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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3화 (128/489)

◈ 13화. 고래 싸움에 또 고래가 (1)

균열의 붕괴도가 급상승했다.

-[영지의 외곽] 균열 공략 달성률이 95퍼센트에 다다른 가운데. [백작가의 영지] 균열의 붕괴도가 무려 60퍼센트를 넘어섰다는 속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고작 하루였다.

균열의 붕괴도가 60퍼센트를 돌파한 것이다.

대격변 이후.

그간 수많은 균열이 생성되고 사라졌지만.

-그게……. 이런 케이스는 저도 처음 봅니다.

이 정도로 급격히 붕괴도가 상승한 건 이례적인 일.

그 이유를 추측하는 출연진도 있었다.

-붕괴 속도라는 게 원래 균열마다 조금씩 다르거든요? 대체로 균열 속에 있는 몬스터가 강할수록 균열이 견딜 수 있는 시간도 짧아집니다.

-그 말씀은 균열 속 몬스터가 생각보다 강할 것이다?

-그렇죠. 문제는 붕괴 속도가 증가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균열 속 몬스터가 전보다 더 강해졌다’가 맞는 말이겠죠. 하루 전보다요.

그 말에 출연진들은 할 말을 잃었다.

지겹도록 들었던 이번 균열의 높은 난이도.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몬스터가 더 강해졌다니.

-……그렇게 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멀쩡한 몬스터가 갑자기 강해지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래,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찾을 수만 있다면.

몬스터가 그 이상 강해지는 것도.

그 때문에 균열 붕괴도가 급상승하는 것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의견을 모아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앵커는 이런 끝인사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부디, 플레이어들이 희소식을 전해주면 좋겠습니다.

.

.

.

나는 액정에서 시선을 뗐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어째 난 알 것 같은데?’

균열 속 몬스터들이 강해진 이유도,

균열 붕괴도가 급상승한 이유도 말이야.

10년 만에 아르카나에 돌아온 주제에.

뭘 그리 아는 척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당하게 되물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악마에 관해서는 너희보다 많이 알고 있을걸?

끝나지 않던 악크샨에서의 훈련!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던 악마의 정보들.

그중에서 흡혈귀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흡혈귀는 피를 통해 자신의 권능을 나눠줄 수 있다. 물론, 나눠줬던 능력을 다시 거둬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끝까지 방심하지 마라.

흡혈귀, 아스큐라 백작은 [피로 물든 짐승]과 [피로 물든 산적]에게 자신의 권능을 부여했다.

그 몬스터들이 플레이어에게 쓰러지면서 그들에게 나뉘었던 권능이 자연적으로 아스큐라 백작에게 되돌아갔다…….

‘그래서 균열 붕괴도가 급상승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야기가 맞아떨어졌다.

다음 전개도 예측해 볼 수 있었다.

‘잠깐, 그럼 영지를 공략하면 성채의 붕괴도가 급상승한다는 거잖아.’

현재 붕괴도가 60퍼센트를 넘어선 걸 고려한다면…….

‘아무리 못해도 90퍼센트는 되겠는데?’

어쩌면 성채 균열이 붕괴.

현실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는걸.

최악의 가정이었지만 그 확률이 꽤 높았다.

그리고 그 레벨만 따져도 430레벨인 아스큐라 백작.

그 괴물이 더욱 강해진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평소와 같은 자세로 옷장을 연다.

격식에 따라 복식을 고른다.

당연하게도 어제와는 색만 조금 다른 정장.

그래도 추위에 떨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는 정장 위로 먹색 롱코트를 걸쳤다.

……그래, 롱코트.

균열에서 활동하다 보면 질질 끌릴 것 같은데.

얼어 뒤지는 것보다야 낫겠지.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러나 그와 별개로 내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귀족은 주었다 빼앗지 않는다. 아스큐라 백작.”

그것은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

그랑펠이 생각하는 귀족으로서의 긍지.

그 프라이드가 아스큐라 백작의 행동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각─

나는 구두를 신으며 덧붙였다.

“아니, 백작이란 칭호조차 아깝구나. 아스큐라.”

누가 봤다면.

그럭저럭 괜찮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

꼬옥─

……손에 쥐고 있는.

이 녹차 티백만 아니라면 말이야.

지켜보는 시선이 없다는 것에 감사하자.

나는 마법사의 탑으로 향했다.

*

본격적인 공략이 시작된다.

[백작가의 영지]

[적정 레벨 : Lv.350~400]

[붕괴 진행도 : 66.1%]

다시금 균열의 정보를 확인.

곳곳에서 각기 다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적정 레벨이 350에서 400레벨?! 미쳤구나, 진짜.”

“1시간도 안 지났는데 붕괴도가 6퍼센트나 올랐어.”

“아니, 영지가 이 정도면 성채는 대체 어떻다는 거야?”

수백 개에 다다른 [영지의 외곽] 균열은 전부 클리어했다.

이제 서른 개 남짓한 [백작가의 영지] 균열만 클리어하면 아스큐라 백작이 있는 [백작의 성채] 균열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균열의 개수가 확연히 줄어든 만큼.

플레이어들 간의 눈치 싸움도 치열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적정 레벨이 무려 350~400레벨.

고레벨 균열인 만큼 그 경험치와 전리품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일 테니까.

균열의 수가 부족한 만큼 경쟁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니까 그나마 만만한 경쟁 상대를 찾으려는 눈치 싸움이란 거지.

가온의 길드 마스터.

남태민은 그나마 형편이 좋았다.

“뭐, 샤이닝하고만 안 겹치면 되니까.”

샤이닝을 제외한다면 누가 와도 해볼 만하다.

남태민에겐 자신감이 있었다.

비록 버서커란 복병에 최초 클리어는 빼앗겼지만, 샤이닝과는 정말 간발의 차였다.

남철민도 같은 생각이었다.

남철민이 태블릿 PC를 두들겼다.

“샤이닝 쪽도 바짝 약이 오른 상태겠지. 그런 녀석들이 우리랑 같은 균열을 선택해서 좋을 건 없을 거야. 같이 망하자는 꼴밖에 더 되겠어?”

그러니까 이 균열로 하자.

가온은 베이스캠프를 빠르게 선점했다.

그런데, 잠시 잊고 있던 불청객이 찾아왔다.

남태민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하, 이 새끼들 봐라?”

길드 랭킹 4위, 이나즈마.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의 길드였다.

마법사의 탑이 솟아났다고 한들.

한국에 뿌리를 내리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똥고집을 부린 탓.

비행기를 타고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러시아에 도착한 이나즈마가 균열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나즈마의 길드 마스터.

히사기 카즈마가 남태민을 바라봤다.

남태민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한마디의 말도 오고 가지 않았지만.

서로가 그 속뜻을 알고 있었다.

남태민이 말했다.

“저 새끼가 한번 해보자는데. 어떻게 생각해, 형?”

남철민은 태블릿을 두드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먼저 자리를 잡았는데, 피하는 것도 영 모양이 안 살겠지?”

한국과 일본.

가온과 이나즈마가 같은 균열을 선택했다.

그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각국의 촬영팀들이 웅성거렸다.

“가온이랑 이나즈마가 붙어?! 무조건 특종감인데?”

그러나 이곳엔 특종감이 너무나도 많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소식들.

그중에서는 가온과 이나즈마의 대립만큼이나 관심이 쏠리는 구도도 있었다.

“세컨드 썬이랑 보헤미안. 경쟁자가 둘이나 붙어버렸잖아?”

“이거 버서커는 최초 클리어 땄다가 더 귀찮아진 꼴이군.”

“상도덕도 없다. 그것들. 어째 유럽 연합이라면서 자기네들끼리 더 치고받고 싸운다니까?”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건.

길드 랭킹 1위, 2위.

샤이닝과 천하통일이 맞붙었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샤이닝.

중국의 천하통일.

과연,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릴 만한 경쟁이었다.

그 결과에 따라 세계의 질서가 흔들릴지도 몰랐으니까.

“천하통일, 저것들 그냥 고춧가루 뿌리기로 작정했나?”

“이건 뭐 같이 망하자는 거 아냐?”

“둘이 붙으면 남는 것도 없겠다.”

당연하게도 두 길드.

모두에게 남는 것 없는 장사였다.

새로운 균열의 경험치와 전리품을 가장 강한 경쟁자와 나눠야 하는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서로가 물러나지 않겠지.

그러니까 보는 사람들만 재밌는 구경이었다.

“자, 그럼 이쯤에서 투표 한번 받겠습니다!”

취재진들만큼이나 신난 건 넷튜버 플레이어들이었다.

균열에 진입할 수 있는 건 플레이어들뿐.

어제만 해도 그들은 균열 내부 상황 중계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러니까 넷튜버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채팅 올려주세요! 후원 메시지도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과연, 어떤 균열을 선택해야 가장 많은 시청자를 모을 수 있을까?

거듭되는 눈치의 눈치의 눈치 싸움.

그 눈치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

.

.

현재 기온 영하 5도.

실화냐고, 정말.

하루 만에 5도 넘게 떨어지는 게.

코트라도 걸쳤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균열에 진입하기도 전에 얼어 죽었을 거야.

모락모락─

나는 찻잔의 온기에 손을 녹였다.

과연 『탐색』과 『간섭』 과정에서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인 보람이 있었다.

찻잔의 모양을 조금 더 복잡하게 구성했을 뿐인데.

영하의 칼바람에도 찻잔은 쉽게 식지 않았다.

‘슬슬 익숙해지는 참이야.’

[스킬]이 아닌 『마법』에 말이다.

그런 마법을 빠르게 습득하는 그랑펠의 재능에도.

나는 잔을 비우고는 그대로 손잡이를 놓았다.

툭─

허공에서 찻잔이 다시금 변형.

떨어지는 순간, 돌의 형태로 돌아가 있었다.

‘원상 복귀엔 탐색과 간섭의 수고 또한 줄어든다.’

이것 또한 마법에 익숙해지며 알아낸 활용법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이걸 실전에서도 써먹을 수 있느냐는 게 문제지만.’

그건 몸으로 부딪쳐 가며 알아볼 일이겠지.

물론, 이번 균열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아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심복’ : Lv.390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 : Lv.350

‘아스큐라 백작의 병사’ : Lv.300

애초에 만만하게 볼 수가 없는 레벨이잖아?

병사나 기사는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심복과는 무려 300레벨도 넘는 차이가 났다.

그러나 언제부터 내가 그런 것들을 따졌던가?

또각─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그 무게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팔자라는 걸 말이야.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칠 뿐이었다.

우아한 백조가 가라앉지 않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발버둥을 치듯.

나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악할 뿐이다.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그랬던 것처럼.

부디 그 노력이 의미가 있길 바라며.

또각─

나는 망설임 없이 균열에 진입했다.

.

.

.

균열에 진입하자 보인 건 처참하게 무너진 건물들.

[백작가의 영지]라고 하기엔 너무 볼품이 없었다.

현실과 아르카나.

두 풍경이 섞인 환경이라고는 해도 이건 심하다.

귀족으로서의 심미안이 절로 찌푸려진달까.

“형편없는 영지다. 아스큐라.”

나는 코트를 흩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

그리고 이내, ‘아스큐라 백작의 병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병사의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발달된 송곳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갈증이라도 난다는 듯.

입가에선 끊임없이 타액이 흘러나왔다.

그런 병사가 기척을 알아차리고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달려드는 병사를 응시했다.

그래, 이로써 다시 한번 확실해졌다.

저건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권능의 탈을 쓴.

추악한 흡혈귀의 저주에 괴로워하는.

가엾은 희생자일 뿐이었다.

나는 다시금 말했다.

“다시 보아도 형편없다.”

무너진 건물을 『탐색』, 그 형태에 『간섭』했다.

“허나 네게는 그조차도 아깝다.”

이내 마법이 『발현』했다.

콰쾅─!!

.

.

.

쿠구구구웅─!

뒤편에서 들려오는 굉음.

“?!”

두 사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보였다.

빠득─

남태민과 히사기 카즈마가 동시에 이를 갈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적당히 하지?’

이쪽은 저쪽을 신경 쓰기도 벅차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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