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0화 (135/489)

◈ 20화. 애증의 존재 (1)

높은 처치 기여도.

그 덕분에 자동으로 획득한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먼저 눈에 띈 건 다름 아닌 목걸이였다.

악마의 아이템.

구마의식의 제물로 선택되었던 그 목걸이.

당연히 증발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숭고한 약속의 목걸이]

[등급 : 레어]

[제한 : Lv.300]

[효과 : 피격 시, 낮은 확률로 스킬 ‘중급 보호’ 발동.]

[설명 : 전장에 나서는 연인을 위한 목걸이다. 상대방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에 마력이 깃들어 뛰어난 효과를 가지게 됐다.]

있었다.

그것도 저주가 해제된 상태로.

‘구마의식이 정화 작업을 대신한 건가?’

처음으로 획득한 레어 아이템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니.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는 그랑펠의 설정 탓.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얼마나 속이 쓰렸는데!

그런데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이거.

게다가 피격 시, ‘중급 보호’가 발동하는 효과.

대박까진 아니더라도 당첨 정도는 되지 않을까.

[흡혈귀 백작의 오브]

[등급 : 유니크]

[제한 : Lv.400]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그것도 충분한 성과였는데, 유니크 아이템까지.

인정하자.

이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동요 따윈 없다는 듯.

흔들림 없는 시선을 옮겼다.

오브.

그것은 새빨간 구체였다.

마치 붉은 피가 가득 들어찬 것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것도 악마의 아이템이군.

그 효과가 봉인되어 있기에 어떤 아이템인지 아직 확신할 순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일단, 등급이 [유니크]라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400레벨 제한을 가진 유니크 아이템.

……이거, 되게 비싸게 팔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과거, 스쳐 지나가듯 봤던 기사들이 떠오른다.

아이템 하나에 수억, 수십억이 오간다고 했었지, 아마?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것을 남에게 넘긴다?

고작 돈을 벌기 위해서?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가 그걸 용납할 리 없었으니까.

그러나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400레벨.

어째서인가.

당장으로선 아득하게만 느껴져야 할 그 숫자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단순한 자신감, 어린 시절의 치기 때문인가?

아니, 이것 또한 근거에 기반을 둔 확신이었다.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134]

[능력치]

근력 : 27 / 민첩 : 33 / 마력 : 51 / 행운 : 2

[보유 포인트 : 34]

아스큐라 백작을 사냥함으로써 획득한 경험치.

고깔모자와 경험치를 나눴음에도 무려 34레벨이 상승했다.

아르카나의 경험치 시스템에서 단숨에 34레벨 업이라니.

……이 정도면 신기록이다.

그 레벨 상승에 더해.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성공)

●흡혈귀를 사냥하라. (성공)

클래스 퀘스트까지.

그 근거들이 있기에.

나는 지금처럼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획득한 아이템 앞에서도.

“와! 이게 뭘까요?”

지금의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저 고깔모자 앞에서도 말이야.

그나저나…….

나는 시선을 옮겨 고깔모자를 바라봤다.

그래서 뭔데, 저건.

툭툭─

그녀가 지팡이로 재가 된 아스큐라 백작을 건드렸다.

재라고 해도 겨우 한 줌이나 될까 싶었다.

그런데 그 잔해에서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냄새 같은 건 안 나는데요!”

나도 모르게 구겨지는 미간.

품위에 죽고 못 사는 그랑펠의 영향도 있었지만.

내 심정이라고 다를 건 없다.

아니, 코까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을 필요까진 없잖아…….

그러나 확실히 이상했다.

그저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연기를 볼 수 있을 것처럼.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클래스 퀘스트 : 태동]

서막이 오르고 봉화가 피어올랐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으로 뒤덮인 세상을 밝혀 나가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반격의 서막’에서 ‘태동’으로.

클래스 퀘스트에 진행이 있었다.

나는 떠오른 퀘스트창을 읽다가 납득했다.

저 연기가 괜히 피어오르는 게 아니었군.

육체 단련 이외에 당장 주어진 목표는 없었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적절한 때가 오면 알아서 퀘스트가 시작되겠지.

뭐, 그전까지는 개인 정비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격차를 느낀 만큼 발버둥 칠 시간도 필요한 참이었으니까.

“제시!!”

그때 인기척이 들려왔다.

제시, 고깔모자의 이름인가.

확실히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어쨌든, 제시가 불러들인 번개 때문인가.

플레이어들이 속속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경악했다.

“아스큐라 백작은? 어딨어? 안 보이는데?”

“잠깐. 제시, 너 지팡이로 건드리고 있는 거. 그거 뭐야?”

“……뭐, 뭐야. 제시, 너 설마?!”

빤히─

제시는 대답하지 않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제시였다.

“예의……. 잘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어지는 건 때아닌 자기소개.

“제 이름은 제시 하인네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그 질문에 주위를 둘러봤다.

확실히 광장 전투 때와는 달랐다.

……꼴깍.

모두가 숨을 죽이고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제시와 마찬가지로.

다들 엄청난 수준에 오른 플레이어들이겠지.

그런 대단한 이들이 내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분명, 부담스러워해야 하는 상황이거늘.

나는 오히려 그들의 태도에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 절제된 침묵에 격식을 느낀 것이었다.

불과, 얼마 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세겠지.

그러나 착각은 없다.

이 변화 또한 나의 흑역사.

나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대답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호열이다.”

*

이호열.

제시 하인네스와 함께 아스큐라 백작을 사냥한 정체불명의 플레이어.

그 이름 석 자가 세상에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의 활약이었으니까.

“아스큐라 백작의 레벨은 무려 430레벨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레벨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을 거란 예측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런데 단둘이서 그 아스큐라 백작을 사냥하다니요!”

“정말, 한국을 넘어서 세계가 놀랄 일이 아닐 수 없겠네요. 어떻습니까?”

“실제로 그 해외 반응이 굉장히 뜨겁습니다.”

VBC의 간판 프로그램, 투데이 아르카나.

전문가 패널들이 열변을 토하기도 잠깐.

“큐.”

PD 현용석의 사인과 동시에 자료화면이 떠오른다.

현용석이 헤드셋을 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의 곁엔 카메라 감독 윤종진이 있었다.

윤종진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선배. 진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니까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요. 가온 길드 뒤만 졸졸 쫓아가고 있는데. 어라, 갑자기 성이 무너졌네? 그것도 모자라서 우르르 쾅쾅! 거기에 벼락이 쳐!”

눈을 지그시 감고.

마찬가지로 계속하란 사인을 보내는 현용석.

그러자 변명 아닌 변명이 이어진다.

“와,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렇게 죽나, 형한테 특종 놓쳤다고 죽나 똑같겠다. 싶어서 어쨌든 뛰어갔어요. 뛰어갔는데……. 거기에 딱 제시 하인네스가 있는 거야. 근데 뭐야, 이거. 그때 그 은발 머리가 또 있네?”

“그래서.”

“가슴이 철렁 떨어지는 줄 알았죠. 제가 선배한테 얼마나 깨졌어요? 버서커 때 그렇게 놓치고, 바로 광장 전투가 터졌는데. 이건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이번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터뷰를 따겠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따온 게 고작 이 한마디냐?

[나는 이호열이다.]

현용석은 속에서 천불이 났다.

정말 쉽게 오지 않는 기회였단 말이다.

그러나 누굴 탓하겠는가.

“……그래, 제대로 물어볼 정신이 없었겠지.”

애초에 누가 거기서 달랑 본명만 말할 줄 알았겠냐고!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

랭킹 페이지에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결과가 없었다.

‘이호열’이란 닉네임의 플레이어는 말이다.

물론, 있기야 있었다.

하지만 그저 같은 닉네임을 썼을 뿐.

진짜 이호열이 아니었단 소리였다.

“……진짜 뭐 하는 자식이지?”

신규 균열에서 이호열이 관련된 사건만 해도 몇 개인가?

버서커 길드의 신규 균열 최초 클리어부터.

가온과 이나즈마와의 공동 전선.

제시 하인네스와의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까지.

그들 중 하나만 하더라도 자신의 주가를 엄청나게 띄울 수 있는 일이었다.

무명에서 랭커.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의 몸값을 높일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남긴 말이 고작…….

[비켜라. 인내심의 한계다.]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그러므로 질문은 받지 않겠다.]

[나는 이호열이다.]

그게 전부였다!

심지어 밝힌 이름마저도 아르카나 닉네임이 아닌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간 방송국에서 구르며 온갖 연예인, 플레이어를 다 봐왔건만.

“나도 처음 보는데. 네 탓을 하는 것도 그만해야겠다. 이제.”

그래, 현용석만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

“형.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뭐가 다행인데?”

천정부지로 치솟아 버린 호열의 주가.

그런 호열을 가온이 품는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실감에 소파에 늘어져 있던 남철민.

남태민이 그런 형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 보는 눈. 그거 하나만큼은 제대로 살아있단 거잖아?”

“뭐래? 나도 저 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어.”

“아니, 저건 상식 밖이니까 형 탓이 아니지.”

그러나 아직 호열의 영입전이 끝난 건 아니었다.

남태민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해도 가장 유리한 건 우리야. 우리한테는 호열 씨 번호가 있잖아. 그리고 아주 격식 있게 접근할 수 있는 건덕지도 있지.”

“……건덕지?”

“왜, 광장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

광장에서 쓰러트렸던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들.

가온은 그들에게서 전리품을 획득했었다.

이나즈마와 절반씩 나눠 가진 셈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양과 질이 상당했다.

“호열 씨 활약이 아니었으면 그 전리품을 얻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 활약만큼 전리품을 나누겠다는 거지. 그게 예의이자 격식 아니겠어?”

남철민은 고민했다.

행보로 볼 때.

호열은 단순히 돈에 좌우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건 지금까지의 행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엔 합당한 명분이 있었다.

이내, 남철민의 눈에 다시금 의욕이 타올랐다.

“……태민아. 이제부터 네가 형 해라.”

샤이닝 길드.

카밀라는 붉은 곱슬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제시. 너 진짜 아는 거 없어~?”

“없어.”

“정말, 그렇게 시치미 뗄 거야?”

제시의 능력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카밀라였다.

선택받은 마법사.

그런 제시의 화력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그녀였으니까.

그럼에도 이번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몰라. 나한테 묻지 마.”

끈질긴 질문.

제시는 누구에게도 봤던 걸 말하지 않았다.

그게 호열에 대한 ‘예의’였으니까.

카밀라는 한숨을 쉬더니 양손을 들어 올렸다.

“포기. 더 안 물어볼게. 그렇게 싸늘하게 말하지 마~”

그나저나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걸까?

제시는 뚫어져라 태블릿 PC를 보고 있었다.

힐끗─

드넓은 궁수의 시야.

그 화면을 확인한 카밀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한국식 인사? 배꼽에 손? 그런 건 왜 보고 있어 또?”

세계가 ‘이호열’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의 조국인 대한민국에선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니까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

볼록─

튀어나온 뺨.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

앙증맞은 손가락이 TV 화면을 가리켰다.

방긋─

그러더니 화색이 도는 얼굴로 애타게 엄마를 찾는다.

“엄마. 호여리 삼촌이다!!”

.

.

.

위이잉─

나는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보고 생각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발신인을 확인하니 누나 3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전화를 받는 순간.

1, 2, 3호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오리란 것을.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어렸을 땐 서로 싸우지 못해 안달이었으면서.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제 서로가 없이는 못 사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까.

어릴 때나 지금이나 죽어나는 것은 나란 말이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상대로 1호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호열. 우리한테 할 말 없냐?

할 말이야 많다.

“진정해라. 나의 누이들이여.”

……일단, 이 말투부터 시작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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