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애증의 존재 (2)
벌컥─
1호, 이은혜.
이준욱 사장, 최강희 여사.
슬하 사남매 중 유일한 기혼자.
“아랑이. 호열이 삼촌 안녕하세요~ 해야지.”
“호여리 삼촌 안녕!!”
큰누나가 딸, 아랑이의 손을 꼭 잡곤 내 자취방 문을 열었다.
2호, 이지윤.
2호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며 내게 말했다.
“호열아, 너 염색 대박 잘 됐다. 완전 아이돌이여. 아이돌.”
3호, 이예림.
그 웬수가 나를 보더니 썩은 미소를 날렸다.
“아이돌은 개뿔. 엄마 아시면 기절하시겠다. 얼마나 고생했길래. 벌써 머리가 하얗게 새버렸다고. 아드님께서 아빠보다 머리가 일찍 새버리셨어.”
현관문으로 들이닥치는 네 명의 여인.
예전 같았으면 당황했으리라.
숨겨왔던 걸 들킨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나는 뻔뻔했다.
“간만에 얼굴을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누님들.”
고개도 모자라 허리까지 숙이는 정중한 인사.
그 격식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내 인사에 되레 심각해진 건 누나들이었다.
2호가 쿡쿡─ 웬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얘 컨셉 아닌가 봐.”
“그러게 말이야. 우리 싸가지 호열이는 어디 갔냐.”
“내가 누이라고 불렀을 땐 반신반의했는데…….”
나는 통화에서 사정 대부분을 설명했다.
얼마 전, 플레이어가 됐다.
그 영향으로 말투와 외모가 바뀌었다.
그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직장을 관두었다.
마지막으로 뉴스 속 이호열은 내가 맞다고.
그러자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면서.
당연하게도 내게 거절할 권리는 없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말이지.’
지은 죄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1, 2, 3호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말빨에 시달리고 있노라면, 그들의 괄괄한 성격까지 내 잘못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거스를 수 없는 천적관계라는 거지.
그러나 말했듯 나는 달라졌다.
천적 앞에서도 뻔뻔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차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내 말에 서로들 눈빛을 교환한다.
“……너, 뭐냐?”
“우리 호열이 여친 생겼니?”
“다정해서 좋은데, 왜 그래? 호열아, 큰누나는 커피~ 아랑이도 뭐 따뜻한 거 마시고 싶어요? 삼촌~ 아랑이도 주세요~”
나는 능숙한 솜씨로 찻잔을 꺼내고 차를 준비했다.
곳곳을 둘러보던 2호와 웬수가 속닥거렸다.
“저거 여친 생겼네.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깨끗할 수 없다니까? 그리고 뭐야, 저 찻잔 봐봐. 아주 그냥 섬세한 게…….”
“그렇다고 치더라도 집이 너무 깨끗한데? 머리카락 한 톨도 안 보이고.”
“이거 이거 냉장고 봐봐. 너 딱 걸렸어. 이호열.”
웬수가 냉장고에서 양상추를 꺼내 들었다.
2호는 닭가슴살을 집었다.
“냉장고에 이런 거밖에 없는 거 보니까 여친 다이어트 중이구나? 누나들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뭐 하는 사람인데? 몇 살이야? 예뻐?”
……아무래도 풀어야 할 오해가 많겠군.
그 후,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덕분에 대부분의 오해는 풀렸다.
확실한 증거가 있었거든.
“……양상추랑 닭가슴살을 네가 먹는 거라고?”
“몸 좋아진 거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야.”
“말이 돼? 자취하면서 혼자 끼니 챙기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
“이예림. 세상을 네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 네가 호들갑 떨어서 괜히 나도 우리 막내 여친 생긴 줄 알았잖아.”
“그럼 이 찻잔도 호열이가 고른 거야? 되게 안목 있네~”
격식에 따라 다과를 준비하기 잘했군.
역시 따뜻하고 달달한 게 들어간 덕분일까.
그 반응들이 한층 유해졌다.
어딘가 억울해 보이는 웬수는 빼고 말이지.
하지만 피해 갈 수 없는 화제가 있었다.
큰누나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어때? 할 만해?”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에 담긴 속뜻은 간단치 않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다.
플레이어 활동이 위험하다는 것은 상식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부터도 먼저 말할 수 없었다.
위험한 걸 위험하지 않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웬수가 경고했다.
“너, 우리 눈 똑바로 보고 말해.”
……천적이 괜히 천적이 아니란 건가.
하긴 어렸을 때부터 기가 막히게 거짓말인 걸 알아차렸지.
그러나 이 순간, 내겐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적성에 맞습니다.”
혈육에게 걱정 따위를 시키지 않기 위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자신감의 표현.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에서 나는 나의 잠재력과 한계를 깨달았다.
자신의 그릇을 알았기에.
적어도 악마족을 때려잡는 것만큼은 정말 적성에 맞았기에.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뭐,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이예림, 또 너야. 내가 말했지? 호열이가 너냐고. 너랑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혼자 알아서 잘한다니까, 호열이는? 적성에 맞으니까 뉴스에서도 맨날 호열이 얘기겠지.”
“그래? 막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누나가 마음이 좀 놓이네.”
……예상보다 쉽게 넘어갔다.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 덕분인가.
어쨌든, 나는 큰누나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머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아빠 엄마? 오늘도 새벽부터 만두 빚느라 바쁘셔서 아직은 모르시지. 근데, 온종일 뉴스에서 네 얘기라 곧 알게 되지 않으실까? 뭐, 머리색도 그렇고. 체격도 그렇고. 워낙 달라졌어도 엄마 아빠가 널 못 알아볼 리도 없으니까.”
“나두나두! 호여리 삼촌 알아봤어!”
쓰담쓰담─
나는 아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께도 사실대로 말씀드려야겠군요.”
“됐어. 우리가 말할게.”
……네가?
웬수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랑 다르잖아. 어디 여행을 간다고 해도 집에 올 때까지 걱정하시는데. 네가 우리한테 말한 것처럼. 그렇게 담백하게 말해버리면 얼마나 걱정하시겠니.”
그러니까 알아서 대신 말하겠다는 소리였다.
……그래, 나로서도 그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별안간, 피식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근데 아버지, 어머니, 누이, 누님. 그러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치. 나만 그런 거 아니지?”
“……?”
“보자, 한 10년쯤 됐나? 이호열, 이거 완전 중2병 걸려서. 갑자기 우리한테 존댓말 쓰고. 엄마, 아빠한테도 문안 인사 올린다고 하고.”
“……!”
“그래도 그땐 귀여웠지. 일단, 얼굴이 귀여웠어. 그때는. 지금은 역변했는데……. 아니지. 지금 보니까 다시 그때 얼굴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생각하니까. 호열이, 너 은발로 염색하고 싶다고 막 떼쓰지 않았었나?”
줄줄이 읊어지는 나의 흑역사!
……아무리 생각해도 천적이었다.
악마 사냥꾼과 악마, 그 이상의 천적이 확실했다.
.
.
.
나는 내 품에서 잠든 아랑이를 조심스레 건넸다.
속닥속닥─
“가볼게. 연락하고.”
“잔소리 좀 하고 싶은데. 할 게 없네, 쩝.”
“간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툭─
웬수가 발을 끼워 넣었다.
“이 누님이 마지막으로 잔소리 하나.”
“……?”
“힘들면 바로 때려치우기. 사실 그 말 하려고 왔어. 우리.”
언니들은 끝까지 말 못 한 것 같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말에 담긴 뜻을 알고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을 때 저축 잘하기. 뭣보다 보증 절대 금지. 알지?”
그 소리에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보증은 절대 안 되지.
우리 집에 빨간딱지가 왜 붙었었는데…….
‘……잠깐, 그게 아니라.’
균열 클리어 보상금!
청렴이고 결백이고 챙길 건 챙겨야 한다!
*
균열 클리어 보상금.
플레이어들의 주 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균열의 적정 레벨에 따라 그 보상금의 액수가 측정되며, 기여도에 따라 플레이어들에게 보상금이 차등으로 지급됐다.
그 보상금을 제공하는 데엔 국가들도 있었다.
범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한폭탄, 균열.
그런 균열을 처리한 플레이어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국가 차원의 보상금은 말 그대로 짜디짰다.
“국가 예산에 한계가 있으니까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좀 늘려줘야 하지 않나?”
“이래서야 인건비도 안 나오겠네, 이거.”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는 건 누구인가?
아르카나의 개발사, ‘코스모’였다.
아니, 이젠 코스모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겠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퇴사.
AAU로 이직했으니까.
그러니까 단 한 명.
코스모의 CEO, ‘레이먼 션’이라는 소리였다.
마치 아르카나가 현실이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르카나의 홈페이지는 그 격변에 맞춰 변화했다.
랭킹 시스템의 개편은 물론.
신규 업데이트 공지.
균열 클리어 현황까지.
대격변.
말 그대로 게임처럼 뒤바뀐 세계가 지금처럼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아르카나의 홈페이지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사회 곳곳에선 레이먼 션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했다.
“레이먼 션이 대격변의 원흉이 맞다고 쳐봅시다. 그가 여전히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홈페이지 덕분에 인류는 대격변 이전보다 오히려 진보하지 않았습니까?”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홈페이지 덕분에 유지된 사회 체계.
현실을 침범한 아르카나 문명.
상호 교류의 상승효과로 실제로 세계는 대격변 이전보다 진보해 왔으니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만……. 재평가 이전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레이먼 션이 정말 대격변에 대비하기 위해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하게 지금처럼 여론을 돌리기 위해 운영하고 있는 건지를 말이죠.”
물론, 의견 차이는 한동안 쉽게 좁혀지지 않겠지.
그러나 적어도 플레이어들만큼은 레이먼 션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코스모, 레이먼 션이 지급하는 균열 클리어 보상금이 어마어마했으니까.
“……쿡쿡 쑤시던 통증이 다 사라진다.”
“그래. 이게 금융치료지.”
“이거 때문에 플레이어 생활을 못 접는다. 내가.”
그 막대한 보상금은 어디서 났느냐고?
묻는다면 악랄했던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월 이용료를 떠올리면 됐다.
한 달에 수십만 원.
그것도 모자라 천만 원에 이르는 전용 접속기의 가격까지.
코스모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향후 수십 년간.
플레이어들에게 막대한 균열 보상금을 지급한다고 하더라도 그 원금이 보존될 정도의 액수였다.
그러니까 신규 균열 클리어 보상금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그 적정 레벨만 놓고 봐도 역대급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길드, 버서커.
덥수룩한 주홍색 단발머리가 움찔거렸다.
화면에 떠오른 숫자를 세어보더니 중얼거렸다.
“……뭐냐, 이거?”
“무슨 일인데. 숫자가 너무 커서 읽기 힘들어, 언니?”
“콱씨. 닥쳐봐. 다시 세는 중이니까.”
일십백천만…….
공을 세던 레오니가 경악을 삼켰다.
……뭐, 뭐가 이렇게 많아? 실화냐?!
길드, 가온.
남태민과 남철민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적정 레벨을 생각해도 장난 아니잖아.”
“……납득할 수 있는 액수야.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까다로웠잖아, 이번 균열. 우리랑 이나즈마만 하더라도 겨우 백작의 영지에서 참패를 당할 뻔했고.”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도 이런 단위는 처음이라…….”
마찬가지로 제시에게도 질문이 쏟아졌다.
“제시, 그냥 앞자리만 알려주면 안 돼?”
“싫어.”
“궁금하단 말이야~ 우리가 이만큼이나 받았는데, 넌 얼마나 받았을지.”
그래, 각각 이유가 있었다.
버서커는 신규 균열 최초 클리어.
가온은 같은 균열 중 가장 까다로운 함정 균열을 격파.
제시는 아스큐라 백작을 처치했으니까.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긴다.
그 모든 사건 관여한 호열에겐.
과연, 어떤 단위의 보상금이 책정됐을까?
일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
그 표정만 봐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
.
.
.
나는 숫자를 헤아렸다.
“…….”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억십억백억ㅊ…….
그 천문학적인 숫자 앞에서 뻔뻔하게도 입을 열었다.
“이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