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2화 (147/489)

◈ 32화. 기초가 중요한 법이지

절규.

남태민의 얼굴이 동명의 명화처럼 일그러졌다.

“……으아아아아아!!”

갑자기 소리를 지르다니.

몬스터는 보이지도 않는데.

광폭화라도 발동시킨 건가.

“뭐야. 갑자기 뭔데, 남태민?”

“형, 뭐 잘못 먹었어요?”

“그러게 내가 아까 컵라면 작작 먹으라고…….”

길드원들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의 감정 변화를 알아차린 건 역시나.

물보다 진한 피.

형, 남철민밖에 없었다.

-……후우. 그래, 내가 쎄하다 했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호열 영입 추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유스라 제도를 공략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이언 하트 기사단.

저 괴물 NPC들을 이끌고 나타나다니!

차라리 일찌감치 포기했으면 충격이라도 덜 했을 것을.

하지만 이로써 깔끔하게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태민아. 이제 우린 플랜 B로 갈 수밖에 없다.

과연, 분석관답게 빠른 판단을 내리는 남철민이었다.

그가 말하는 차선이란 간단했다.

-우호 관계, 그게 안 되면 적대 관계만큼은 피해야지.

감당할 수 없으면 건드리지도 말자.

남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직접 보니까 분노조절장애가 잘해가 되네.”

사람만 한 대검과 한손검.

크기는 다르지만 하르콘과 마찬가지로 검을 휘두르는 남태민이었다.

그렇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수준의 차이를.

그건 옆 섬에서 건너온 광전사도 마찬가지였다.

“으갹?!”

괴상한 소리를 낸 건 레오니였다.

“……언니, 그거 뭐 새로 개발한 애교임?”

그 입 닥치라고.

당장 태클을 걸어줘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 그럴 정신도 없었다.

전투밖에 모르는 광전사의 본능.

레오니는 반사적으로 견적을 내기 시작했다.

‘……전면전? 기습? 다구리?! 아니 뭘 어떻게 해도.’

하르콘 킹스가드.

저 늙은이에겐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레오니는 벅벅 머리를 긁었다.

“으아아씨. 진짜!!”

마지막 섬이란 말이다.

섬의 보물을 획득하지 못한 만큼.

제대로 미쳐 날뛰어 주겠다, 다짐했는데.

“이건 반칙이잖아!”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라니.

갑자기 저것들이 튀어나오는 게 어딨어?

이래서야 섬의 보물은커녕.

네임드 몬스터에게 처치 기여도나 따낼 수 있을까.

터벅터벅─

레오니는 죽상이 돼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엥?”

작은 키.

상대적으로 좁은 시야 탓이었다.

레오니는 그제야 남들보다 한 박자 뒤늦게.

기사들과 함께 있는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저거……?!”

반짝거리는 판금 갑옷의 기사들 사이.

먹색 정장을 차려입은 은발의 남자.

호열을.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

샤이닝.

“한국의 애송이가 어떻게?”

천하통일.

투두두두─

심지어는 하늘 위의 헬리콥터까지.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이 순간.

모두의 시선이 호열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향했다.

.

.

.

보자.

내 평생 이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그 사실만으로도 놀라 기절할 일이건만.

“최소한의 격식들은 갖췄군.”

나는 그 엄청난 관심을 오히려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덕분에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유의미한 발전이다.”

이 뻔뻔함을……!

지금 그런 말이 나오느냐고.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나도 눈치라는 게 있단 말이다.

지금의 침묵, 시선들이 절대 고운 반응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나 같아도 놀랄걸?’

웬 플레이어 하나가 제국 최강이라 불리던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이끌고 나타나면 말이다. 그것도 섬의 보물을 앞둔 상황에 말이야.

‘경계심을 가지는 게 당연한 거겠지.’

그러나.

‘미치겠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연합.

이건 착각으로부터 시작된 관계가 아니었던가?

정확히는 나에 대한 과대평가로부터 시작된 거겠지.

그런 나를, 다들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걸까.

고민해 본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166레벨이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

이러다가 거품이 꺼지면 어떻게 하나.

나중에 사기꾼 취급을 받는 건 아닐까.

안절부절못했을지도 모르지.

과거의 나였다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당당했다.

그랑펠의 영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야 나는 발버둥 치고 있었으니까.

언제나 발버둥 치고 있기에.

가라앉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어째 갈수록 설정 속.

그랑펠과 비슷해져 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상관없다.

흑역사는 몰입하는 게 아닌, 극복하는 것.

그랑펠 또한 과거의 나에 불과했으니까.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싸움이군.’

그래도 지금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곁에 있던 하르콘이 내 말에 장단을 맞춰줬거든.

“과연, 기강이 확립된 모습이네만. 호열 경의 작품인가?”

어째 나보다 한술 더 뜨는 감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젠 눈앞에 적에게 집중해야 한다.

유스라 제도의 마지막 네임드 몬스터.

[용암 거대 비단잉어 : Lv.420]

흐르는 긴장감 가운데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과연,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시작부터 화끈했다.

구구구궁─!

“……느껴져? 땅이 흔들려!”

“지진인가?”

“아니야. 터진다. 화산 폭발이야!!”

플레이어들이 소리쳤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퍼퍼펑─!

섬 중앙, 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붉은 용암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네임드 몬스터는 네임드 몬스터라는 건가.

확실히 레벨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군.

“쫄 거 없어. 계획대로 간다.”

“화속성 저항 옵션 달린 장비, 다들 챙겼지?”

“쿨타임 되는 사람? 나 축복 한 번만 걸어줄래?”

물론 당황하거나 우왕좌왕하는 플레이어도 없었다.

업데이트 내역에서 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용암’ 거대 비단잉어.

이름만 봐도 어떤 대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겠지.

“이건 썩 좋지 않군.”

하르콘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르카나에서 소환된 NPC들이 홈페이지에서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확인했다고 해도 대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

잠자코 있던 나는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네. 하르콘 경.”

허세가 아니었다.

화속성 저항 장비?

화속성 저항 버프?

그런 게 왜 필요한가.

『마법』이 있는데.

나는 마력의 잔량을 확인했다.

‘조금이지만 재생된 마력까지 8할 정도인가.’

과연, 브로치의 효과에 만족하지 않고 마력을 아낀 보람이 있군.

마지막 섬에서 이런 마력이라면.

걱정하지 않고 마법을 발현해도 괜찮겠지.

나는 말을 끝마쳤다.

“대책도 없이 그대들을 이끌고 오진 않았으니.”

*

투데이 아르카나.

전문가들이 송출되는 화면에 열변을 토해냈다.

“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격변 이전, 이후를 살펴봐도 전례가 없는 일인 건 확실합니다! 플레이어가 기사단을. 그것도 제국 최강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대동하고 나타나다니요!”

“동의합니다. 첫 등장 때부터 정말 말도 안 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플레이어, 이호열!”

“방금 들어온 제보에 따르면 이호열 플레이어도 섬의 보물을 획득했다고 합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연합으로 네임드 몬스터, 황금 송곳니 거대 거북을 쓰러트렸다고 합니다!”

“황금 송곳니 거대 거북이라면 신규 업데이트 내역에서도 가장 높은 레벨을 자랑하던 네임드 몬스터 아니었습니까? 전문가님?”

가온의 활약.

그로 인해 들떠있던 스튜디오 분위기가 더욱더 뜨거워졌다.

이호열, 그의 인터뷰 태도가 솔직하든 건방지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런 활약이라면 앞으로 할 말 못 할 말 다 해도,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이호열 플레이어!”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

출연진들이 여운에 취해있기도 잠깐.

네임드 몬스터,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등장부터 요란스러웠다.

“과연, 네임드 몬스터답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키네요.”

상공에서 촬영한 덕분에 뒤바뀌는 전황이 한눈에 보였다.

솟구친 용암이 빠른 속도로 섬을 뒤덮어 가는 광경.

전문가들이 우려를 표했다.

“……까다롭겠는데요?”

“움직임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플레이어들이 제대로 대비를 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건 환경뿐 아니었다.

마치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뒤덮은 용암을 헤엄치기 시작하는 용암 거대 비단잉어.

풍덩─!

그 거대한 몸집으로 용암을 튀기며 날뛰어 대는 녀석.

사방으로 용암이 튀는 게 당연했다.

플레이어들이 고전하는 모습도 그대로 중계됐다.

“……버프가 아니었으면 큰 피해를 볼 뻔했습니다.”

“상당히 귀찮아요. 아예 싸워주질 않습니다.”

“도망만 치고 있는데, 오히려 플레이어들에게 피해가 누적되고 있어요! 비단 금붕어! 생선 주제에 왜 이렇게 영악한가요!”

“전문가님, 금붕어가 아니라 잉어…….”

“그거나, 그거나. 둘 다 생선 대가리지 않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낼 정도로.

전황이 심상치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녀석에겐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

출렁이는 용암 때문에 근접 전투는 불가능.

마법을 비롯한 원거리 공격을 날려봤자 녀석은 용암 속에 숨어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었다.

출연진들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모았다.

“전투가 길어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때였다.

그 예측이 뒤집힌 건.

별안간 확대되어 가는 중계 화면.

잠자코 지켜보던 이들이 경악했다.

“자, 잠시만요! 지금 용암이 갈라지고 있습니다앗?!”

*

언제까지나 절대적인 척도가 되는 건 레벨이었지만.

때로는 상성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단장님.”

600레벨의 하르콘.

그에겐 420레벨의 네임드 몬스터라고 해도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

다가갈 수만 있다면.

아니, 녀석이 공격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조금의 피해를 감수한다면 하르콘은 녀석을 회 떠버리듯 처치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틈이라도 보여주면 좋으련만.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이는구나.”

그러니까 상성이라는 것이었다.

그 환경에서나 성격에서나.

그러나 그 상성이 내게는 다르게 적용된다.

나는 용암을 바라보았다.

탐색.

이 용암은 [스킬]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널브러진 돌과 마찬가지로.

비효율적인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전부 그랑펠의 설정 덕분에 가능한 일이지.’

물론, 돌처럼 익숙한 재료는 아니기에 창의적인 간섭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나는 마법을 발현했다.

간섭 과정에 더한 것은 단순한 위치 조작.

낯선 탐색 재료이기에 마력의 소모량은 상당했지만.

발현하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스오오오─!

이내, 용암이 갈라졌다는 소리였다.

하르콘이 내게 말했다.

“잠깐이나마 그대를 의심했던 내가 미련하게 느껴지는군. 호열 경!”

놀란 기색이 역력한 하르콘.

그 대단한 하르콘이 놀랄 정도였으니까.

플레이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건 당연하다.

“이런 미친……!”

“하다 하다. 이젠 용암을 갈라?!”

“진짜 무슨 스킬인지 감도 안 잡힌다고!”

스킬과 다르게 창의적인 발현이 가능한 마법.

그랑펠의 머리로도 깨닫기까지 며칠이 걸렸는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고 해도 알아듣진 못하겠지.

그러니까 나는 하르콘에게 말했다.

“이번엔 수고롭게 계단을 오를 필요가 없네. 하르콘 경.”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

이런 상황에서도 잘도 농담이 나오신다.

하르콘이 검을 빼 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더해진 배려에 화답하지 않을 수 없겠군!”

갈라진 용암 사이로.

쇄도하는 사자 심장의 기사들.

순수하게 감탄이 나온다.

‘누구 파티원인지는 몰라도 든든하다. 다들.’

그러나 내 할 일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마력이 남아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파티를 맺은 이상.

어느 정도 처치에 기여를 해야 경험치도, 전리품도 획득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많은 마력을 소모할 순 없다.

하르콘과 기사들이 용암에 휩쓸리지 않을 때까지.

지금의 발현을 유지해야 했으니까.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은 극히 소량.’

내가 극히 소량의 마력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가장 익숙한 탐색 재료인 ‘돌’에 간섭하는 것 정도.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상성에서 우위라고 자신한 이유였다.

갈라진 용암.

그 탓에 빠르게 식어버린 용암의 형태가 바뀐다.

‘……뭐, 어쩔 수 없지.’

구질구질하게 싸우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결국, 또 한 번 초등 과학 과정을 끌고 올 수밖에 없겠군.

용암이 식어서 만들어지는 건 현무암.

명칭은 달라도 언제까지나 그 본질은 돌덩이.

돌, 내게는 더없이 익숙한 탐색 재료란 것이다.

그러니까 탐색, 간섭, 발현.

그 일련의 과정은 신속하며.

마력의 소모량 또한 극히 미비하다.

콰드드득─!

곧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개의 석창(石槍).

슈슈슈슉─

나는 그 석창을 용암 잉어의 옆구리를 향해 날려 보냈다.

“……이런 미친!!”

“시, 실화냐. 진짜?!”

“우,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이 순간, 나에 대한 시선 따윈 상관없었다.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끌어오는 마법의 발현.

그것 또한 나의 방식이었으니까.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명중이군.”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