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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5화 (130/489)

◈ 15화. 고래 싸움에 또 고래가 (3)

아르카나 세계관에는 수많은 신.

그리고 그런 신을 섬기는 종교가 있다.

신이 있으면 그와 대적하는 악마도 있는 법.

그 종교들에도 악마와 맞서는 사제들이 존재했다.

‘구마 사제라고 했었지.’

물론, 내가 종교나 다른 클래스까지 파고들 정도로.

아르카나 세계관에 관심이 있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것뿐.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악마 사냥꾼 퀘스트를 수행하며 지겹도록 들었던 게 바로 이 대목이었으니까.

-구마 사제들의 구마의식은 그저 악마를 내쫓을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 방식이 될 수 없지. 우린 그들과 다르다. 우린 악마를 찢어 죽이니까.

……아니, 그땐 정말 멋있게 느껴졌단 말이야.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 설령 악에 빠져 악마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악마를 사냥할 뿐이다. 그것이 악마 사냥꾼의 길이니까.

근데, 크고 나서 보니까 막장도 이런 막장이 또 없다.

노동법은커녕.

인권부터 개나 줘버린 직장이었잖아, 이거?

‘아무것도 모르는 중2, 청소년한테 말이야.’

잘 망했다, 악크샨!

내 흑역사를 남 탓으로 넘겨보기도 잠깐.

-그 차이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게 구마의식이다.

[구마의식].

천적관계와 더불어 악마 사냥꾼에겐 둘밖에 없는 고유 스킬.

나는 스킬창을 열어 그 차이점을 확인했다.

───────

구마의식 : 악마를 의식으로 초대한다.

───────

플레이어가 되고 나선 단 한 번 사용해 본 적이 있었다.

왜, 남철민에게 빙의한 임프와의 전투에서 말이다.

그 효과는 반쪽짜리.

아니, 그보다도 못했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효과밖에 발동되지 않았었지.’

빙의자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빙의한 악마에게 직접 피해를 입히는 효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구마의식에 필요한 제물이 없었거든.

-악마 사냥꾼의 구마의식은 제물에서부터 다르다. 다른 종교들은 신의 힘을 빌리기 위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제물을 필요로 하지만…….

애초에 악마 사냥꾼들은 신 따위를 섬기지 않았다.

정말 신이 존재했다면.

세상에 악마 따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악마 사냥꾼들의 생각이었으니까.

-명심해라. 우리의 제물은 악이 깃든 모든 것이다.

그래, 악이 깃든 모든 것.

나는 과거 퀘스트를 수행하며 구마의식을 발동했을 때 그 제물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아이템이 바로 악마의 아이템이었다.

플레이어들이 단순 뽑기 아이템이라고 여기는 이것이었다.

나는 목걸이를 바라봤다.

보고 있자니,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그렇다.

‘……이게 또 뽑아보고 싶기도 하고.’

뭐, 그런 느낌 있잖아?

괜히 나는 당첨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목걸이, 장신구였다.

일단, 레어 등급 아이템이라는 건 확정이니까. 마력 재생력 옵션이 하나라도 달려있으면……. 마력 효율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

그러나 나는 꽝, 당첨 여부를 떠나서.

이것이 쓸데없는 기대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에게 재물이란 덧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말이지.

더 나아가 악마의 아이템이 구마의식의 제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이 또한 하찮은 유혹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에 대한 미련을 접어버렸다.

그러나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랑펠의 고고한 성격은 제쳐놓고서라도,

이게 생각을 해보니까……. 아쉬울 게 아니었다.

‘……잠깐, 제물을 사용한 구마의식이라면.’

구마의식의 효과도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까?

나는 과거 퀘스트에서 봤던 구마의식의 효과를 떠올렸다.

‘……그 효과도 그대로 넘어왔다면.’

……이거,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아스큐라 백작을 사냥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고작 91레벨.

430레벨짜리 몬스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었다.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건 다름 아닌 퀘스트였다.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진행 중)

보통 퀘스트가 아닌 클래스 퀘스트.

사냥하는 게 아니라.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쯤은 가능하지 않을까?

어쨌든, 시도해 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또각─

그 이유야 어찌 됐건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서일까.

나는 보다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런 나의 보폭이 이내 멈춰 섰다.

……뭐가 저렇게 많아?

*

낌새를 느낀 건 대로에 진입했을 때부터였다.

폐허가 되기 전엔 번화가였겠지.

그러나 그 드넓은 거리에 그림자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아.’

남태민의 직감이 경고했다.

현재 상황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그래, 냉정하게 판단하면 이질적이었다.

‘개체 수가 너무 적어.’

[백작의 영지].

균열에 진입하고 처치한 몬스터의 수가 채 열 마리도 되지 않았다.

이나즈마 놈들에게 빼앗긴 게 아니냐고? 유감이지만 저쪽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찰하고 왔는데 마찬가지야.”

은신 해제.

모습을 드러낸 길드원이 남태민에게 보고했다.

“지형을 보니까 모든 길이 중앙 광장에서 하나로 통하게 되어있어. 이대로 가면 이나즈마 쪽이랑 광장에서 마주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나도 합류할게.”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중앙 광장에 들어서자 이나즈마 놈들이 보였다.

히사기가 이쪽을 보더니 말을 건네왔다.

“이거 각오가 무색하게 평화롭네요. 안 그런가요?”

히사기 카즈마.

세상에 뱀 인간이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뱀과 닮았다.

웃는 모습이 마치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만 같았다.

남태민은 인상을 구겼다.

“우리가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또 그런 서운한 소리를.”

“지랄은 거기까지 하자. 이젠 귀찮다. 너도. 이나즈마도.”

남태민은 히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녀석에게 패배했을 때도, 녀석을 이겼을 때도.

히사기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지금처럼 소름 끼치게.

하지만 그것 또한 과거의 일이다.

이제는 자신도, 가온도.

히사기와 이나즈마에게 더는 꿀릴 것이 없었으니까.

“귀찮다니. 한국인들은 너무 직설적이란 말입니다. 상처를 받게 돼요. 이 고통을 되돌려 주고 싶을 만큼.”

남태민은 피식 웃었다.

“응. 돌려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그러시든가.”

그 도발에 이나즈마의 길드원들이 발끈했다.

“저 새끼가 근데……!”

그때 남태민의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노야로, 빠가야로.

그 목소리가 발끈한 것치고는 워낙 커서 말이지.

이어폰의 음량을 키우자 남철민의 음성이 들렸다.

-아아, 이제 들리나?

“잘 들려. 소리 좀 키웠어.”

-들린다니 다행이네. 근데 방금 그 말 꼭 해야 됐어?

“형, 균열에서는 그 기세라는 게 있어. 밀리면 안 되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남철민이 말을 덧붙였다.

-당장은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샤이닝이랑 천하통일 쪽 정보를 입수했어.

“……뭐? 그것들이 우리보다 진행속도 빨라?”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따질 거 따지는 우리랑 다르게. 그쪽은 감정이 앞서는 치킨 게임 중이니까. 어쨌든 덕분에 패턴을 파악했어.

패턴을 파악했다.

그 소리에 한시름이 놓였다.

“정말이야? 우리 형, 분석관으로 앉힌 보람이 있네.”

-이게 말로 표현하기가 조금 까다로워서 그래. 송출 화면 보면서 이야기할게. 근데,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주변에 보이는 게 없네. 아까부터 나무도 안 보이고?

“여기? 광장 같은데. 여러 갈림길이 다 여기로 통해있어.”

-……뭐?

그 소리에 남철민이 다급하게 말했다.

-당장 광장에서 나와. 빨리!

“……!”

당장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남철민이 그렇게 말한 이상 따르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히사기와의 신경전 때문이었을까.

빌어먹게도 한 박자, 늦고 말았다.

두두두두두─!

광장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그 굉음에 모두가 흠칫했다.

“……뭐야, 이거?”

“자, 잠깐! 땅이 울리는데?!”

“적이 온다! 위치를 파악해!”

스릉─!

남태민은 재빠르게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의 클래스는 야만전사, 바바리안.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커다란 대검을 치켜들었다.

-젠장, 어쩔 수 없나. 첫 충돌은 감수하는 수밖에.

“이거 기사들이지?”

-맞아. 350레벨.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들.

두두두두─!

과연, 기사라는 건가.

말을 타고 등장하다니.

레벨도 레벨이지만 기병이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남철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탱커를 앞세운다고 해도 치명상을 입을 거야. 그 천하통일의 탱커 라인도 돌진을 완전히 막아서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좁은 곳에서 맞서 싸워야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이렇게 넓은 장소에서 기병의 파괴력은 배가 된다.

문제는 또 있었다.

“……마스터!”

“말해. 듣고 있어.”

“이거 세 방향 공격인데요? 우리가 온 남쪽을 제외하고 삼방향에서 기병들이 돌진해 오고 있어요!!”

삼방향이라니.

이래서는 희생을 감수할 앞선을 내세우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상황은 이나즈마도 마찬가지였다.

히사기가 남태민에게 말했다.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군요. 등 뒤를 맡기겠습니다.”

……뭐, 등 뒤를 맡겨?

이 뻔뻔한 새끼가.

남태민은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남철민이 만류했다.

-네 기분은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어. 당장은 서로가 서로의 등을 맡기는 수밖에. 우리가 동쪽, 이나즈마가 서쪽을 맡으면 남은 건 북쪽인가? 젠장. 난전은 피해야 하는데…….

그래, 난전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플레이어 랭킹 11위.

남태민의 레벨은 368레벨로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보다 높았지만, 그렇지 못한 길드원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난전 상황이 되면 그 격차가 큰 피해로 이어질 게 뻔했다.

“……내 실수야.”

심상치 않다.

직감이 경고했을 때.

순진하게 광장에 진입하면 안 됐다.

아니, 히사기랑 쓸데없는 신경전만 벌이지 않았어도…….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북쪽은 내가 맡을게.”

그런 남태민의 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보다 강렬하게, 야만스럽게.

바바리안의 고유 스킬이 발동된 것이었다.

───────

광폭화 : 공격력이 대폭 상승하며 피해에 둔감해진다.

───────

-……미쳤어? 너 혼자 북쪽을 맡겠다고?

미친 짓이겠지.

하지만 실수엔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남태민이 비장한 각오를 다지던 그때.

드디어 백작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두두두─!

삼방향에서 들이닥치는 기병들.

그 위용은 실로 음산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피에 대한 갈증을 표출하는 듯.

거칠게 내뿜는 입김.

광폭화가 아니었다면 분명 위축됐겠지.

그러나 각오는 되어있다.

대검을 굳게 쥐던 순간이었다.

“?!”

쿠구구쿵─!

굉음!

말발굽이 내는 소리와는 달랐다.

말발굽이 땅을 울리게 했다면.

이건 마치 땅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듯한 박력이었다.

“……이거?”

이 굉음, 분명 들은 적이 있었다.

남태민과 히사기.

두 사내가 동시에 멈칫했다.

그 머뭇거림이 경악으로 바뀌는 건 찰나였다.

“!!”

흔들리던 땅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커다란 성벽처럼.

어느새 아득하게 솟구친 그 돌벽이.

기사들의 돌진을 완벽하게 되받아친 것이었다.

“가, 갑자기 이게 뭐야?”

“……가온에 이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있다고?”

“설마, 이나즈마 놈들 짓인가?”

소란 중.

또각─

문득, 광장을 울리는 청아한 구두 소리.

남태민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먹색 롱코트를 걸친 사내가 있었다.

그러자.

그 어느 때보다 당황한 남철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 저 얼굴은……? 맞는데. 뭐야, 이거? 서, 설마 저 돌벽을 소환한 게?! 아니, 잠깐만. 그런 게 가능하다고? 아니, 말이 안 되는데?!

*

나는 벽을 세웠다.

단순한 『마법』으로 치부하면 서운하다.

마력의 효율을 고려하는 것은 물론.

‘이른바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학창 시절 배운 기본적인 물리적 지식까지.

처절하게 끌어모아 토대로 삼아 올린 성벽이란 말이다.

그래, 보다시피 나는 매 순간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다는 것이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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