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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6화 (151/489)

◈ 36화. 청렴결백 (2)

구마의식 발동.

이제부터는 정신력 싸움이다.

나는 왕좌에서 일어난 거악을 바라봤다.

[칠죄종 탐욕의 화신 : Lv.650]

그 외관은 사내였다.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아스큐라 백작과는 다르군.

‘오히려 남철민 때와 같다.’

남철민이 임프에게 몸과 정신을 빼앗겼다면.

저 사내는 칠죄종 탐욕에게 빙의당한 거겠지.

임프와 칠죄종 탐욕.

하급 악마와 거악.

그 격에는 레벨보다 더한 격차가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다. 이곳에 내가 있다.”

이젠 그럭저럭 참고 넘길만한 오글거리는 대사도.

절대 꺾이지 않는 가슴 속 긍지도.

나는 평소대로라는 것이다.

그러나 녀석은 아닌 모양이었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어떻게……?”

되물어 주고 싶은 마음인걸.

뭐, 거악이나 되면서 악마 사냥꾼 처음 보느냐고.

근데 말했다시피.

슥─

사냥감과는 말도 섞지 않는 성격이라서 내가.

거악, 녀석이 놀란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상태이상에서 벗어났어?”

구마의식이 시작된 순간.

곧바로 정신을 차린 남태민과 레오니.

‘내색은 못 해도 진짜 찌르는 줄 알고 식겁했다, 내가…….’

그건 동시에 녀석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슥─

나는 은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탐색, 간섭, 발현.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단검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마력의 잔량은 충분하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리고 가온과 버서커, 두 길드의 도움으로 나는 마법 하나 발현하지 않고 거악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보다 창의적인 발현이 가능하다.’

아스큐라 백작 때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단 말이다.

그땐 은제 단검에서 발현한 은말뚝을 꽂아 넣는 게 고작이었지.

하지만 나는 그 후로도 멈추지 않고 발버둥 쳐왔다.

이 고고한 긍지에 가라앉아.

익사하지 않게 최선을 다했단 말이다.

그 발버둥의 결실이 눈앞에서 펼치고 있었다.

콰드드득─!

궁전의 밑바닥.

돌, 대리석에 간섭.

순식간에 벽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은제 단검을 탄환의 형태로 발현.

살상력 강화를 위해 탄환의 외관에도 간섭한다.

회전력의 상승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소용돌이.

그러니까 드릴 형태가 적합하다.

둥실─

허공을 부유하는 수백 개의 은제 탄환.

조잡한 말뚝에서 수백 개의 탄환이라니.

감격스럽다.

깜지를 쓰듯.

하루하루 A4 용지를 가득 채운 보람이 느껴진다.

그러나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

그것도 모자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내 어깨엔 귀족으로서의 책임이 짊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내겐 『마법』만 있는 게 아니다.’

마법과는 명백히 다르지만.

서로의 장단점이 있는 [스킬] 또한 존재한다.

───────

사격 마스터리 (26%) : 사격의 정확도가 상승한다.

───────

탄환에도 사격 마스터리 효과가 적용될까.

확인해 보지 않았으니 그 사실을 알 순 없겠지.

그러니 지금은 더욱 확실한 길을 선택할 순간이다.

콰드드득─

마찬가지로 허공에 떠오르는 대리석 파편.

나는 마법을 발현.

대리석 파편으로 화살대를 만들었다.

은제 탄환과 대리석 화살대를 이어 붙였다.

화살은 확실하게 사격 마스터리에 영향을 받았으니까.

‘마법과 스킬의 융합.’

거기에다가 구질구질하게 하나를 덧붙이자면…….

질량이 커질수록 그 위력도 커지는 법.

상식 수준의 과학까지 추가다.

그래, 이것이 내가 보는 풍경이었다.

“……대단하군. 호열 경.”

남의 평가 따윈 안중에도 없는 성격.

하르콘에게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고 한들.

심정에 들뜸은 없었다.

그저 나는 이 순간 궁금할 뿐이었다.

우두커니 멈춰 서있는 거악의 시야가 말이다.

*

‘……나는 지키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것이 유스라 왕국의 마지막 왕.

하쿠나의 미련이었다.

유스라 왕국에 부족함은 없었다.

땅과 바다에서 나는 음식은 메마르지 않았고, 반짝이는 보석들이 넘쳐났으며, 백성에게서도 근심이나 걱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가? 그대가 보기에도 아름답지 않은가?”

하쿠나는 그런 자신의 왕국이 보기에 흡족했다.

그래서 자랑스럽게 섬을 찾은 이방인을 대접했다.

자신의 보물과 백성을 자랑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유스라 왕국에 정박한 거대한 함선.

이방인이 군대를 이끌고 유스라 왕국을 침략했다.

땅, 바다, 광산.

심지어는 백성들까지 포로로 잡아들였다.

다툼이 없던 유스라 왕국.

당연하게도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왕국의 모든 것이 짓밟혀 나갔다.

“서둘러 도망치십시오! 나의 왕이시여!”

“크흑! 왕이시여. 부디 훗날을 기약하셔야 합니다!”

“왕이시여! 어서……!! 크아악!!”

하쿠나는 왕좌에 앉아 쓰러지는 병사를 바라봤다.

자신의 왕국이 무너지고 있었다.

멍하니 참상을 목격하던 하쿠나가 멱살을 잡혔다.

이방인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미련한 족속에겐 너무 과분한 섬이라서 말입니다.”

“……고작 그따위 이유 때문인가?”

“당연하지! 미련한 왕이여. 당신께선 이 보석의 가치가 얼마인지 알고 있으십니까? 우리 왕국에선 이 보석 하나로 평생을 먹고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귀한 보석이 여기선 애새끼들 장난감 취급을 받고 있어! 미개하기 그지없지!”

“……내게 말한다면 나누어줄 수 있었다.”

“먹고 떨어지란 소린가? 지랄이군.”

훽─

이방인은 하쿠나가 쓰고 있던 왕관을 낚아채곤 그를 내동댕이쳤다.

왕좌 앞에 쓰러진 하쿠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의 것이다.

유스라 왕국.

이 섬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란 말이다.

누구도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단 말이다.

그때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탐욕스러운 어리석은 왕이여.

“……?”

누구의 목소리인가.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힘을 원하는가?

……그저 나는 원한다!

나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좋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내, 고막을 찌르는 소름 끼치는 비명.

이후 찾아온 기나긴 어둠…….

그리고 지금이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저는 지금 전설 속의 보물섬 유스라 제도에 나와 있습니다.”

전설 속 보물섬이 아니다.

유스라 왕국은 오직, 나만의 왕국이다.

“일단, 섬의 보물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야.”

섬의 보물이 아니다.

오직 나만의 보물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가만히 있을 거야?

-다들 네 보물을 빼앗고 있는데?

-네 마음을 온전히 이해한 나만이 널 도울 수 있을걸?

그렇다면 나를 도와라.

아득히 먼 옛날처럼.

나를 도우란 말이다.

-……옛날? 뭐, 아무래도 좋아. 계약 성립이야.

그리고 어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자신의 왕좌가 보였다.

황금의 궁전이 보였다.

과거처럼 궁전에 들이닥치는 쓰레기들이 보였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계약을 맺은 이상.

몸과 정신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괜찮다.

나의 왕국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까짓 육신 따윈 얼마든지…….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어떻게……?”

……그런데, 너는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어째서인가, 자신의 몸이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은발.

이질적인 차림새.

그러나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

자신의 몸을 차지한 녀석이 정체 모를 사내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녀석은 자신의 입으로 아무런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나약한 인간이여, 감히 나를 기만하려 들지 마라. 나는 거악, 칠죄종 탐욕이다. 비록 화신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도 너 같은 인간쯤은……!!”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콰드드득─

“이, 이게 대체?”

그저 뒷걸음질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땅에서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벽이 솟아올랐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 안 돼!”

허공에 떠오른 수백 개의 은 덩어리.

몸을 차지한 녀석이 격하게 반응했다.

하쿠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래서 어떻게 내 보물을 지키겠다는 것이냐!’

약속과 다르지 않은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입으로 내뱉는 말만 들려올 뿐.

“말이 되질 않는단 말이다. 내가 어째서 인간에게……?”

푹─!

이내, 직접적인 격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거대한 은화살이 날아드는 것도 모자라.

꺼지지 않는 화염이 몸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하쿠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 보물들을 빼앗기고 만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그래! 좋다! 나와 계약을 하자!”

……뭐라고?

“나와 계약한다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보이지 않느냐? 이 찬란한 황금 궁전이 모두 네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드높은 천장.

찬란한 장식.

광활한 크기.

이 황금 궁전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단 말이다!

하쿠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속았다.’

하쿠나는 그제야 떠올렸다.

자신이 계약한 녀석의 정체를.

스스로 말했다시피 이 녀석은 악마, 그것도 거악이었다.

‘결국, 너조차도 나를 기만한 것이냐?’

절망감에 분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더없이 차가운 음성이 들려온 건.

“그 모습이 추악하구나. 어리석은 악마여.”

흔들림 없는 목소리.

은발 사내가 말을 이었다.

“덧없는 것에 매달리는 모습이 심히 하찮다.”

……덧없다?

이 찬란한 황금 궁전이?

이해할 수 없는 건 하쿠나도, 악마도 마찬가지였다.

“너, 그게 무슨 소리……?!”

말문이 막혔다.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르르륵─!

황금 궁전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대리석, 황금, 보석.

무엇하나 가리지 않았다.

모든 게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단 말이다!”

절규하는 악마의 목소리.

이내, 시야에 비치는 사내의 얼굴.

사내의 동공이 보였다.

‘!’

동요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

자신에게 황금 궁전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모든 부귀영화가 재로 변하는 것 또한.

익히 경험한 적 있다는 것처럼.

사내의 동공은 더없이 잔잔했다.

그 잔잔한 호수 같은 동공에 비추는 것은.

‘……저 모습이 정말 나란 말인가?’

탐욕으로 타락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이었다.

또각─

사내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리석지 않은가? 눈을 감는 순간,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슴 속의 긍지뿐인 것을.”

긍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하쿠나는 깨달았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결국, 지키고 싶다는 건 변명이었다.

하쿠나는 마지막 순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던 병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그들은 웃고 있었다.

못난 자신을 왕으로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며.

하쿠나는 절망했다.

‘그런데 나는, 나는……!!’

욕심을 넘어선 탐욕 때문에.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고귀하게 희생한 병사들을 되살려 다시금 그들을 고통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포로로 붙잡힌 백성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발버둥 칠 수 있었으면서도 그들을 외면했다.

그런 자신에게 군주로서의 책임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섬의 보물을 지키겠다는 탐욕만이 남았을 뿐.

“악마 따위가 어찌 긍지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만.”

사내의 말이 옳았다.

타락한 자신의 모습은 악마와 다름없겠지.

그런 자신에게 긍지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답답하던 가슴이 차분해졌다.

‘……미안하구나.’

늦었지만 곁으로 따라가겠다.

하쿠나는 눈을 감았다.

순순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사, 살려줘! 아, 아직 죽고 싶지 않……!!”

서걱─

고맙다, 이름 모를 은인이여.

더 이상 자신이 추태를 부리지 않게 해줘서.

“……?”

……그리고 하쿠나는 눈을 떴다.

어째서 눈이 떠지는 거지?

분명 목에 칼이 들어오는 감각이 느껴졌거늘.

게다가 지옥에 떨어진 것치곤 너무 밝은 것이 아닌가?

“……!”

천천히 돌아오는 시야.

그곳엔 은발의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그대는 긍지를 가져라.”

……이건?

그런 사내의 손에는 왕관이 들려있었다.

빛이 바랬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하쿠나, 자신의 왕관이었다.

“……?!”

사내가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며 말했다.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름 모를 왕이여.”

“……!!”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거, 확인하는 데만 한참이겠네.

제대로 된 정산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나는 섬의 보물, 왕관을 꺼내 들었다.

[섬의 보물, 부서진 왕관]

[등급 : 에픽]

[제한 : Lv.500]

[효과 : 없음]

[설명 : 오래된 왕관이다.]

“그럼에도 그대는 긍지를 가져라.”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방금까지 거악에게 휘둘렸던 사내와 이 낡은 왕관에 얽힌 스토리 따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왕관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는 확실히 알지.

[히든 퀘스트 : 유스라 왕국]

전설 속 보물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난 왕은 과오를 바로잡고 긍지를 되찾기 원한다.

─유스라 왕국의 왕에게 왕관을 하사한다. (진행 중)

뭐, 당장은 그거면 된 거 아니겠어?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름 모를 왕이여.”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잠깐만.’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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