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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1화 (146/489)

◈ 31화. 상대를 잘못 골랐군 (2)

언제는 당당하지 않았겠느냐만.

애써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다……!

[하르콘 킹스가드 : Lv.600]

제국 최강의 기사단을 파티원으로 둔 상황.

내 평생 이런 거물과 언제 또 엮여볼 기회가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기회를 최대한 굴려야 한다.’

행운 스탯에 투자한 포인트 덕분인가.

어쨌거나, 두 번 다신 오지 않을 천운이겠지.

인연은 유스라 제도에서 끝이란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리라!

그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그 첫걸음은 당연하게도 섬의 보물을 확보하는 것.

물론, 내 인벤토리엔 섬의 보물인 왕관이 있었다.

탐욕이라곤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다는.

그랑펠의 설정 덕분에 붕괴 진행도는 상승하지 않았었지.

그러니까.

‘일단, 거악이 깨어나는 건 막았단 소리야.’

─칠죄종 탐욕의 부활을 저지하라. (진행 중) ▲

●섬의 보물이 탐욕에 물들지 않게 하라. (진행 중)

아직 섬의 보물이 남아있어서 그런가.

퀘스트는 진행 중이었지만 말이다.

‘지금부터 보너스 스테이지란 거지!’

섬의 보물을 획득하는 것도.

몬스터를 사냥해 전리품을 얻는 것도.

모든 게 나 하기에 달렸단 소리였다.

이젠 동료가 없다고 처량한 척 엄살을 피울 수도 없다.

‘변명도 못 하지.’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들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나와 나란히 걷던 하르콘이 입을 열었다.

“과연, 전설만큼이나 아름다운 풍경이군. 단 한 가지만 빼면 말일세.”

……한 가지?

그런데 말이 꽤나 의미심장하다.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하르콘이 질문을 던져왔다.

“호열 경. 그대는 나무 위의 쥐새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잠깐만.

지금 뭐라고 그랬어?

‘……호, 호열 경?!’

뭐냐, 듣기만 해도 낯 뜨거워지는 그 호칭은!

모험가 이호열에서 호열 경으로.

호칭이 달라진 이유는 짐작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어도 하르콘은 착각하고 있었으니까.

나에 관해 굉장히 좋은 착각을.

‘오해? 할 수 있어.’

거기에다 하는 짓에 말투까지 봐선.

영락없이 귀족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가끔 나도 착각한다니까?

싸구려 녹차가 정말 감미롭게 느껴지고 막 그래.

그러나.

‘막상 들으니까 죽을 것 같다…….’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단 말이다.

호열 경이라니.

무엇보다 누나들, 그중에서도 3호.

그 웬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이건 평생 놀림감이었다.

흑역사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단 말이다.

‘인연이 유스라 제도에서 끝나 천만다행이야.’

우리 제발 밖에선 마주치지 말자.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는 태연하게도 대꾸했다.

“하르콘 경.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수고스럽지만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네만.”

“그대의 결정을 존중하겠네.”

수치심을 억누르자 대화의 내용이 떠올랐다.

나무 위, 쥐새끼라고 그랬었나.

다람쥐를 말하는 거야, 뭐야.

‘여긴 다람쥐도 레벨이 높나?’

수고스러워도 처리하는 게 낫다니 말이다.

어디, 만렙 다람쥐 구경이라도 해보자.

내가 나무 위를 올려다보던 그때였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8/10]

……와씨, 하나 남았잖아?

내가 습득한 왕관은 빼고 생각해야 하니까.

다시 봐도 섬의 보물은 하나가 남은 게 맞았다.

그 소리는 이 섬에 유스라 제도의 모든 플레이어가 몰려든다는 소리였다.

이거 다람쥐나 잡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따라줄 수 있겠는가?”

철컥─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발검하려던 하르콘이 검을 집어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호열 경. 이 섬에서 우리는 그대의 검과 방패가 되리라 약속했으니.”

하르콘의 서늘한 눈초리가 나무 위를 향했다.

“쥐새끼 또한 한동안 근처에 얼쩡거릴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말일세.”

정말 다람쥐라도 있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려다가 관뒀다.

과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

그것 또한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탄식을 삼켰다.

이 피곤한 성격에 적응하고 있는 내가 원망스러워서.

*

강도, 협박, 살인.

온갖 악행을 저질렀지만, 심판은 없었다.

되려 자신에겐 초신성이란 거창한 칭호까지 붙었다.

“세상에 신이 어딨어? 있었으면 난 진작 뒈졌겠지.”

그런 킨베르에겐 두려울 게 없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

아무리 레벨이 높다고 한들.

이 맹독에 걸리면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다.

자신보다 높은 레벨만 믿고 덤벼들었다가 죽어 나간 플레이어만 해도 셀 수 없었다.

약한 놈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런데 그 악랄한 킨베르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하르콘 킹스가드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살기에 몸과 정신이 마비됩니다.]

[상태이상 : 공포가 발생합니다.]

미안하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저, 저게 하르콘 킹스가드……!!’

제국 최강의 기사단 라이언 하트.

그 우두머리 사자, 기사단장.

그저 눈을 마주친 것뿐이었다.

킨베르는 손가락 하나 움찔거릴 수 없었다.

‘제, 제발……!’

철컥─

검을 뽑는 소리.

그와 동시에 들리는 냉랭한 목소리.

“하르콘 경.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수고스럽지만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네.”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킨베르는 공포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돼애애애!’

할 수만 있다면.

땅에 머리를 박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결정을 존중하겠네.”

청천벽력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 순간 킨베르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

바지가 젖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수치심을 느낄 수도 없었다.

이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넌 틀렸구나.

이건 동료의 목소리인가.

아까부터 신경을 자극하던 환청인가.

구분조차 되지 않던 그때.

“하지만 지금은 나를 따라줄 수 있겠는가?”

……어?

“물론일세. 호열 경. 이 섬에서 우리는 그대의 검과 방패가 되리라 약속했으니.”

철컥─

하르콘이 호열의 말에 검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정말 자신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그들과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킨베르는 정신을 차렸다.

“……살았어?”

……나, 어떻게 살았지?

킨베르가 중얼거렸다.

“살려준 건가?”

이호열, 그 녀석이?

바지에 오줌까지 지려버린 내가 불쌍해서?

아니면 나 같은 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쥐새끼라서?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킨베르는 눈가에 눈물을 훔쳤다.

“씨바알…….”

오직 한 가지 감정.

그저 살았다는 안도감에 킨베르는 흐느꼈다.

킨베르는 다시금 깨달았다.

‘……차원이 다르다.’

하르콘 킹스가드.

그건 괴물, 그 이상의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하르콘을 검과 방패로 부리는 이호열.

킨베르가 끊겼던 통화를 다시 연결했다.

-킨베르, 병신아. 이제 들리냐?

-신호한다면서 닥치고 있으면 어쩌잔 거야?

동료들의 성화에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 유스라 제도에서 손 뗀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이 새끼? 야!!

“마지막으로. 뒈지기 싫으면 이호열은 건들지 마라.”

-뭐?!

뚝─

고함이 들려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킨베르는 유스라 제도에 한순간도 발을 붙이고 있고 싶지 않았다.

이호열 혹은 하르콘.

만약, 둘 중 하나와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목이 달아날 것 같았으니까.

.

.

.

“이 병신 갑자기 왜 이래?”

초신성, 박현중은 빠득 이를 갈았다.

킨베르 새끼가 제멋대로 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만.

오늘은 조금 선을 넘었다.

“이 개새끼 진짜.”

오늘을 위해 투자한 금액만 해도 얼마인가.

어중간한 사냥감으론 적자였다.

대박은 몰라도 최소 중박은 쳐야 한다는 소리였다.

박현중은 점점 초조해졌다.

‘……내 사정 뻔히 알면서 킨베르 새끼야!’

실력을 떠나서 같은 초신성을 믿는 게 등신 같은 판단이었다.

언제 뒤통수를 칠 줄 모르는 새끼들인데.

박현중은 이를 악물었다.

“넌 몰라도 나는 이대로 못 물러나.”

그때였다.

귓가에 목소리가 들린 건.

-할 수 있어.

-간단한 일이잖아. 죽이고 빼앗는 건.

-이제 다 왔어. 분발해 봐.

“……뭐야, 씨발.”

분명 통화는 끊겼건만.

선명한 목소리에 박현중은 흠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뭐라도 해내고 만다. 내가!”

-뒈지기 싫으면 이호열은 건들지 마라.

“……뭔진 몰라도 뒈지긴 싫으니까.”

이호열, 그 자식은 빼고.

*

투두두두두─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태평양 위를 비행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건 당연하게도 유스라 제도.

현장감은 떨어지지만, 헬리콥터 위에서 촬영하는 게 최선이었다.

유스라 제도엔 살아있는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앵글이 아쉽네. 종진아, 너 그냥 번지 점프 한번 하면 안 되냐? 낙하산도 메고 있잖아.”

VBC 보도국.

현용석의 짓궂은 농담에 엄살 섞인 대답이 들려온다.

-우욱. 안 그래도 멀미 때문에 죽겠는데. 진짜!

“밥값은 해야지. 이거 기회란 기회는 다 놓치고.”

-우욱! 진짜 뒤끝! 이호열 얘기를 아직까지……! 우웩!

밥맛 떨어지게, 진짜.

현용석은 잠깐 헤드셋을 벗었다가 썼다.

“그래도 고생했다. 네 덕분에 시청률은 순항 중이야.”

생방송 중인 투데이 아르카나.

현재 실시간 시청률은 15퍼센트.

물론, 그 시청률을 견인한 건 헛구역질을 하는 윤종진이 아니라 가온 덕분이었지만.

샤이닝이 섬의 보물을 두 개나 획득했든, 뭐든.

결국, 국민의 관심은 대한민국의 길드.

가온에게 향하는 게 당연했다.

-잘 찍혔어요? 마지막에 장난 아니었는데.

“여기 몹들이 커서 그런가. 오히려 멀리서 찍은 앵글이 훨씬 괜찮더라고. 시청자들 반응도 장난 아니었어. 너 멀미시키는 보람이 있다.”

-다행이네요. 알아줘서. 우욱!

네임드 몬스터를 처치하고 섬의 보물을 획득한 가온.

시청률을 떠나서 현용석도 흥이 날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피날레만, 한 컷만 확실하게 따자.”

마지막 섬으로 모여드는 플레이어들.

많은 플레이어가 모이는 만큼.

당연하게도 흥미를 자극하는 그림이 연출되리라.

-뭣보다 이나즈마 녀석들 얼굴은 꼭 클로즈업해서 따려고요. 그것들 우리한테만 싸가지 없게 굴던 거 생각하면 아주 그냥 굴욕 사진을……! 우웨엑!!

“……너 때문에 오늘 밥 다 먹었다.”

그래, 윤종진의 말대로였다.

하다못해 이나즈마, 히사기 카즈마의 표정 변화만 담아내도 대박이었다.

가온과 다르게 일본의 길드, 이나즈마는 섬의 보물을 하나도 획득하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길드 랭킹이 바뀔 수도 있겠는데.”

점점 커지는 기대감.

투두두두두─

헬리콥터가 가온을 뒤쫓아 마지막 섬으로 날아가던 순간이었다.

-와씨. 다들 엄청나게 빠른데요?

“왜? 벌써들 도착했어?”

-잠깐만요. 줌 땡겨 볼게요.

확대되는 송출 화면.

그러자 윤종진이 호들갑을 떤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와. 장관이네. 이거.”

샤이닝과 천하통일을 비롯해서.

섬의 중앙으로 몰려드는 길드와 플레이어들.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닌데요. 선배?

“아니, 난 처음 보는 거 같다. 애초에 이렇게 모일 일이 없잖아? 균열에선 붙어 다니면서 경쟁해 봤자 서로 득 될 게 없으니까.”

-보물섬 덕분에 좋은 구경 해보네요. 정말.

과연, 마지막 섬에선 어떤 전개가 펼쳐질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PD가 아니라 시청자의 입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용석은 프로였다.

“일단, 가온이랑 이나즈마 앵글 먼저 따놓자.”

-오케이. 잠깐만요.

“끝내놓고 마음 편하게 봐야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앵글을 잡기가 어려워진다.

확실한 장면을 하나쯤은 따둬야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잔소리를 듣고 있지만.

윤종진 역시 프로였다.

“오케이. 우리 태민 씨 마스크 좋고.”

앵글에 떠오른 가온의 길드 마스터, 남태민의 얼굴.

그런데 잠깐만.

어째서인가.

남태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다……?

아니, 저건 경악을 넘어서서 절규가 아닌가!

“뭘 보고 저러는 거야……?”

나도 그게 궁금하다!

순간, 빠르게 돌아가는 윤종진의 카메라.

그리고 그곳에는.

“……야아아앗?! 서, 선배! 호열, 이호열!!”

이번에도 이호열이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현용석.

그의 얼굴이 윤종진과 마찬가지로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선배. 사자! 어흥! 사자!! 그 사자 문양!!

VBC를 따라 요동치는 헬리콥터들.

“……라이언 하트 기사단?! 뭐야, 무슨 전개야. 이거!”

이내, 모든 카메라가 같은 앵글을 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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