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격이 떨어지는군 (1)
샤이닝과 천하통일.
세계 최강의 자리를 두고 균열에서 벌어진 격돌.
그 승자는 샤이닝이었다.
[샤이닝, ‘아스큐라 백작의 심복’ 레이드 성공…]
[플레이어 랭킹 2위 록스. 드디어 400레벨 고지 안착… 랭킹 1위, 스칼과는 불과 2레벨 차이.]
[전문가들 日, “제시 하인네스가 큰 역할을 했다.”]
두 길드의 승패를 가른 건 아스큐라 백작의 심복이었다.
무려 390레벨의 악마족 몬스터.
상태이상을 걸어대는 악마족의 특성상.
아스큐라 백작의 심복과 맞설 수 있는 플레이어는 많지 않았으니까.
10위권 랭커를 무려 넷이나 보유한 샤이닝은 그에 대한 내성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평균 레벨이 떨어지는 천하통일은 그러지 못한 것이었다.
“흐음.”
세계 최강의 타이틀을 지켜낸 샤이닝.
그러나 길드 마스터, 록스의 표정엔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야 균열에서 빠져나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으니까.
“저게 뭘까? 다들 어떻게 생각해?”
베이스캠프, 마스터 실.
그곳엔 록스를 포함해 4인의 남녀가 모여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프로젝트 화면.
재생되는 영상을 지켜보던 흑인 사내가 말했다.
“나한테 물어봤자 모르겠다니까, 록스?”
플레이어 랭킹 8위, 드미트리.
그는 이 귀중한 시간이 아까웠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균열에서 실컷 구르다가 왔더니만.
갑자기 회의가 웬 말인가?
“록스, 너처럼 여자들이 줄이 서는 남자는 내 간절함을 몰라. 내가 어떻게 잡은 데이트인데! 바쁘게 사는 와중에 어떻게 뺀 진도인데! 그 고생을 저런 놈 하나 때문에 날리게 만들려는 거야?”
드미트리의 울분이 화면 속 사내를 향했다.
롱코트를 걸친 은발의 사내.
그 사내가 손짓하자 광장에 벽과 기둥이 솟아났다.
플레이어 랭킹 7위,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글쎄~ 나는 활잡이라 봐도 모르겠는걸~”
빙그르르─
그녀는 길게 늙어진 붉은 머리카락을 베베 꼬았다.
그러더니 소파에 한껏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신경을 쓰게 만들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해? 정말?”
록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사내가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거슬려서였다.
“글쎄. 질투라고 할까?”
“질투? 욕심도 많으셔, 우리 대장님~”
“록스, 흔히 있는 일이잖아. 매스컴이 별것도 아닌 신인 가지고 떠들어 대는 거. 시청률이 되고, 조회수가 되니까. 억지로 스타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다는 거지.”
드미트리의 말이 맞았다.
그간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플레이어들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뭐라도 된 것처럼 나서다가 균열에서 사망한 것만 쳐도 수백 명은 되겠지.
‘근데, 왜 하필 이런 날 겹치냔 말이야.’
뭐, 놀라운 등장이긴 했다.
그 복장부터 시작해서 말이야.
하지만 단지 그뿐.
당연한 일이었다.
플레이어 랭킹 2위, 록스.
랭킹 1위, 스칼을 비롯해 저것보다 더한 괴물들을 자주 봐온 그가 아니던가.
그래도 형태가 바뀌는 검이라니. 사용하는 무기 하나만큼은 관심이 갔다.
“더 할 말 없으면 가본다?”
그때 카밀라와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큰맘 먹고 호텔 라운지 통째로 빌렸단 말이야. 환불도 안 되는 거. 데이트라도 성공해야 한다니까, 진짜.”
“나도 들어가 볼게요~ 대장~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시고~”
우리 예쁜이도 안녕.
록스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줄행랑을 쳐버린 두 사람.
이제 남은 건 한 사람.
플레이어 랭킹 4위, 제시 하인네스 뿐이었다.
“……?”
록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제시 하인네스가 화면 속 사내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평소의 제시에게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래, 불과 몇 시간 전.
균열에서 몬스터를 사냥할 때도 보이지 않던 초롱초롱한 눈빛이란 것이다.
록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뭔가 좀 알 것 같아, 제시?”
“……되게 신기하네.”
“신기해?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더 신기한데?”
눈여겨볼 게 있단 말인가?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 물었건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야 제시에겐 대답할 정신이 없었으니까.
‘저건 대체 무슨 스킬이지?’
클래스, 마법사.
가장 흔한 클래스 중 하나였지만, 제시는 특별했다.
같은 클래스의 플레이어 중.
오직 단 한 명만이 수행할 수 있다는 클래스 퀘스트.
제시는 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으니까.
그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며 제시는 수많은 아르카나의 마법을 느끼고, 깨닫고, 습득하게 됐다. 그런데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마법은…….
‘뭔가 달라.’
확실히 달랐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는 것.
물론, 자신도 주문을 외우지 않고 마법을 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효율은 굉장히 떨어졌다.
마력의 소모량은 커지고, 효과는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면 속 남자는…….
‘그런 게 전혀 없잖아!’
아니지. 반대일 수도 있었다.
효율이 떨어졌는데도, 저 정도 효과를 내는 거라면?
대체 마력이 얼마나 높다는 걸까?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제시의 눈빛.
그건 록스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하였다.
“……?!”
그 순간.
화면의 자막으로 사내에 관한 기사 한 줄이 스쳐 지나갔다.
[의문의 플레이어, “격식 떨어져… 질문은 받지 않겠다.”]
……정말 저런 소릴 했다고?
록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 잘난 맛에 살기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록스였지만.
그조차도 저런 건방진 발언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뭐 하는 미친놈이지?’
샤이닝의 승리와 자신의 400레벨 달성이 묻힌 것도 모자라.
그 제시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거기에다 자신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성격까지.
믿기지 않는 포인트가 한두 개가 아니란 말이었다.
.
.
.
그래, 충격적인 데뷔였다.
의문의 플레이어, 호열의 등장은 파격 그 자체였다.
-실화냐ㅋㅋ마법 스케일 한 번 지리네
-님들 7:10부터 가만히 서있는 거 보셈ㅋㅋ
-눈빛 봐ㄷㄷ지켜보는 내가 다 떨림ㄷㄷ
무엇보다 큰 화제가 된 건 호열의 행동이었다.
그런 호열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자, 여기서 보시면 정말 비무장 상태입니다.”
“정말 롱코트 안에도 정장 차림이네요?”
“손가락이나 목, 귀를 봐도 장신구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맨몸으로 저런 마법을 썼단 말씀이시죠?”
“저게 말이 되는 겁니까? 박남봉 전문가님?”
허름한 방어구가 격식에 맞지 않았기에.
장신구는 그저 없기에 착용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전황을 보는 눈 또한 굉장히 뛰어납니다. 적들의 기동력이 문제가 된다는 걸 파악하고, 곧바로 지형을 바꿔버렸으니까요.”
“다시 보니 조금만 늦었어도 아찔했네요.”
“빠른 판단이 가온과 이나즈마를 살린 거나 다름없습니다.”
누군가를 구하려는 생각 또한 없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까지 끌고 올 정도로.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뿐.
“그것도 모자라서 여기. 여기서부턴 이렇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습니까? 이건 틀림없이 배려일 겁니다. 가온과 이나즈마. 어디 한번 제대로 겨뤄봐라. 그런 느낌인 거죠.”
“배려요? 그 균열에서 배려요?”
“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건.”
배려가 아니라 마력이 바닥난 것뿐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건.
당사자인 호열밖에 없었다.
보는 눈이 특출난 랭커라 해도 다를 건 없었다.
길드, 버서커의 베이스캠프.
휘릭─
레오니가 덮고 있던 담요를 허공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야씨! 너희 내가 말했지?! 저거 보통 아니라고 했잖아?!”
“언니. 알겠어. 진정하고 이불 덮어. 그러다 감기 걸린다?”
“근데 이것들은 뭐? 내가 보는 눈이 없어? 콱씨. 진짜 다 뒤집어엎을까?”
길드, 이나즈마.
“그 은발 머리가 한국인일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우리 측으로 끌어들여야 하네.”
“히사기 카즈마. 결단코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가온의 남씨 형제까지.
“진짜 멱살을 잡아서라도 날 설득시켰어야지.”
“후우─ 그래, 내 실책이다. 저런 포텐을 못 알아보다니.”
“……근데 다시 봐도 격식이 없긴 없었다, 그치?”
“그러게. 이건 뭐 인터뷰가 아니라 시장바닥이었네.”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거 보니까 많이 참았구나. 난 괜히 또 오해할 뻔했네. 격식 없다는 게 내가 바바리안이라서 그런 소리 하는 줄 알았잖아.”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라.”
“뭐? 형까지 그러기야?!”
눈썹이 떨린 것 또한 마력 탈진의 후유증이었지만…….
그조차도 알아차릴 수 없는 일이겠지.
어쨌거나 호열에 대한 관심은 한동안 식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어떤 채널을 돌려도 의문의 플레이어, 호열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야말로.
악마가 움직이기에 가장 좋은 때였다.
[백작가의 성채]
[적정 레벨 : Lv.400~450]
[붕괴 진행도 : 100%]
“……뭐, 뭐야? 방금까지 분명 90퍼센트였는데?!”
“다, 다들 피해!!”
“최대한 멀리 떨어져욧!!”
붕괴도 100퍼센트.
균열이 무너지고 현실에 성이 생겨났다.
흡혈귀, 아스큐라 백작.
그가 러시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붕괴였다.
곧바로 화면이 전환되고 앵커가 속보를 전했다.
신규 균열이 업데이트됐을 때.
가장 우려했던 일이 실현된 것이었다.
“세계 각국의 길드들이 속속들이 성채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샤이닝의 길드 마스터 록스는 지체하지 않고 성채에 진입할 예정이라고 밝혀…….”
그러나 호열은 이러한 전개 또한 예상하고 있었다.
-흡혈귀는 피를 통해 자신의 권능을 나눠줄 수 있다. 물론, 나눠줬던 능력을 다시 거둬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끝까지 방심하지 마라.
그러니까 방심은 없었다.
땀에 젖은 신체.
다시금 수북하게 쌓인 테이블 위의 종이 뭉치들.
더 나아가 상태창까지.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100]
[능력치]
근력 : 27 / 민첩 : 33 / 마력 : 51 / 행운 : 2
[보유 포인트 : 0]
그 증거가 곳곳에 남아있었다.
고고한 채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백조는 한순간도 다리를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주경야독.
나는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 노력했다.
내겐 무려 12년의 공백이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상황의 심각성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야 상식이니까. 공성전에서 수비 측이 유리하다는 것쯤은.
……게다가 이건 심리적으로도 위축될 수밖에 없겠는데?
아스큐라 백작가의 성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크기였다.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큰일 나겠는데?”
“먼저 정찰대를 투입하는 게 어떨까요?”
“……아니, 본대를 나눌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그 성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마치 칩입자는 언제나 환영이라는 것처럼.
덕분에 대다수의 플레이어가 그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또각─
그러나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웅장함에 압도되지 않았느냐고?
다행인가, 유감인가, 그럴 일은 없었다.
그야 내 흑역사 속 클라우디 가문의 저택은 말이야.
이따위 성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광활했거든.
나는 성채의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비좁아 숨을 곳조차 마땅치 않겠군. 아스큐라.”
더없이 자신감에 찬 투로 덧붙였다.
“허나 네게는 이조차도 과분하다.”
내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가.
우드드득─
정원에 놓인 조각상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다. 적어도 10미터는 된다, 이거.
그 거대한 괴수 조각상이 살아나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뛰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꼿꼿하게 멈춰선 채.
조각상의 면면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런 내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재료도, 질감도, 깊이도, 그 형태도 형편없는 조각상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조각상도 자랑거리라고 잘도 정원에 놔뒀군.”
그랑펠의 까다로운 심미안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동감이었다.
다른 건 잘 모르겠어도 ‘재료’ 하나만큼은 말이야.
‘내가 세우고 부순 벽하고 기둥이 몇 갠데.’
바위를 조각한 석상(石像).
그건 내게도 더없이 흔한 재료였으니까.
『탐색』과 『간섭』에 별다른 수고가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