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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8화 (133/489)

◈ 18화. 격이 떨어지는군 (2)

『발현』.

나는 석상의 형태를 변형시켰다.

거대한 몸을 지탱하는 근육질의 다리를 가늘게.

쿠드드득─!

그러자 석상이 균형을 잃고는 무릎을 꿇었다.

모든 건 석상이 몬스터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몬스터가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냐고?

그거야 업데이트 내역에서 확인했었으니까.

──────

신규 균열, ‘백작가의 성채’가 추가됩니다.

신규 네임드 몬스터, ‘아스큐라 백작’ : Lv.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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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가의 성채.

출현하는 몬스터는 오직 아스큐라 백작 하나뿐.

그렇다면 직접적인 간섭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판단이 적중한 것이었다.

몬스터가 아니란 건 동시에 악마족도 아니라는 것.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탓.

마력 소모가 조금 있었지만, 뭐 괜찮았다.

“방금 무슨 소리가……?! 헤엑?!”

“……다들 봤어? 저 괴물을 단번에!!”

“다들 움직여! 한눈팔고 있을 때가 아니야!”

꼭 내가 아니더라도 플레이어들은 많았거든.

내가 정문으로 들어간 것이 신호탄이 되었다.

문지기 역할을 하던 석상을 쓰러트린 것이 쐐기를 박았고.

플레이어들이 밀물처럼 성,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순 없겠지.

또각─

무엇보다 내겐 확실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진행 중)

혼자서 아스큐라 백작을 쓰러트리겠다?

그거야말로 오만이었다.

레벨만 놓고 봐도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100레벨 VS 430레벨

그러나 내겐 [구마의식]이란 카드가 있었다.

구마의식의 제물이 될 악마의 아이템도 제대로 챙겨온 참이었고.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구마의식을 통해 아스큐라 백작이 조금이라도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

그 뒤 나머지 과정이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맡기는 거지.’

어느 정도의 기여도는 인정될 테니까.

경험치를 얻는 건 물론.

운이 좋다면 전리품까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천천히 걷는 게 어떨까, 내 다리야?

근거에 기반을 둔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건만……!

내겐 그보다 더한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마치 런웨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 내부를 당당하게 활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따위 초상화를 보고도 식사가 넘어가는가? 비위도 좋군. 아스큐라.”

문득, 나는 거대한 식탁에 이르러선 혹평을 쏟아냈다.

그 맞은편 벽면에 걸린 초상화.

그건 아스큐라 백작의 모습 같았다.

……너무 사실적으로 그린 거 아닌가?

피골이 상접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붉은 눈이며, 튀어나온 송곳니며.

그림 속 아스큐라의 모습은 흡혈귀 그 자체였다.

게다가 음산한 성의 분위기가 초상화를 더욱 무섭게 보이게 했다.

물론, 나는 그 초상화조차 심미안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부적인 묘사와 명암 표현이 서투르다. 화가의 그림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군.”

……어째 남의 집에 들어와서 독설만 뱉는 것 같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이런 싸가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혼자 활동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조각상과 마찬가지로 불합격이다.”

또각─

*

아스큐라 백작의 성채.

역시, 만만하게 볼 균열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의 얼굴엔 식은땀이 가득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는 이들.

“……숨이 막히는 기분이야.”

“버프가 걸려있는데도 이 정도 압박감이라니.”

“안 그러게 생겼어? 하나하나가 전부 기분 나쁜데.”

엄살이 아니었다.

실제로 플레이어들은 성에 진입한 순간부터.

온갖 상태이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스큐라 백작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정신력이 너무 낮습니다.]

[상태이상 : 공포가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과 대면한 것도 아니었다.

곳곳에 걸린 아스큐라 백작의 초상화.

그저 초상화의 붉은 동공이 플레이어들을 지켜본 것뿐이었다.

“……찾았다!”

화르륵─!

그 초상화를 발견.

스킬로 태워버리자 그제야 조금 호흡이 편해졌다.

플레이어들은 혀를 내둘렀다.

“빌어먹을. 성, 내부, 모든 게 함정이야.”

“그냥 공포스러운 연출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레벨 값한다 이건가? 까다롭네. 진짜.”

그랬다.

단순한 연출이 아니었다.

조각상.

초상화.

하다못해 책장에 꽂힌 책, 한 권까지.

“……뭐야? ‘인간 요리’? 제목이 뭐 이래?”

“야! 그거 만지지 마!!”

“……?!”

그 모든 게.

플레이어들에게 상태이상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길드, 가온.

남태민에게 분석이 전달됐다.

-그러니까 성 내부의 모든 게 함정이라는 거지.

“악랄하다, 정말. 악의가 느껴져.”

-괜히 흡혈귀의 성이겠어.

남태민은 그간의 경험을 되돌아봤다.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을 포함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콘셉트는 새로웠다.

“옛날 같았으면 되게 좋아했을 텐데 말이야.”

까다로운 만큼 공략하는 맛이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공략 실패는 더 이상 로그아웃이 아닌 사망이었으니까.

그에 대한 책임감도 막중했다.

작은 숨소리에 담긴 고뇌를 알아차린 것일까.

남철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법이 없는 걸 너무 답답하게 생각하지 말고.

“……뭔 소리래? 갑자기.”

-보나 마나 또 자책하고 있겠구나, 싶어서. 그러지 말라고.

남태민의 클래스는 바바리안.

[광폭화]가 발동됐을 때를 제외하면 상태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낮았다.

전사 계열 클래스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힐러들이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

도움은커녕 부담이 되다니.

남태민의 우려는 떨쳐낼 수 없는 것이었다.

-맡은 역할이 서로 다를 뿐이니까. 다들 이해하고 있는데 말이야. 너 혼자 앞서나가서 괜히 오버하지 말라는 거지. 그래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역시 피는 속일 수가 없다.

남태민은 피식 웃음을 뱉었다.

“뭐, 그렇게 잘 알아? 누가 보면 경험담인 줄 알겠네.”

마찬가지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척하면 척이구나?

“……척하면 척? 뭐야, 진짜 경험담이야?”

-글쎄? 어쨌든 인생 선배로서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그때였다.

별안간 앞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길드인가? 싶었는데, 인기척은 하나였다.

“누구지?”

호크아이.

길드원 하나가 향상된 시력으로 그 인기척의 주인을 파악했다.

“아스큐라 백작은 아닌 것 같고……. 여잔데요? 금발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고……. 잠깐만, 엄청나게 예쁜데요?! 그게 모자를 눌러써서 하관만 보이는데. 하관만 봐도 미인이라는 뜻……?! 아야, 왜 때려?!”

후우─

저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태민이 어이가 없어 고개를 내젓기도 잠깐.

귓가에서 남철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라고 했지?

당연하다는 듯한 말이 이어졌다.

-적정 레벨, 400~450. 그것도 모자라 가는 곳마다 상태이상이 터지는 이 성을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플레이어가 누가 있겠어? 한 사람밖에 없지.

남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한 명밖에 없겠지.”

마법사, 그 이상의 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그녀가 확실했다.

*

나의 신랄한 평가는 계속됐다.

“구조 또한 고민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았군.”

누가 보면 부동산 구경하러 온 줄 알겠어.

지금은 보는 눈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내가 지나온 성의 구조를 떠올려 보았다.

입구 → 정원 → 복도 → 연회장 → 서재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계단.

이곳까지 진행해 오며 딱히 문제가 된 것은 없었다.

딱히 이상했던 것도 없었다.

아, 굳이 꼽아보자면 한 가지 있긴 했다.

아스큐라 백작의 초상화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

그 덕분에 쉴 새 없이 독설을 날렸다는 것 정도였다.

구조로 볼 때.

위층으로 계단은 이것 하나뿐이겠지.

반대편 길까지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스큐라 백작이 등장했으면 어떤 식으로든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을 테니까. 그렇다면 아스큐라 백작은 2층에서 출현할 확률이 높았다.

“귀빈을 맞이하는 태도 또한 불합격이다.”

나보다 먼저 2층에 진입한 플레이어는 없는 것 같았다.

이 계단을 발견한 플레이어도 없었다.

그건 자신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걸음이 워낙 빨랐거든.

자신감이 넘치게.

올곧게 다리를 뻗으며 걸은 덕분이겠지.

내가 그 한결같은 걸음으로 계단에 다가가던 때였다.

“어!”

가냘픈 외마디의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돌린 곳엔 커다란 고깔모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고깔모자를 눌러쓴 여자였다.

내가 뭐라 표현하기도 전에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뭐냐. 이 속도는.

다리에 날개라도 달렸나, 싶어서 확인했건만.

나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공중부양.’

다리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구는 마력을 아끼려 과학까지 들먹이는데……!’

누구는 마력을 저렇게 물 쓰듯 쓰고 있다니.

마력의 빈부격차를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색은 없었다.

그런 내 얼굴을 고깔모자가 올려다보았다.

……저래서야 보이기나 할까, 생각하던 찰나.

모자가 뒤로 젖혀지고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금발.

초록색 눈동자.

새하얀 피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본 것 같은 얼굴이란 건 아마도 굉장히 유명한 플레이어란 소리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덜 쓰라려졌다.

그래, 저런 공중부양을 개나 소나 쓸 수 있는 건 아닐 거야.

“저 봤어요!”

“?”

“당신, 되게 신기한 마법!”

그녀는 다짜고짜 내게 그렇게 말했다.

누가 보면 내가 ‘되게 신기한 마법’ 씨인 줄 알겠다.

허나, 반짝거리는 동공을 보아하니.

악의는 없는 진심 같았다.

“그건 대체 무슨 스킬이었어요? 저도 처음 보는 스킬이었거든요! 저 수십 번씩이나 그 영상을 돌려봤거든요! 그런데도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모르는 마법 계열 스킬은 여태까지 없었는데!”

그런 소리였구나.

수십 번이나 돌려봤다는 영상은 광장 전투를 말하는 거겠지.

그곳에서 내가 사용한 마법이라면 벽과 기둥을 세우는 아주 간단한 마법이었다.

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야 그건 『마법』이지, [스킬]이 아니었으니까.

“저, 정말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불쑥─!

나는 내게 들이대는 얼굴을 바라봤다.

순수한 호기심에 우러나온 행동이겠지.

그녀가 알아듣고 말고를 떠나 옛날 같았으면 대답해 줬을지도 모르겠군. 그 매력적인 외모에 홀려서라도 말이야.

“그 신기한 마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예절을 갖추는 것.”

“……네? 예절?”

“그것이 배우는 사람이 갖춰야 할 기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나는 기어코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격 미달. 불합격이다.”

“헉…….”

느낌표가 물음표로.

또 마침표로 바뀌었다고 하면 표현이 될까?

그녀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져 있었다.

대학에 불합격해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지 않을까.

찰나지만 차디찬 침묵이 흐르기도 잠깐.

문득, 내 시야에 글자가 떠올랐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 메시지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백작가의 성채.

등장하는 유일한 몬스터, 아스큐라 백작.

녀석이 출현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계단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곳에 아스큐라 백작이 있었다.

초상화와 똑같이 생긴 흡혈귀였다.

“아스큐라.”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녀석이 대꾸했다.

“아스큐라 ‘백작’이다. 연약한 인간이여.”

그 숨결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왔다.

저 송곳니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일까.

그 농도가 굉장히 짙었다.

꽉─

넋이 나갔던 여자도 고깔모자를 눌러쓰고 지팡이를 다잡을 정도였다.

그러나 같은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는 웃고 말았다.

“백작? 그 농담은 합격이다. 아스큐라.”

“……농담? 분명히 말했다. 나는 아스큐라 ‘백작’……!!”

“아니. 너는 귀족이 아니다.”

[피의 저주가 깃든 목걸이].

나는 악마의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추악한 저주를 권능이라 속이는 것. 그러한 저주 또한 자신의 권능이랍시고 나누어 주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 더 나아가 품격이라곤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성 안의 모든 장식들까지.”

“……뭐라고?”

“네게는 귀족으로서의 긍지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아스큐라. 그런데…….”

나는 마지막으로 쏘아붙였다.

“어째서 추악한 흡혈귀가 아직까지 귀족을 자칭하는 거지?”

그 도발이 신호탄이었다.

“닥쳐라!! 죽여버리겠다!! 버러지 같은 인간!!”

[‘피의 저주가 깃든 목걸이’가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흡혈귀, 아스큐라 백작을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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