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2화 (137/489)

◈ 22화. 신규 업데이트

1,100억 원.

몇 번이나 다시 세어봐도 확실했다.

저 천문학적인 단위의 숫자가.

입금 신청만 하면 내 계좌로 입금될 돈이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이 무서워지려고 한다.

1,100억이라니.

로또에 몇 번이나 당첨돼야 하는 금액이야, 저게!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건.

그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금을.

당연하다 여기는 내 모습이었다.

혼자 살기에 나쁘지 않았던 월급.

그럼에도 각종 생활비에 피눈물을 흘리던 과거.

에어컨, 보일러 가동 시간에 집착하던 덥고 추웠던 날들.

그 시절의 내게 1,100억이란 거금이 주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일단, 확실한 건 불면증 확정이다.

매일 밤, 집에 강도가 드는 건 아닐까. 갑작스럽게 회사를 때려치웠다가 동료가, 부장님이 알아차리는 거 아닐까. 은행 직원이 빼돌리면 어떻게 하지.

쓸데없는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겠지.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었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 풍요로움의 끝을 맛보았던 그.』

이 남다르신 금전 감각이 말이야.

그 설정 덕분일까.

내 머리는 하얘지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무장이다.”

그래, 시급하긴 하지.

55레벨에서 134레벨까지.

무엇보다 레벨이 많이, 그것도 급격하게 상승했으니까.

현재 내가 사용하는 장비 아이템은 솔직히 있으나 마나 한 수준.

고레벨 몬스터 앞에선 롱코트를 걸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소리다.

‘머리를 잘 써야겠는데…….’

그런데, 그게 또 그거대로 문제였다.

급격하게 상승한 레벨에 맞춰 아이템을 맞췄다고 치자고.

그다음 레벨업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물론, 다음 균열에서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레벨업을 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겠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자.

상승했다고 해도 겨우 134레벨.

내 수준에선 하급 악마족 몬스터, 임프를 잡는 것만으로 레벨이 오른단 말이다.

‘지금 레벨 대에 맞는 아이템을 구하는 게 잘하는 짓일까.’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수억 원을 들여서?

절대 아니겠지.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따른다.

그럼 아이템을 맞추지 않겠다는 소리인가?

언제 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균열에 진입해야 될지 모르는데?

아니, 그것도 절대 아니다.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단 말이다.

‘스펙보다 그 효과가 진짜인 아이템들.’

왜, 공격력이나 방어력 같은 절대적인 능력치보다.

그 효과 덕분에 높은 가치를 갖는 아이템들.

‘레벨 제한과 상관없이 좋은 효과를 가진 아이템들이 있으니까.’

현시점에서 내게 필요한 건 그런 아이템이었다.

그중에서도.

‘마력 재생력이 조금만 받쳐줬어도…….’

마력 재생력 관련 아이템!

나는 이번 아스큐라 백작 균열에서 마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마력 탈진으로 위기였던 순간을 제외하더라도, 마력이 부족해 아쉬웠던 적이 몇 번이나 됐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력 재생력을 보완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버텨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럴싸한 고레벨 장비 아이템을 맞출 때까지 말이다.

당연하게도 비싸겠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마법사 계열 클래스는 귀족으로 취급받았다.

멋있는 건 둘째 치더라도.

기본적으로 뛰어난 성능만큼이나 육성에 투자되는 금액 또한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런 마법사들에게 필수적인 게 바로 마력 재생력 관련 아이템이었다.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지금.

그 가치는 더욱 상승했겠지.

……진짜 억 소리가 수십 번은 나올지도 모른다.

아이템 하나에 수십억이라니!

내가 그런 아이템을 파는 게 아니라 사는 쪽이 되다니.

정말 상상조차 못 해본 일이었지만.

내 감정에 동요는 없었다.

테이블 앞에 착석.

등받이에 한껏 붙인 올곧은 자세.

가끔 여유롭게 기울이는 찻잔까지.

수십억, 아니 그 이상의 아이템이라고 한들.

그랑펠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순 없다는 거겠지.

1,100억을 받게 됐든.

온 세상이 내게 집중하든.

필요 이상의 고민은 없다는 것이다.

사각사각─

다시금 채워나가는 A4 용지.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20KM 달리기 (진행 중)

●팔굽혀펴기 1,000회 (성공)

●턱걸이 500회 (진행 중)

●버피 테스트 300회 (성공)

마찬가지로 채워나가는 반복 퀘스트.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들이 그 증거리라.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의 마이웨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2 때 내가 정말 이랬다고?

하지만 그따위 생각은 곧 접어버렸다.

오늘의 수치는 하나뿐인 조카, 아랑이 앞에서 흑역사를 들춰진 것만으로 차고도 넘친단 말이다.

*

때론 밝혀지지 않아 더 가치 있는 것도 있는 법.

“대체 그 정체가 뭘까요?”

현재 호열의 처지가 정확히 그러했다.

제시 하인네스와의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

그러나 그 사건의 진상은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었다.

호열과 제시.

그 당사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영상부터 보시죠.”

쿠쿠쿵!

바닥에서 솟아나는 돌기둥부터.

호열의 앞에서 무너지는 움직이는 석상까지.

그런 호열의 정체를.

하다못해 클래스라도 밝혀내기 위해 눈을 부릅뜨는 이들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대체가 말이 되는 일이어야 말이지.

영상을 들여다볼수록 호열에 대한 신비감만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연금술이 확실하단 겁니다.”

“연금술이라고요?”

“네. 여기 확대해 보시면……. 확실하게 보이시죠? 폐허의 잔해가 돌기둥으로 바뀌는 모습이 정확히 말이죠. 이건 영락없이 연금술……. 근데 또 말이 안 되는 게 연금술에 소모되는 마력량이 얼마나 극심한데……. 참나 마력이 얼마나 높다는 건지…….”

“저기, 전문가님?”

전직 아르카나의 운영진들.

AAU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AAU 한국 지부.

최근 들어 성현준은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다.

털썩─

사무실 책상 앞에 앉은 그가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저 진짜 죽겠어요.”

“왜 또?”

“어딜 가도 이호열. 이호열. 아주 그냥 난리를……!”

친구, 사촌, 심지어는 아버지 어머니까지.

아주 그냥 이호열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등장한 스타 플레이어인가?

가온의 남태민 이후로 대한민국에 저만한 활약을 보인 이는 없었다.

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도 한동안 그 얘기만 가득한데.

호열은 메달이 아니라 붕괴된 균열, 그 대재앙을 처리한 진짜 영웅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나도 퇴근하면 애들이 난리야. 아빠, 자기한테만 살짝 알려달라고. 학교 가서 얘들한테 아무 말도 안 한다고.”

“그게 미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는 게 있어야 알려주지!”

둘은 동시에 모니터 속의 호열을 바라봤다.

대체 뭐란 말인가?

이 스킬은?

아스큐라 백작을 쓰러트린 건 또 뭐고!

과거 아르카나의 운영자였던 그들도 호열의 레벨을, 아니 클래스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성현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피곤할 것 같다는 거예요.”

친절하게 대답 좀 해주면 좀 좋아?

따지고 보면 모든 원흉은 호열의 인터뷰였다.

호열의 활약만큼이나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그 까칠한 인터뷰 말이다.

-ㅋㅋㅋㅋㅋㅋㅋ컨셉 지리네

-표정 보임? 그냥 자신감이 넘침

-균열이 아니라 무슨 런웨이 온 사람 같음

-아니 저게 컨셉이라고? 저기 몰린 랭커들 앞에서 컨셉질을 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함?? 저건 찐임

“궁금해 죽겠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이걸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아르카나의 운영자였던 시절부터.

AAU의 직원인 지금까지.

그들의 필수 덕목은 비밀 유지였다.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는 말이 있듯.

불필요한 언행으로 사회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목요일이 기다려진 건 처음이에요.”

오늘은 목요일.

신규 업데이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신규 업데이트 내역이 공개되면 호열에 관한 관심도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그럼 내 청력도 보호받을 수 있지 않을까.

성현준은 내심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떠라. 떠……!”

그 간절한 기도가 닿은 덕분일까.

아르카나 홈페이지에 신규 업데이트가 공지됐다.

“떴다!”

그 소리에 일사불란하게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는 AAU의 직원들.

성현준도 내역을 확인하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뻐하면 안 되겠지만 나도 살아야지!’

균열은 언제까지나 시한폭탄.

그러나 난데없이 등장한 호열의 존재는.

자신의 청력과 정신건강에 닥친 재앙이었다.

드륵─

성현준은 마우스 휠을 돌리다가 씨익 웃었다.

길었다.

균열만 달랑 있는 업데이트 내역이 아닌.

실속이 가득한 업데이트였다.

‘이런 업데이트 규모라면…….’

호열에 관한 관심도 조금은 시들해지지 않을까?

성현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같은 시각.

플레이어들도 신규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했다.

“자, 잠깐. 실화냐? 진짜 이게 떴다고?!”

“……이러면 다시 만날 수밖에 없겠는데?”

“진짜 딱 이번 업데이트까지만 좀 참지.”

“하씨. 경쟁자만 하나 늘어났네.”

경쟁자.

당연하게도 호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야 이번 업데이트는 대규모 업데이트.

아니, 과거 아르카나를 플레이해 봤던 이들이라면 그 내역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설렐 수밖에 없는 업데이트가 분명했으니까.

『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지역이 찾아옵니다.

신규 지역, ‘유스라 제도’가 추가됩니다…….』

유스라 제도!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아르카나에게 숱하게 퍼져있던 소문 속의 섬이었다.

퀘스트, 보물지도, 더 나아가서는 NPC들까지.

유스라 제도를 ‘보물섬’으로 언급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게 세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보물 수준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그 정보를 입수한 플레이어들은 그 보물섬을 찾기 위해 대륙 곳곳을 뒤졌었다.

그러나 아르카나가 현실이 될 때까지 유스라 제도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전설처럼 내려오는 환상의 섬인 줄만 알았는데…….

“병 주고 약이라도 주는 건가?”

아스큐라 백작 다음으로.

그 유스라 제도가 업데이트된 것이었다.

“괴물이란 괴물은 다 모이겠네. 진짜.”

그런 보물섬을 랭커를 비롯한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있을까?

그중에서도 최근 가장 두각을 나타낸 건 다름 아닌 호열이었다.

그러니까 호열에 관한 관심은 커지면 커졌지, 절대 사그라들 수 없다는 소리였다.

“이번엔 진짜 격식을 갖춰서……!”

그게 좋은 의미에서든.

“대국의 천하통일에 치욕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좋지 않은 의미에서든 말이다.

유스라 제도.

그 보물섬만큼이나 많은 관심을 받는 호열.

그러나 그 관심, 견제 따윈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호열은 언제나와 같았다.

유스라 제도.

그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

그 거만한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

.

.

유스라 제도?

여긴 또 뭔데.

나는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최근 들어 느끼지만…….’

10년의 공백이라는 게 확실히 심각하긴 했다.

왜, 최근만 해도 그랬다.

그 고깔모자…….

아니, 제시 하인네스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스큐라 백작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천벌].

그 스킬의 위력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했다만.

그녀가 무려 랭킹 4위의 플레이어였다니.

‘나는 그런 사람한테 예절을 갖추라고…….’

예절을 갖추는 게 사람의 기본이라고.

뜬금없이 설교를 늘어놓았던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결국 굉장히 공손한 자기소개를 받았었지, 나는…….

그 만행이 다시금 떠올랐건만.

나는 뻔뻔하게도 말했다.

“새로운 차도 나쁘지 않구나.”

그러시겠지.

무려 하나에 200원짜리 녹차 티백이니까!

……됐다.

그만 생각하자.

어차피 이 성격은 고민한다고 바뀌는 게 아니었으니까.

제시가 랭커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한들.

그녀에 대한 나의 태도가 바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업데이트 내역을 보고도 태평할 수 있는 건.

성격 때문만이 아니었다.

10년의 공백?

그런 건 문명의 이기.

인터넷 검색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단 말이다.

‘유스라 제도라.’

그 분량으로 볼 때.

이번 업데이트의 핵심이 분명했다.

곧바로 초록 창을 띄워 검색창에…….

“?”

유스라 제도라고 입력하려던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업데이트 내역 맨 마지막.

“……이것은?”

단 한 줄의 문장이 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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