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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5화 (150/489)
  • ◈ 35화. 청렴결백 (1)

    하르콘은 제국에서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주군의 씁쓸한 음성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시련이 끝나지 않는군. 하르콘.”

    “……폐하.”

    “신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대체 무엇일까? 황제가 되어도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군. 빛 하나 들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 내던져진 기분이야…….”

    악마가 나타나고 모험가들이 사라졌다.

    그것도 모자라 제국의 영토가, 백성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심지어는 마탑조차.

    하르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악마라고.

    그러나 이유를 안다고 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 강함을 넘어서 악마와 맞서 싸우는 것은 절망의 연속이었으니까.

    그의 주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북서부에서 악마 군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군. 군단장이라. 이번 원정에서도 수천 명의 병사가 죽어 나가겠지. 내 손으로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거야.”

    “폐하, 그런 말씀은…….”

    “하르콘. 나는 매일 밤 신에게, 여신에게 묻는다네.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이런 우리를 조금이라도 가엾게 여긴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라도 알려달라고.”

    황제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응답은 없었지.”

    하르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주군의 검으로서 의무를 다할 뿐이었다.

    “악마 군단장을 처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폐하.”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원정 도중 정신을 차렸을 때.

    “……!”

    하르콘은 낯선 세계에서 눈을 뜨고 말았다.

    그때 처음으로 하르콘은 주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정말, 신에게 버림받은 듯한 그 기분을.

    “어째서냐! 어째서 우리가! 우리는 악마 군단장을……!!”

    이 낯선 세계는 모험가들의 고향.

    사라졌던 모험가들이 이곳에 있다.

    증발했던 건물, 백성, 마탑 또한 이곳에 존재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땐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건 금방이었다.

    “……그대들도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혼란에 빠진 건 모험가들의 고향도 마찬가지였으니.

    악마의 마수가 이곳까지 뻗쳐온 것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생각이 닿은 것은 마탑이었다.

    ‘혹시 마탑이라면.’

    그들의 지혜라면.

    이 상황을 타개할 비책이 있진 않을까.

    그러나 황제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마탑의 마법사들이 아니던가?

    그들의 도움을 바라는 건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소문이 들려왔다.

    “……유스라 제도?”

    전설 속의 보물섬.

    유스라 제도가 이 세계에 나타났다는 이야기.

    실낱같은 희망?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설령 유스라 제도의 보물이 존재한다고 한들.

    그 보물이 이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럼에도 하르콘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유스라 제도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나는 질 수 없다.’

    모든 일의 원흉이 악마라면.

    그런 악마의 농간에 끝까지 저항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던 중 한 사내, 모험가와 만났다.

    ‘저 브로치는? 분명 마탑의……!’

    처음에는 둘도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탑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모험가가 있을 줄이야.

    그를 통한다면 마탑에 접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그 생각이 달라졌다.

    ‘……내 불순한 목적을 알아채고도.’

    문제 삼기는커녕.

    너그럽게 넘어갔다.

    그 너그러움은 전투에서도 나타났다.

    그만한 마법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그저 길을 열어주다니.

    오만한 마탑의 마법사들을 익히 봐온 하르콘.

    그로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참된 귀족의 태도로다……!’

    그때부터였다.

    “호열 경.”

    모험가, 호열에 대한 칭호가 바뀐 것은.

    그러나 감탄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섬이 흔들리고 모습을 드러낸 황금의 궁전.

    하르콘은 소름 끼치는 기운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도 악마가 존재하다니.’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녀석이었다.

    하르콘은 탄식을 삼켰다.

    ‘결국, 이번에도 녀석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단 말인가?’

    하지만 탄식은 곧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

    “거악을 자처하는 비열한 악마여.”

    “……!!”

    그것 역시도 호열 덕분이었다.

    하르콘은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악마.

    그것도 거악을 자처하는 녀석 앞에서 이리도 자신감이 넘칠 수 있단 말인가?

    ‘그 흔들리지 않는 기품은 대체 무엇인가?’

    이런 태도는 자신, 심지어 황제에게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르콘은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제 불찰입니다, 폐하.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호열 경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제국에 악마들의 마수가 뻗쳐오기도 전에.

    녀석들을 처단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도 잠깐.

    이내, 하르콘의 눈매가 번뜩였다.

    ‘그래. 이건 실수를 바로 잡을 기회다.’

    더 이상의 변명은 필요 없었다.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도 악마는 존재했으니.

    이것이 신의 시련이든, 천벌이든 상관없었다.

    ‘맞서 싸우리라.’

    이 세계의 악마조차 처치하지 못하면서 어찌 제국과 황제를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하르콘의 결심을 지지하듯 호열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신 따위 믿지 않는다.”

    과연, 호열 경다운 선언이로군.

    ‘어쩌면 우린 마음이 잘 맞을지도 모르겠네.’

    하르콘이 웃음을 머금었다.

    두근─

    잠자던 사자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

    라이언 하트 기사단.

    어째서 이들이 아르카나 최강의 기사단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잘 알겠다.

    까드드득─

    뼈 갈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스켈레톤들.

    저 볼품없는 놈들의 레벨이 무려 500레벨이었다.

    확인하는 순간, 경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레오니의 어이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이도 지랄 났네. 진짜루.”

    물론, 그 표현 수위에 차이는 있겠지만.

    나도 동감한다.

    아무리 거악이라고 해도 난이도가 뭐 이래?

    [잠들지 못하는 병사 : Lv.500]

    [잠들지 못하는 병사 : Lv.500]

    [잠들지 못하는 병사 : Lv.500]…….

    저런 게 한두 마리였으면 말도 하지 않았겠지.

    멀리서 봐도 빼곡할 정도로 많다.

    언데드가 그 약점이 명확한 종족이라고 한들.

    레벨 차이가 이렇게 극심하다면 약점조차 무뎌질 수밖에 없겠지.

    ‘아무래도 마력을 아끼는 건 불가능한 건가.’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심장을 바쳐라. 호열 경이 거악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문득, 들려오는 하르콘의 외침.

    “심장을 바쳐라!”

    그에 라이언 하트 기사들의 사기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최전방으로 나서는 기사들.

    그들이 말 그대로 스켈레톤을 쳐부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하르콘을 포함한 3인의 기사들.

    [하르콘 킹스가드 : Lv.600]

    [예시카 브라이트 : Lv.430]

    [에노크 로렌 : Lv.400]

    고오오─

    은은하게 빛나는 하르콘의 검날.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해골들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하르콘의 레벨은 스켈레톤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였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러나 예시카와 에노크.

    저 두 기사의 활약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레벨에서는 확실한 열세다. 하지만.’

    하르콘만큼은 아니더라도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레벨, 그 이상의 강함이라는 것.

    나는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빛나는 검. 역시 저건가.’

    고오오─

    하르콘처럼 선명한 빛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시카와 에노크.

    두 사람의 검에서도 희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게 레벨조차 상쇄하는 강함의 원천이군.

    나는 그랑펠의 시선으로 그 빛을 바라봤다.

    마치 처음 『마법』을 목격했을 때처럼.

    탐색, 간섭, 발현…….

    나도 모르던 단어를 종이에 휘갈길 때처럼.

    나는 저 빛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검기(劍氣).’

    정말 그런 게 존재하는가?

    나조차도 의문이 뒤따랐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마법처럼 경험해 보면 알게 될 일이니까.

    그리고 이 순간 그것보다 중요한 건.

    ‘그나저나 뭐? 날 위해서 심장을 바쳐?’

    어째 갈수록 극진해지는 하르콘의 태도였다.

    ‘무섭다. 무서워.’

    물론, 나는 그 선언조차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당연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같이 있던 플레이어들은 격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어떻게 저 정도의 친밀도를 쌓은 거야?”

    “으으, 괴물이다. 괴물.”

    “역시 상상 이상이십니다, 호열 씨!”

    남태민.

    최상위 랭커 플레이어에게도 흔한 광경은 아닌 모양.

    이거,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한 상황이기도 하겠지?

    뭔지는 몰라도 우쭐하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내 어깨는 무거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 피곤한 설정 덕분에.

    나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희생에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찾았군.”

    왕좌에 앉아있는 그림자.

    그 머리 위로 떠오르는 메시지.

    [칠죄종 탐욕의 화신 : Lv.650]

    나는 그 거악의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또각─

    자신감 넘치게 내딛는 걸음.

    꼿꼿한 허리와 목의 각도.

    드높은 왕좌에도 굽히지 않는 시선.

    나는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앉아있을 생각인가. 하찮은 악마여.”

    언제나처럼.

    “열등한 족속답게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구나.”

    .

    .

    .

    “!”

    남태민과 레오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다들 물러나!!”

    “가까이 오지 마!!”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악마족이었다.

    절대적인 레벨보다 강한 것은 기본.

    끔찍한 상태이상을 걸어대는 악마족.

    ‘머릿수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자신보다 레벨도, 장비 아이템의 수준도 떨어지는 길드원들은 조금도 견딜 수 없다.

    그런 판단에 내린 명령이었다.

    그렇다곤 하지만.

    “씨발 진짜.”

    레오니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신이라고 멀쩡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현재 자신의 레벨은 352레벨.

    무려 300레벨의 차이였다.

    “……이거,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지?”

    369레벨.

    남태민이라고 상황이 다르진 않았다.

    광전사와 야만전사.

    전황이 불리할수록 그 투쟁심이 상승하는 그들이었지만.

    오히려 그 뛰어난 전투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좆 됐다고.

    그러나 두 사람은 상황 판단이 빨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도.’

    짐이 될 순 없다.

    결심한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일단, 버틸 수 있는 데까진 버텨보겠습니다. 다만, 더 이상 상태이상에 저항할 수 없게 되면……. 제가 눈치껏 전투에서 빠지겠습니다.”

    “나도…… 요. 일단 싸우다가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아킬레스건 끊어버릴 테니까…… 요.”

    “오, 그거 괜찮은 방법이네.”

    스스로 아킬레스건을 끊겠다.

    과연, 광전사와 야만전사다운 선언.

    듣기만 해도 무식한 방법이지만 최선의 판단이었다.

    두 사람은 흔히 봐왔으니까.

    상태이상 걸려 아군에게 칼을 겨누는 플레이어를 말이다.

    아군에게 위협이 될 바엔 차라리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게 나았다.

    부상이야, 살아남으면 치료할 수 있었으니까.

    “……?!”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왕좌에 앉아있던 녀석이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칠죄종 탐욕의 화신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뭐야, 이 메시지는?

    “이런 씹.”

    단 한 순간도 저항할 수 없다고?

    보통 악마가 아니다.

    말 그대로 ‘거악’이다.

    이대로라면 상태이상에 걸리는 것도 시간문제다.

    아군에게, 호열에게 칼을 겨눌지도 모른다.

    빨리 물러서야…….

    [참을 수 없는 욕구에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냥 이 답답한 가슴을 그어버리면.

    모든 게 끝나는 거 아닐까.

    [상태이상 : 탐욕이 발생합니다.]

    두 사람이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으려던 순간이었다.

    호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다.”

    그건 더없이 너그러운 목소리였다.

    “이곳에 내가 있다.”

    가슴 속에 들끓던 탐욕조차 잠재울 만큼.

    챙─

    바닥에 떨어지는 두 자루의 검.

    ……내가 무슨 생각을?

    그 말에 불현듯 두 사람은 정신을 차렸다.

    그건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호열이 거악의 상태이상을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거만하게 왕좌에 앉아있던 것치고는.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어떻게……?”

    불안하게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그에 대한 증거.

    [‘흡혈귀 백작의 오브’가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칠죄종 탐욕의 화신을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악마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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