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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0화 (125/489)

◈ 10화. 유감스럽게도 (2)

균열에 진입하자 숲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흡혈귀, 아스큐라 백작의 영지.

타락한 땅과 러시아의 침엽수림.

그 두 공간이 정확하게 반반씩 뒤섞인 듯한 모습.

……풍경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미친, 더 춥잖아?!’

나무가 썩어버린 탓이었다.

찬바람이 정통으로 따귀를 때리는 것 같았다.

“!”

그러나 친절하게도.

얼어 뒈지지 말라는 배려인가.

나는 곧바로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크으르르르……!!”

[피로 물든 늑대 : Lv.230]

아스큐라 백작의 피에 감염된 늑대.

과연, 그 레벨답게 움직임이 빨랐다. 비슷하게 생긴 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흡혈귀의 피로 타락한 덕분에 그 종족이 ‘악마족’이 됐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너만 빠른 게 아니란 말이다.

또각─

달려드는 늑대의 공격을 가뿐하게 회피.

나는 퀘스트의 목표를 떠올렸다.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그저 악마 한 마리를 사냥하면 목표 달성이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대로 몸을 회전.

엇갈려 지나가는 늑대를 공격했다.

당연하게도 무기는 은제 단검.

슥─

“크릉!”

예리한 검날이 녀석의 뒤 허벅지를 갈랐다.

그 상처에서 거뭇한 피가 흘러나왔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임프와는 달랐다.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치를 치던 임프와 달리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이다.

‘레벨 때문이 아니다.’

늑대는 임프보다 20레벨이 높았다.

그러나 레벨이 오른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12레벨에 더해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상승한 스탯을 계산하면…….

방금의 내 공격은 늑대에게 적잖은 피해를 줬겠지.

그 증거가 눈에 보였다.

늑대는 뒷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빨을 드러내는 건 여전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리석게도 충성하는 대상을 잘못 골랐군.”

저건 아스큐라 백작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겠지.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 저 늑대가 아스큐라 백작에게 충성한다는 게 아니고.

그냥 아르카나에서 흡혈귀의 설정이 그렇다는 소리다.

-나는 흡혈귀를 싫어한다. 비열하기 때문이지. 녀석들은 악마 주제에 무리를 거느리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피로 대상을 타락시켜 강제로 자신을 섬기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혐오하면서 인간처럼 살길 바란다니.

떠오르는 악크샨에서의 NPC와의 대화.

나는 그 NPC의 말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둔하구나. 악마답게.”

아스큐라 백작.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녀석!

자고로 귀족이라는 건 말이야.

남들에게 추앙을 받고, 커다란 성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귀족이 아니란 말이다. 무엇보다 가슴 속에 긍지란 게 있어야 한단 말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숭고한 긍지.

손에 물을 묻혀도 꺾이지 않는 품격.

근육통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패딩 따윈 입지 않는 그런 똥고집.

왜, 어디 사는 누구처럼 말이지.

스왁─

전투는 길지 않았다.

속으로는 아스큐라 백작, 그랑펠을 동시에 씹고 있었지만.

이 순간, 내 시야는 그 어느 때보다 냉철했다.

“나는 너 같은 족속을 혐오한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5레벨이 상승해서 72레벨이 됐다.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급격히 늘어나는 게 체감이 된다.

나는 점멸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진행 중)

첫 목표를 달성하자 곧바로 다음 목표가 떠올랐다.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과연, 클래스 퀘스트답다.

‘악마 사냥꾼 아니면 알아듣지도 못하겠네.’

악마들이 공포를 느끼게 하라니?

이게 뭔 개소린가 싶겠지.

그러나 내게는 악마 사냥꾼으로서의 경험이 있었다.

괜히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 아니란 것이다.

-인간을 지금껏 생존하게 만든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공포다. 공포를 느낄 수 있기에 인간은 자신보다 강한 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은 퀘스트 도중.

NPC들이 끊임없이 늘어놓던 정신론.

-그러나 악마 앞에서 인간은 생존을 가능케 하는 공포란 감정을 활용할 수 없다.

그때는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말이야.

-그러니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선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 더 나아가 놈들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이 순간, 너희는 사냥당하고 있다는 공포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네.

그 정신론 수업 뒤로는 악랄한 퀘스트가 이어졌다.

지금 떠올리면 어떻게 성공했나 싶은 담력 테스트가 계속됐었지.

거기서 포기한 플레이어들도 꽤 많았었다.

물론, 그 당시 나는 무서울 게 없던 중2병.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그 훈련을 통과했다는 소리다.

푹─!

그래, 나를 떨게 하는 건 악마 따위가 아니다.

훌쩍.

러시아의 차디찬 시베리아 고기압이란 말이다…….

.

.

.

그리고 지금이었다.

나는 티타임을 가졌다.

찻잔이 필요 없다고 했던 이유.

그건 내가 찻잔을 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널려있던 바위를 탐색하고 간섭하여 그를 재료로 찻잔을 발현해 냈다.

이 또한 넷튜브에서 보고 깨달은 『마법』이었다.

정확히는 [연금술 스킬]이었지만.

‘발화’와 마찬가지로 그랑펠의 두뇌를 빌려 마법으로 변환했다는 소리였다.

고작 찻잔과 물 데우기라니.

며칠 동안 머리를 굴린 것치곤.

그 사용법이 지극히 소소하다 싶은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이 온기가 너무나도 소중하다…….

*

“그대들에게 내어줄 차는 없다.”

……뭔데? 줘도 안 마실 거거든?!

레오니는 진지하게 속삭였다.

“……쟤 넷튜버야?”

절레절레─

길드원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 루키인가? 그것도 아니면 초신성?”

절레절레─

길드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야, 저거? 랭커는 아닌데.”

레오니는 인상을 구겼다.

완전히 헛짚었잖아?

하지만 이건 자신의 촉 탓이 아니었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냐고. 늑대를 처량하게 울부짖게 만든 게 고작 플레이어 한 명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그 차림새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슥─

레오니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복장을 확인했다.

그래, 아무리 수준이 낮은 균열이라고 해도 자신처럼 장비는 제대로 착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이 균열엔 악마족이 득실거리잖아?

상태이상 저항력을 높여주는 장신구도 한 개쯤은 착용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정장? 구두우우우?!’

그것도 모자라서 저 남자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 어떤 상황이 와도 찻잔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손으로 굳게 붙잡고 있었다.

“씹, 얼탱이 없네.”

레오니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 뭐. 세상은 넓고 플레이어도 많다.

이런 플레이어가 있으면 저런 플레이어도 있는 거겠지.

그건 스스로에 대한 짜증이었다.

‘자존심 상하네. 씨발.’

그 과묵하던 몬스터들이 저 남자 앞에선 공포에 질렸단 소리잖아?

뭐, 전투를 지켜본 게 아니라 이유까진 알 수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쟁심이 들끓는다.

“흥.”

소리를 내고, 안 내고가 뭐가 중요하겠어?

먼저 쓰러트리고, 먼저 클리어하는 게 중요하지.

레오니는 더 이상 사내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또 졌어. 씨.”

……물론, 남자는 아까부터 이쪽에 신경을 끄고 있었지만.

이쯤 되니까 슬슬 궁금해진다.

대체 저 찻잔에 담긴 차가 뭐길래.

이런 환경에서도 한가로이 차를 즐길 수 있는 걸까.

‘……맛있는 건가?’

츄릅─

레오니는 침을 삼켰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대들에게 내어줄 차는 없다.

진짜로 치사해서 안 마실 거거든?!

레오니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자.”

“아까는 합류하는 편이 낫겠다면서요?”

“됐어. 맘 바뀌었어.”

“에이~ 언니, 삐졌구나? 차 안 준다고 해서?”

“조용히 해라. 줘도 안 마신다고 했지, 내가?”

“……언제?”

몇몇 길드원들이 사내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혼자잖아요.”

“합류하자고 물어라도 보는 게 어때? 뭐, 저쪽도 아는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됐거든? 자신감이 넘치시니까, 균열에 정장이랑 구두까지 신고 들어오셨겠지. 게다가 저 싸가지 봤잖아? 차도 안 주는데 정보를 잘도 알려주겠다야.”

“……뭐야, 삐진 거 맞잖아.”

콱씨─

레오니는 주먹을 들었다가 말을 이었다.

“잘하면, 나 정도는 될 거야.”

“뭐가……. 설마, 레벨이?!”

“응. 뭐, 신상 공개 안 한 랭커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레오니의 말에 길드원들이 술렁거렸다.

“하긴 스칼부터가 제대로 얼굴을 비춘 적이 없으니까…….”

플레이어 랭킹 1위, 스칼.

그도 베일에 싸인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레오니는 손사래를 쳤다.

“됐고. 경쟁자라고 생각해. 몸풀기 제대로 하고 좋지. 뭐.”

과연, 레오니의 촉은 굉장히 무뎠다.

어떻게 된 게 맞춘 게 하나도 없었다.

80레벨이 채 되지 않는 호열의 레벨도.

이 균열을 몸풀기라고 생각한 것도.

스와악─!

“!”

공기를 찢는 듯한 소음.

그건 화살이었다.

레오니가 그 소리를 알아차렸을 때.

화살은 이미 길드원 하나의 어깻죽지에 꽂혀있었다.

“다들 전투태세로 준비! 힐러는 부상자를 치료해!”

과연, 길드 랭킹 32위의 버서커.

기습을 당했지만, 그들은 능숙하게 태세를 변환했다.

그런데…….

“대, 대장.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데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빛.

그 붉은 눈동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호크아이!”

시야가 극도로 확대되는 궁수 클래스의 스킬.

주변 일대를 확인한 길드원이 상황을 보고했다.

“사방이 피로 물든 산적이야. 완벽하게 포위당했어. 그건 그렇고 대장……. 저 녀석들 못해도 200마리는 될 것 같은데?”

버서커 길드의 인원은 총 마흔다섯.

머릿수로는 확실한 열세.

게다가 피로 물든 산적은 인간형 몬스터였다.

상대하기 까다롭단 소리였다.

“그래, 이래야 신규 업데이트답지!”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인가?”

“귀찮게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좋네.”

하지만 레오니와 버서커 길드는 전투에 익숙했다.

그 길드 명부터가 괜히 버서커, 광전사가 아니란 말이다.

레오니가 쌍검을 들어 올렸다.

“온다. 얘들아.”

한 차례, 화살 세례를 막아낸 뒤 돌진한다.

레오니는 그럴 계획이었다.

그 머릿수가 많다고 한들, 레벨의 격차는 무시할 수 없다.

탱커들은 충분히 공격을 받아낼 수 있겠지.

레오니는 그 틈을 노려 포위망을 돌파할 생각이었다.

‘충분하다.’

레오니는 그렇게 견적을 냈다.

그런데, 잠깐.

불현듯, 레오니는 뒤를 돌아봤다.

‘……쟨 어떻게 하냐?’

고개를 돌자 그곳엔 사내가 있었다.

레오니는 경악했다.

“저거, 진짜 정신 나갔네?!”

분명 화살이 쏟아지는 걸 봤을 텐데도.

여전히 찻잔을 꼭 부여잡고 있는 사내가.

*

나는 찻잔을 들고 사태를 지켜봤다.

화살이 플레이어의 어깨를 꿰뚫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보아하니 포위를 당했다.

그 숫자를 고려했을 때, 내게 쏟아질 화살도 적지 않다.

당연하게도.

내겐 저기 플레이어들처럼 화살을 막아낼 판금 갑옷도, 방패도, 대신해서 막아서 줄 동료도 없었다.

그러나 괜찮다.

그 순간, 내게 화살이 날아들었다.

슈슈슉─!

나는 바닥까지 비워진 찻잔을 바라봤다.

“야외에서 즐기는 차도 나쁘지 않군.”

그것은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탐색』 대상은 손에 쥐고 있는 찻잔.

『간섭』까지의 과정이 마치 일련의 동작처럼 부드럽다.

그러니까 나는 마법을 『발현』했다.

“사소하게 사용했다고 한들.”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의 형태가 바뀌어 간다.

후두두둑─

이내, 화살들이 부러져 발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위력까지 하찮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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