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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5화 (140/489)

25화. 낙하산

『그랑펠에게 겸손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그것은 변하지 않는 천성.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양피지에 목록을 추가해 나갔다.

──────

1. 마력 재생력 관련 마도구

2. 초급 마법 관련 서적

3. 중급 마법 관련 서적…….

──────

뻔뻔하게도.

많은 것을 요구해 미안한 마음이 들진 않느냐고?

유감스럽게도 들지 않는다.

말했다시피 나는 이 과한 대접에 반드시 보답해 내고야 말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고생하는 건 나라는 거지.

뭐, 대충 가불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요구사항으로 가득 채운 양피지를 마르셀로에게 건넸다.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정말? 그게 전부야?

그렇게 뻔뻔하게 마음은 먹었어도.

마르셀로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그는 다시 한번 내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모험가, 이호열 님.”

그러고는 솔직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당장으로선 제대로 된 연구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적하신 대로 제 탐구 과정에 군더더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쓴웃음을 짓는 마르셀로.

살점 하나 없는 얼굴이라 그런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니 동정심이 싹튼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냥 보이는 걸 어떻게 설명하겠어.’

타고난 재능.

이건 노오오오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물론, 그런 속내를 뱉을 정도의 인성은 아니다. 내가.

“기다리지. 그대가 괴리를 극복할 때까지.”

말은 거창하게 했다만.

실상은 간단한 말이었다.

다음 퀘스트가 떠오를 때까지.

그냥 기다리겠단 뜻이었거든.

마르셀로가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이 연구실과 연구에 필요한 모든 것은 요청 후 자유롭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럼…….”

탁─

마르셀로가 연구실을 떠나고.

나는 연구실에 홀로 남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풀렸다!

급발진하던 주둥이를 원망했던 게 무색하게도 말이다.

나는 내심 생각했다.

‘……설마, 이것도 행운 덕분인가?’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134]

[능력치]

근력 : 27 / 민첩 : 33 / 마력 : 84 / 행운 : 3

[보유 포인트 : 0]

34레벨 상승.

나는 보유 포인트 33개를 마력에.

나머지 하나를 행운에 투자했었다.

‘사실 더한 행운은 바라지 않았는데, 진짜.’

왜, 클래스 퀘스트만 하더라도.

행운에 투자한 대가로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근데, 또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랬다.

‘이게 행운의 영향이란 법은 없지만.’

어째 행운에 포인트를 투자할 때마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지 않나?

어쨌든, 좋은 징크스라고 생각하자.

생각을 정리하자 그제야 연구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연구실치고는 엄청나게 호화스럽네.’

연구용 책상, 책장, 하다못해 깃털 펜까지.

무엇하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랑펠의 심미안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다는 건.

대단한 수준이라는 거겠지.

‘플레이어들의 돈이 다 여기 있구나.’

과거, 악랄하게 골드를 빨아들이던 마탑.

지금이야 포탈의 사용료도 받지 않고 있지만.

게임이던 시절엔 정말 악명이 높았었지.

‘한마디로.’

플레이어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연구실이란 것.

나는 그에 대한 감상평을 내뱉었다.

“녹차가 없는 건 아쉽군.”

그래, 요구사항에 녹차 티백도 적을 걸 그랬…….

‘아니, 그게 아니라.’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고 있다, 나란 놈……!

무려 마탑이다, 마탑.

아르카나에서 최고로 꼽히는 세력 중 하나란 말이다.

그런 마탑에 수석 마법사 덕분에 연구실 하나를 꿰찬 지금.

내 처지는 영락없이 낙하산과 다를 게 없단 소리였다.

‘마냥 좋아할 상황이 아니란 거야.’

왜, 낙하산이라는 것도 기준치는 갖춰야 한다.

적어도 낙하산 기능은 할 수 있어야.

땅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고 오랫동안 구름 위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뭐, 여태까지와 별반 다를 게 없었거든.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였다면.

이번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겠지, 또다시.

그런 의미에서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스스슥─

“!”

문득, 책상 위의 양피지에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과연, 마탑 마법사들의 메신저 같은 건가.

마법사답군.

생각하기도 잠깐, 나는 흠칫했다.

-요청하신 마도구가 가넷 홀에 준비되었습니다.

내가 요청한 마도구라는 건…….

‘마력 재생력 관련 아이템.’

최소 수억에서 수십, 백까지.

마탑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그보다 더한 아이템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아이템을 연구 목적으로 요청.

대여하여 사용할 권리를 얻은 것이었다.

내가 뭐라고.

낙하산한테 그런 걸 선뜻 내어줘도 되는 거냐고.

부담스러워하는 게 정상이건만.

나는 당당하게도 깃털 펜을 집어 들어 휘갈겼다.

-마탑의 안목을 기대하지.

*

마탑의 최상층.

천장을 수놓은 발광체 탓에 역광이 드리웠다.

마르셀로는 다섯 개의 그림자와 마주했다.

저들이 바로 마탑의 원로 마법사들이었다.

“자네의 판단을 존중하겠네.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로들의 호출은 예상했던 것이었으니까.

‘모험가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했으니.’

그것도 그 연구가 어디 보통 연구란 말인가?

어쩌면 지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연구였다.

그렇기에.

마르셀로는 마탑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벌였다.

‘그 지식이, 재능이 꼭 필요하다.’

보는 것만으로 곧장 마법을 따라 발현한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따라 발현한 마법이 어디 보통 마법이란 말인가?

마르셀로에겐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괴리에 대해 알고 있다.’

정확히는 그 괴리를 극복한 것처럼 말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모험가가 어떻게 마법의 개념을 이해한 거지?’

자신만 하더라도 과학이란 개념에 고전하고 있거늘.

그러나 확실한 건 이번 연구에 그가 큰 도움이 되리란 것이었다.

침묵하는 마르셀로에게 그림자들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 판단에 관한 책임은 확실히 져야겠지.”

책임?

마르셀로는 터져 나오려던 비웃음을 삼켰다.

‘그대들이 책임을 언급할 자격이 있는가?’

이상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머저리들.

마르셀로는 원로 마법사를 증오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따져 묻고 싶었다.

이 마탑의 수많은 모순을.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물러가 보게,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이내, 그림자들이 돌아섰다.

그들의 뒤로 거대한 마력 구체가 보였다.

그 마력 구체 안에서 부유하는 사람의 형체도.

“더 이상의 소란은 방해가 되지 않겠나?”

그 물음에 마르셀로는 고개를 숙였다.

빠득─

그가 작게 이를 갈았다.

‘언제까지 침묵하실 생각이십니까? 탑주님……!’

*

가넷 홀.

석류에 물든 것처럼 붉은 공간.

그곳엔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있었다.

“요청하신 마력 재생력 관련 마도구들입니다.”

……그나저나 뭐가 이렇게 많아?

그래도 마탑이기에.

기대하긴 했다.

하지만 이건 물량에서부터 기대 이상이었다.

나는 하나씩 마도구, 아이템을 살폈다.

[빙결된 지식]

[등급 : 유니크]

[제한 : Lv.550]

[효과 : 빙결계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50퍼센트 회복.]

[설명 : 위대한 빙결계 마법사의 유품이다. 생전 그가 이룩했던 마법적 지식이 목걸이에 그대로 빙결되어 보존되어 있다.]

……잠깐, 시작부터 미쳤다.

무려 550레벨 제한 유니크 아이템이라니.

플레이어들 수준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이건.

게다가 그 효과부터 장난이 아니다.

빙결계 마법 한정이라지만 소모한 마력을 50퍼센트나 되돌려준다니.

‘……레벨이 오를수록 효율이 말도 안 되겠네.’

왜, 고위 마법들은 그 마력 소모량이 상당했으니까.

정말 부르는 게 값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한테는 그림의 떡이었다.

‘550레벨이라니. 400레벨도 넘게 부족하잖아.’

사소한 것에서도.

내가 낙하산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허나, 당연하게도 속마음을 내비치는 일은 없다.

“훌륭하군.”

나는 태연하게 말하곤 다음 아이템을 살폈다.

……그런데, 어째?

[제한 : Lv.500]

[제한 : Lv.600]

[제한 : Lv.450]

다 레벨 제한이 너무 높았다.

나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내 수준을 뭐로 보고……!’

과대평가도 이런 과대평가라니.

다른 마도구를 보여달라고.

당장이라도 말을 바꾸고 싶었지만.

양피지로 전달한 메시지가 있지 않던가?

‘마탑의 안목을 기대하긴 뭘 기대해!’

진짜, 입이 방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내게 문득, 유달리 작은 아이템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건 목걸이나 반지도 아니고…….

설마, 브로치인가?

내 관심을 알아차린 것인지 마법사가 말했다.

“그건 불완전한 마도구지만, 혹시나 하여 준비해 뒀습니다.”

불완전한 마도구라.

일단, 확인해 보자.

……어라?

일단, 레벨 제한은 합격이다.

[육망성 브로치 1/6]

[등급 : 유니크]

[제한 : Lv.100]

[효과 :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10퍼센트 회복.]

[설명 : 여섯이 모여 하나가 되는 브로치 중 일부이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에 그 효과가 상당히 손실되었다.]

지금까지 대단한 아이템만 구경해서 그런가.

효과가 밋밋한가, 싶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빙결계, 화염계, 다 제약이 있었어.’

소모된 마력을 50퍼센트, 40퍼센트씩 돌려준다고 한들.

까다로운 조건이 덧붙었었다.

하지만 브로치엔 보다시피 조건이 없었다.

‘게다가 내 전투 스타일을 생각하면…….’

내 전투 스타일이라고 해봤자, 뭐.

대단한 게 있는 게 아니었다.

마법이든, 과학이든.

그냥 있는 거 없는 거.

전부 끌어다가 처절하게 싸우는 게 내 방식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선 여기 놓인 그 어떤 아이템보다 나에게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걸 대여하지.”

무엇보다 까다로운 그랑펠의 심미안에도 합격.

내 선택에 마법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마도구는 필요 없으십니까?”

필요해도 쓸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죽어도 말할 순 없었기에.

나는 대답했다.

“나에겐 이걸로 충분하다.”

“그러시군요! 그 뜻 잘 알겠습니다.”

뭐지, 저 감탄한 듯한 표정은.

어째 내 말뜻을 오해한 듯싶었지만.

내게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그래, 당장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 봤자 뭐하겠는가?

그럴 시간에.

어떤 거목이라도 오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까 다시 발버둥 칠 시간이군.

나는 곧바로 가넷 홀을 빠져나왔다.

그런 나의 행선지는.

발아래로 보이는 플레이어들과 마찬가지로.

유스라 제도…….

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균열이었다.

‘주제 파악해야지.’

보물섬, 유스라 제도.

그 별명부터 구미가 당기긴 했지만.

최소 적정 레벨이 350레벨이었다.

430레벨.

그 레벨보다도 강한 아스큐라 백작도 쓰러트렸으면서.

무엇을 겁내느냐고 묻는다면.

‘악마족이 없다……!’

그야 유스라 제도엔 악마족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아스큐라 백작 영지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건 [천적관계]의 효과가 컸다.

효율이 뛰어난 『마법』이 있긴 했지만.

그 마법조차 향상된 마력이 없었다면 몇 번 발현하지도 못했겠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다짐했던 바였다.

무엇보다 지금 나는 기반을 다지고 있었으니까.

그 기반을 다지기에 적합한.

마탑이란 뒷배도 얻은 참이고.

‘조급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유스라 제도는 나와는 거리가 먼…….

“!”

그때였다.

잠잠하던 클래스 퀘스트창이 점멸한 것은.

[클래스 퀘스트 : 태동]

서막이 오르고 봉화가 피어올랐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으로 뒤덮인 세상을 밝혀나가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유스라 제도의 거악을 조사하라. (진행 중)

……잠깐만, 이러면 말을 바꿀 수밖에 없잖아?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브로치를 정장 라펠에 꽂았다.

전장에 나서는 것치곤.

너무나도 고상한 전투 준비.

그러나 나는 더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실전만큼 효율적인 훈련도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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