의 기대감도 덩달아 커지고 있었다.

-일단 주변에 몬스터가 리젠되는 게 크다

-왕국이랑 사냥터 왔다갔다하면서 레벨 올리고ㅇㅇ

-나중엔 뭐, 경매장이나 상점도 생기지 않을까??

-ㄹㅇ 그냥 지금이라도 가온이나 버서커에 말단으로 들어가는 거 어떻게 생각하냐 다들???

-ㅁㅊㄴ 누가 받아준 대냐?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내 기대감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최대치라니까.’

……뭐, 콩고물이라도 크게 떨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이번에도 나를 움직이는 건.

이 가슴 속의 긍지였다.

“현명하게 판단해야겠군.”

막대한 영향력.

그 영향력과 동반되는 책임감.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나는 속으로 탄식을 머금었다.

‘……이래서 뭐가 남겠냐고!’

자고로 자기 몫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 법이다.

말하지 않으면 누가 챙겨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직장인으로서.

사회란 정글에서 구르며 깨달은 진리거늘.

‘……어라?’

하지만 나의 신세 한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최대치의 관계도와 영향력.

그게 보통 보상이 아니란 것을.

이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굳이 나서서 챙기지 않아도?’

멀리 보이는 황금 궁전.

그 궁전을 배경으로.

나를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내 하나.

사내는 바로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였다.

“오셨습니까? 은인이시여!”

나는 환하게 웃는 하쿠나를 보며 생각했다.

‘왕이 버선발로 맞아주는 모습을 보고도 당연하다 여기다니. 어쩌면 이거 갈수록 뻔뻔해지는 게 아니라……?’

내 뻔뻔함은 이미 최대치에 다다른 게 아닐까, 하고.

*

“하나, 둘!”

우렁찬 기합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기사단장, 하르콘 킹스가드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평온인가?

“목소리가 작구나. 다시!”

어째서인가, 머릿속이 차분했다.

모험가들의 세계로 소환된 이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이 든 날이 없었거늘.

어젯밤엔 단 한 번도 뒤척이지 않고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하르콘은 주변 풍경을 바라봤다.

모험가들의 말로 빌딩이라 부르는 건물도.

요란스러운 철 마차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고향과 비슷한 유스라 왕국의 환경 때문일까?

‘아니.’

하르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을 괴롭히던 건 조급함이었으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무사하실까?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거지?

내가 편히 눈을 붙여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그 섣부른 걱정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이 모든 게 호열 경 덕분이군.’

그래, 모든 게 호열 덕분이었다.

하르콘은 호열과 함께하며 많은 것을 깨달았으니까.

‘당황스러운 것은 호열 경도 마찬가지였겠지.’

자신들의 고향과 모험가들의 세계.

두 세계가 뒤섞이는 대격변.

혼란스러운 건 모험가들도.

호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악마의 출현까지.

자신들처럼 낙담할 여지는 충분했거늘.

하르콘은 다시금 감탄을 삼켰다.

‘경은 어찌 그리도 차분할 수 있었던 걸까.’

호열에게선 작은 동요조차 느껴지지 않았었지.

심지어는 칠죄종 탐욕.

자신조차 두려움에 떨게 한 거악과의 전투에서도.

그런 호열의 행동에서 숭고한 결단이나 희생은 없었다.

마치 그저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거악에게 나아가는 호열만이 있었을 뿐.

그것이 하르콘의 정신을 깨우는 데에 큰 영향을 줬다.

‘그 결단조차 호열 경에게는 당연한 일이라는 거겠지.’

이 얼마나 커다란 그릇을 가진 사내란 말인가?

단연코 그런 호열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거늘.

하르콘은 알고 있었다.

‘물론, 노력한다고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겠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

두근─

어찌 보면 당연한 그 한마디가.

멈춰있던 사자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였다.

그래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다시금 훈련을 시작했다.

챙─!

맞부딪히는 기사들의 검.

하르콘이 열정적으로 기사들을 고양시켰다.

“날을 세워라! 자세를 가다듬어라!”

이것이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세계의 악마조차 쓰러트리지 못하면서 어찌 고향의 악마를 쓰러트린단 말인가!”

이것이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챙채챙─!

하르콘은 이를 악문 기사들을 보고 생각했다.

‘더 이상 미련은 없다.’

호열을 통한 마탑과의 접촉.

하르콘은 그에 대한 계획 또한 거둬버렸다.

그것 또한 한시라도 빠르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조급함에 저지른 실수였으니까.

깨달음을 얻은 마당에 실수를 반복할 순 없는 노릇이겠지.

“경에게 또 한 번 배려를 받았군.”

유스라 왕국 재건에 동참하게 됐지만.

그건 훈련의 연장선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왕국에 위협이 될만한 마물이나 적을 처리하는 게 기사단의 역할이었으니까.

하르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기합 소리.

차분한 머릿속.

아마도 한동안 걱정할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그런 하르콘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바, 방금 뭐라고 했는가? 호열 경?”

이번에도 다름 아닌 호열 때문이었다.

당황한 하르콘이 되물었다.

“그건 설마, 검에 입문하고 싶다는 말인가……?!”

.

.

.

“후우─”

한숨과 함께 예시카는 투구를 벗었다.

땀에 젖은 흑갈색 단발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그녀의 가늘어진 눈매가 하르콘을…….

아니, 정확하게는 하르콘 곁의 은발 머리.

호열에게 향했다.

‘마법사.’

그것도 마탑과 관련된 마법사.

예시카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리를 탐구한다는 단 하나의 목적.

그 목표로 향하기 위해 움직이던 그들의 행보를.

‘……미친놈들.’

그건 ‘절멸’이었다.

걸림돌이 됐다는 이유.

단지 하나만으로 그 지역의 모든 게 반나절 만에 증발해 버렸다.

예시카는 그 뒷수습을 위해 그곳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습할 것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휘말린 사람이 있었는지.

그 사실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심지어는 풀 한 포기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호열은 무언가 달랐다.

정말, 마탑과 관련된 마법사가 맞단 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무엇보다 자신을 떠받치던 돌계단과 용암을 가르던 그때 호열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러나 예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도리도리─

그 기억만큼이나 선명한 게 바로 편견이었으니까.

‘……아직 잘 모르겠어.’

정말, 다른 마탑 마법사들과 다른 것일까?

하지만 이내, 들려오는 대화는.

그런 예시카의 의심 섞인 눈초리조차 휘둥그레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르콘 경. 검기란 실존하는 것인가?”

……검기(劍氣)라고?

잠깐만, 어떻게 마법사가 검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단장님께서도 놀라는 게 당연했다.

그야 검기라는 건…….

“호열 경, 그게 무슨 소리인가?”

“검기. 그대의 검에 일렁이던 빛을 말하는 것이네.”

“……설마, 호열 경. 자네 그 빛을 본 겐가?!”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타고난 재능과 끊임없는 수련.

그 두 가지가 동반되어야 간신히 검기를 목격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런가. 그렇다면 나도 검기를 다룰 수 있겠군.”

검기를 다루겠노라.

호열이 그렇게 선언해 버렸으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에노크가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저 마법사 나리.”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예시카도 같은 심정이었다.

‘사실 알아차린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야. 그런데?’

검기를 다루는 것은 또 다른 문제란 말이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에서조차 검기를 다룰 수 있는 이는 단장을 포함, 자신과 에노크에 불과했으니까. 무엇보다 호열은 마법사가 아니던가?

예시카는 솔직하게 어이가 없었다.

“그 전에 제대로 검을 쥘 수나 있겠어?”

호열에게 검을 건네는 하르콘.

‘단장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예시카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야 마법사의 육체는 나약하니까.

하루종일 책상 앞에서 책을 펼치는 마법사들이다.

그런 가냘픈 팔뚝으로 어떻게 검을 휘두르겠다고…….

“……?!”

그러나 예시카의 편견은.

스륵─

“……뭔데. 저 마법사 나리?”

호열이 걸쳤던 재킷을 벗는 순간.

말끔하게 깨져버렸다.

하얀 셔츠 아래로 드러나는 근육.

그건 마법사의 신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해 보였으니까.

‘……피부가 하얘?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예시카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기도 잠깐.

호열은 하르콘이 건넨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검을 치켜드는 순간.

“!!!”

일동 경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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