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고래 싸움에 또 고래가 (4)
문과인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과학 최고.
쉴 새 없는 메시지가 그에 대한 근거였다.
무려 350레벨의 몬스터였다.
그 돌격에서 나오는 파괴력은 어마어마하겠지.
말 그대로.
나는 스치기만 해도 사망 확정이다.
그러나 파괴력이 큰 만큼 그 반발력 또한 클 수밖에 없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그쯤 나는 병사와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땐 여기서 반전 마법으로 벽을 무너트렸지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다지 좋지 않은 판단 같았다.
무엇보다 플레이어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기사들의 돌격을 받아치기 위해 더욱 크고, 두꺼운 돌벽을 쌓아 올린 만큼.
무너졌을 때의 후폭풍도 클 수밖에 없을 테니까.
“뭔지는 몰라도……! 일단 공격해!”
“기회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라!!”
기사와 뒤엉킨 플레이어들.
내게 플레이어를 피해가며 돌벽을 무너트리는 고급 테크닉 따윈 없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으면 말이야.
수고롭게 돌벽을 쌓아 올릴 필요도 없이 녀석들을 쓸어버렸겠지.
‘그러니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현재 무엇보다 불리한 요소는 지형이었다.
‘탁 트인 전장은 기병에게 유리하지.’
과연, 내가 돌벽을 세워 올린 방향을 제외한다면.
다그닥다그닥─!
“빌어먹을! 또 온다! 다들 이 악물어!!”
돌진, 후퇴, 다시 돌진.
말을 탄 기사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플레이어들의 대열도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설치는 꼴이 실로 오만하군.”
그러니까 그 꼴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순 없다.
그래, 나는 적에게 유리한 지형을 바꿀 생각이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탐색, 간섭, 발현.
그 일련의 과정이 더없이 신속했다.
쿠구구구궁─!
바닥에서부터 돌기둥이 솟구쳤다.
어느새 광장, 곳곳에 솟아난 돌기둥들.
히히히히잉─!
말들의 동요가 보였다.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 탓이었다.
노린 건 아니었지만 몇몇 돌기둥은 직접적으로 기사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골절’이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나는 마력의 잔량을 확인했다.
‘이러는 게 당연하지.’
효율이 높다는 것도 평범한 상황에서 한 이야기였다.
91레벨.
마력은 고작 42포인트.
그 정도 수치로 전장을 완전히 뒤바뀌어 놓았으니까.
내 마력은 고작 녹차 한 잔 우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지금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건 반전 마법으로 플레이어들이 휘말리지 않는 선에서 벽과 기둥을 무너트리는 것뿐.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그랑펠의 긍지는 어떨지 모르겠다만.
애초에 내겐 저 기사와 뒤엉켜 싸울 생각 따윈 없었거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는데…….
사라졌다는 게 맞겠지만.
“이 자식들 맷집이 장난 아닌데? 끈질겨.”
“젠장. 출혈 떴다. 나 회복 좀 부탁해!”
“이 괴물 같은 새끼들. 말에서 떨어져도 장난 아니잖아?”
다들 적어도 300레벨은 넘겠지?
그런 플레이어들조차 고전하고 있었다.
과연, 기사들의 강함을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런 기사들과 내가 뒤엉켜 싸울 수 있을까?
[천적관계]의 효과를 생각하면…….
일대일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이곳은 전장이었다.
시시각각 그 상대가 뒤바뀌는 전장.
나는 그런 전장에 아군도 없이 혼자란 말이다.
그러니까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마력을 전부 투자해 전장의 지형을 바꾼 것.
그것이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그 근거가 마찬가지로 메시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아르카나의 경험치 시스템.
플레이어들은 처치 기여도에 따라 경험치를 획득했다.
아르카나가 십 년 넘게 최고의 인기를 구사할 수 있었던 건.
보다시피 납득할 수 있는 시스템이 뒷받침됐기 때문이겠지.
내 처치 기여도는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진 않을 것이다.
기사들에게 결정적인 상태이상을 유발.
그 기세를 눈에 보일 정도로 꺾어놨으니까.
그에 대한 근거 또한 메시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적을 처치할 때마다 한 줄씩.
그 근거가 추가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이 증명의 전장에서 관망 중이었다.
마력이 고갈된 이 순간에도.
‘저건 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을지도…….’
부지런히 발버둥 치는 중이란 것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 376.
플레이어 랭킹 6위.
번개의 창, 히사기 카즈마는 생각했다.
‘저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이지?’
일단, 그 차림새부터 범상치 않았다.
균열에서 비무장 상태라니.
자신조차 방심할 수 없는 게 신규 균열이었다.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더욱이 이번 신규 균열에선 악마족이 출현했다.
‘정신력 관련 장신구는 필수일 텐데……?’
그러나 마찬가지로.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펄럭─
바람에 흩날리는 롱코트.
또각─
그 당당한 구두굽 소리가 대변하고 있었다.
마치 그런 건 필요 없다는 것처럼.
두려울 것 없다는 듯한 표정.
긴장 따윈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자세.
과연, 그 사내의 자신감엔 근거가 가득했다.
“!”
벽을 세워 적의 돌격을 막아내다니.
아니, 그것도 모자라 광장 곳곳에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히사기는 사내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다.
‘……기병의 기동력을 무력화시키려는 거야.’
사내가 노린 대로 기사들의 움직임에 제약이 생겼다.
그것도 모자라 몇몇 기사들은 상태이상에 빠져있었다.
히사기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대체 정체가 뭐야?’
클래스도, 이름도, 마력량도, 심지어는 레벨도.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가.’
저 괴물이 만약 가온 소속이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
가장 중요한 건 저 사내가 가온 소속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가온 소속이었다면 따로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까.
무엇보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가온의 태도가 눈에 보였다.
‘어쨌거나 기회다.’
히사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클래스, 마창술사.
파지직─!
히사기의 창에 번개가 휘감겼다.
번개의 창.
그 별명처럼 히사기가 전장을 가로질렀다.
“크르르…….”
바바리안의 고유 스킬, [광폭화].
그 효과로 남태민은 짐승 같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가온의 길드원들이 남태민을 보고 말했다.
“이거 완전 마스터가 날뛰기 좋은 환경이 됐잖아?”
“저게 누구신지는 모르겠는데. 뭐,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감사 인사? 일단, 살아남을 걱정부터 하지?!”
하나하나가 유명세를 떨치는 가온의 플레이어들.
당연하게도 다들 그 유명세만큼이나 레벨이 높았다.
레벨이 높은 만큼 경험도.
그 경험을 통해 생긴 보는 눈이 있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였다.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벽과 기둥들.
그 탓에 기사들의 대열이 무너졌다.
그야말로 난전 상황.
그런 난전에서 남태민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슈슉─!
남은 건 야성뿐.
오직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남태민.
커다란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서.
솟아오른 기둥을 올라타고는 기사들을 덮쳐버렸다.
그런 남태민의 귓가에 남철민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태민아. 지금 너한텐 어떤 말을 해도 못 듣겠지만 말이야.
똑같은 말을 또 하게 되는 수고가 있다고 해도.
입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게 내가 말했던 그 남자야!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아니겠지, 그럴 수가 없겠지.
짧은 시간, 수도 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 얼굴을 어떻게 잊겠어.
악마에게 육체를 빼앗겼던 자신을 구원해 준 사내.
아무리 봐도 그 은인의 얼굴이 맞았다.
더 나아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격식을 갖출 대로 갖춘 차림새까지도.
-……근데,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지?
저 사내의 클래스를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4호선 균열에서 사내는 분명 단검으로 임프를 사냥했었다.
물론, 활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둘 다 신체 능력.
즉 [근력]과 [민첩] 스탯에 영향을 받았으니까.
-갑자기 마법이라니. 이게 대체……?
하지만 이번엔 이야기가 다르다.
마법은 [마력] 스탯에 영향을 받는다.
근력, 민첩, 마력을 전부 필요로 하는 클래스?
들어본 적이 없을뿐더러 있다고 한들 그 성능이 좋을 리가 없었다.
스탯 포인트는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임프 앞에서도 멀쩡하길래. 그냥 정신력이 높구나, 생각만 했지. 진짜 마법을 쓸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그것도 저게 보통 마법이란 말인가?
화면으로 보고 있었지만, 광장의 크기는 못해도 축구장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사내는 그 광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벽과 기둥들을 세워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쿠르르릉─!
적절하게 기둥을 무너트려 기사들을 공격하기까지.
-다들 어떻게 생각해?
남철민은 분석관의 지식을 총동원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르카나의 지식부터.
마찬가지로 같은 화면을 보고 있는 동료 분석관들의 의견까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모아봐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분석관으로서 할 말이 아닌데. 모르겠다. 태민아.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한다, 동생아.
설령, 잡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대적 관계만큼은 피해야 했다.
저 정도의 플레이어와 대립해서 좋을 건 없을 테니까.
왜, 지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형제가 쌍으로 도움을 받다니. 이걸 뭐라고 해야 돼?
만약, 사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상자가 속출했을 게 당연했다.
가온과 이나즈마를 따질 것 없이 말이다.
하지만 사내의 활약으로 전황이 바뀌었다.
사내는 혼자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플레이어란 소리였다.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겠지.
-근데, 하필이면 같이 본 게 이나즈마 녀석들이야.
이나즈마엔 한국의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그중에선 가온이 빼앗긴 플레이어들도 꽤 됐다.
조건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나즈마는 출혈이 발생하더라도 공격적으로 대한민국의 플레이어들을 영입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아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이란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남태민이 히사기에게 이를 갈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거지.
남철민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
남태민의 이성이 돌아왔다.
절대 양보할 수 없다.
맨정신에 들은 건 그 말뿐이었지만.
무엇을 양보할 수 없다는 건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태민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10대0? 콜. 거기에 뭘 더 얹어줄지 고민해 보자고.”
같은 시각.
넷튜버, 박휘강의 채팅창은 폭주 중이었다.
-ㅁㅊㅋㅋㅋㅋㅋㅋㅋ
-실화냐??? 저거 클래스가 대체 머임???
-고래 싸움에 끼어든 새우가 너무 크다ㅋㅋ
-소문 듣고 왔습니다 여기가 성지라면서요?
가온과 이나즈마.
두 길드 사이에 난입한 의문의 플레이어.
그런 플레이어를 처음부터 중계한 넷튜버가 있다.
──────
제목 : 바퀴처럼 끈질긴 중계! 휘강이의 생방송~
현재 시청자 수 : 68,923명
──────
그 소문이 퍼져 나간 덕분에 박휘강의 방송에는 무려 7만 명에 육박하는 시청자가 몰렸다.
놀라서 기절해도 모자랄 정도의 수치였거늘.
“와아……!!”
정작 박휘강에겐 시청자 수를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
그게 자신의 시청자 수보다도 훨씬 믿기 어려웠으니까.
“여러분들 보이시나요? 거의 다 이긴 것 같아요!”
남은 기사들의 수가 몇 되지 않았다.
그들조차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
플레이어들이 승리한 것이었다.
“진짜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이 아니시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게다가 박휘강을 비롯해 처음부터 사내를 지켜본 시청자들은 알고 있었다.
이 광장 전투에서 사내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아ㅋㅋ 유입들은 에고 소드도 못 봤겠네~
-에고 소드?? 그건 또 뭐임??
-뭔진 몰라도 이름부터 보통 아닌데?
-못 본 놈들은 다시보기로 보고 와라ㅋㅋㅋㅋㅋ
-ㄹㅇㅋㅋ 간지 오졌음 그때
그래, 사내는 자신의 무기조차 꺼내지 않았으니까.
아스큐라 백작의 병사를 일격에 보내버린 그 무기 말이다.
박휘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가 지켜보시는 듯한 기분이시죠?”
그랬다.
사내는 벽과 기둥을 세우고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당장 경험치와 전리품 따윈 중요치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희한하네 나 같으면 그냥 다 쓸어버렸다ㅋㅋ
-에고 소드 보고 왔는데 뭐냐? 개쩌네
-모양이 막 바뀌네ㅋㅋ 최소 유니크 예상합니다
-그 칼이면 기사들도 한 방 아니냐ㄷㄷㄷㄷ
……대체 정체가 뭘까?
사내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풀썩─
이내, 마지막 기사가 쓰러졌다.
그러자 마치 합을 맞춘 것처럼.
‘설마, 한국인인가? 그렇다면…….’
‘내가 이번에도 빼앗길 것 같냐? 절대 안 놓친다.’
‘적어도 이름이라도 여쭤보고 싶은데.’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광장 중앙에 홀로 서 있는 그 사내를 향해.
그런 사내의 표정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이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는 막대한 관심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처럼.
*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피곤하다.’
앞으로 마력을 바닥까지 쥐어짜 내는 건 자제하자.
아무래도 그 후유증이 상당했다.
마력 회복에 관한 장비가 하나도 없는 탓이겠지.
이름이 뭐냐고.
속해있는 길드가 있느냐고.
혹시 한국인이냐고.
사실, 대답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랑펠의 까칠한 성격을 떠나서.
나부터가 피곤해서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렇다 할 장비 하나가 없어서.
마력 탈진으로 비틀거리는 나를.
굳이 이렇게 붙들어야만 하는 것인가?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나는 냉랭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므로 질문은 받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