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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9화 (124/489)
  • ◈ 9화. 유감스럽게도 (1)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스킬]과 『마법』은 다른 건가?’

    나는 발화를 발현했을 때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그 습득 과정에는 다름이 있어도 결국 발화는 스킬이었다.

    발현할 수 있게 됐다면 스킬 목록에 발화가 생성되어야 한다는 소리.

    그러나 내 스킬 목록은 여전히 단출했다.

    《Skill》

    천적관계

    은 마스터리

    사격 마스터리

    동시 사격

    구마의식

    그것은 다른 마법을 발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경험과 지금의 경험.

    거기에서 나는 한 가지 가설에 도달했다.

    [스킬]과 『마법』은 완벽하게 다른 개념이다.

    그 둘을 다른 선상에 두고 보니 이해가 됐다.

    ‘고작 발화 마법 하나를 발현하는 데 걸린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됐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설정에 맞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왜, 보는 것만으로 마법을 곧장 발현할 수 있었다던.

    그 중2병다운 그랑펠의 설정 말이야.

    나는 입을 열었다.

    “과연, 충분히 그럴만했군.”

    이번만큼은 방어기제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다른 [스킬]과 『마법』.

    그런데 스킬을 마법으로 보고 이해하려고 하니, 그만한 고생이 들어가는 것이 마땅했다.

    안 되는 걸 하려고 하니까 머리가 깨지려고 했던 거지!

    ‘……근데 스킬을 마법으로 바꿔서 발현하는 데 성공한 거잖아?’

    그런 의미에서 클라우디 가문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설정은 그대로 덧씌워진 모양이었다.

    나는 포탈을 바라봤다.

    과연, 넷튜브로 스킬을 지켜보던 때와는 달랐다.

    펜과 종이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머릿속에 『탐색』, 『간섭』까지의 과정이 그려졌다.

    발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의 마법, 『포탈』.

    나는 저 고위 마법을 정말 발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발현하는 데엔 막대한 마력이 필요하다.

    당장은 시도조차 해볼 수 없겠지.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시선을 옮겨 마법사의 탑의 전경을 둘러봤다.

    앞으로 들를 일이 많겠는데, 여긴?

    마음 같아선 지나가는 마법사 NPC 하나를 붙잡고 부탁하고 싶었다.

    내게 마법을 보여달라고.

    너무 어려운 것 말고 하급 마법부터 차근차근.

    물론, 콧대 높은 마탑의 거주민들께서 내 부탁을 들어줄 일은 없겠지.

    게다가 나는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진행 중)

    “내게 가르침 따윈 필요 없다.”

    ……덧붙여서 이 고귀한 긍지가 부탁이란 행동을 용납하는 일은 없겠지.

    명령이라면 모를까.

    정말이지, 피곤한 성격이다.

    나는 곧 포탈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또각─

    더없이 오만한 걸음으로.

    .

    .

    .

    휘이잉─

    ……빌어먹을, 역시 춥다.

    녹차 티백 챙길 정신에 핫팩이라도 챙길걸!

    그대로 팔짱을 끼고,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어지는 추위였다.

    그러나 부탁조차 하지 않는 이 몸이시다.

    그런 격 떨어지는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나는 금방이라도 후들거릴 것 같은 다리로 잘도 걸어갔다.

    시야가 바뀌고 보이는 것은 울창한 숲.

    그곳에는 이미 많은 인파가 모여있었다.

    “네! 저는 지금 러시아, 신규 균열 앞에 나와 있습니다.”

    언론사 취재진들.

    “자, 형님들이 원하시는 균열로 들어가겠습니다. 몇 번?”

    넷튜버 플레이어들.

    “상황은 어때. 괜찮아? 어, 영상은 잘 송출되고 있어.”

    외부에 캠프를 차린 길드까지.

    과연, 이번 아스큐라 백작 균열에 쏟아지는 관심을 한눈에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일단, 대다수가 경쟁자들이라고 해야겠지.

    어쨌거나 내 퀘스트 목표는 흡혈귀를 사냥하는 것이었으니까.

    날고 기는 길드와 플레이어들과의 경쟁.

    솔직히 말해 그들보다 먼저 아스큐라 백작을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머릿수는 물론, 레벨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으니까.

    그러나 내겐 자신감만큼은 충만했다.

    이 자신감이 제발 근거 있는 자신감이기를…….

    나는 바라며 가까운 균열로 걸음을 뗐다.

    “아이, 잠깐만.”

    “?”

    “저기요! 우리 상도덕 좀 지킵시다.”

    그런 나를 막아 세운 건 어떤 남자였다.

    동그란 얼굴이 인상적인 남자.

    남자는 손에 카메라가 연결된 삼각대를 쥐고 있었다.

    넷튜버구나.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내가 요 정도 페이스를 기억 못 할 리는 없고……. 신입이죠? 컨셉은 신선하네. 뭐, 균열 속 샐러리맨 그런 컨셉인가? 아무튼. 이 균열은 제가 리뷰할 거니까 다른 균열 알아보세요. 훠이훠이.”

    샐러리맨 콘셉트의 신입 넷튜버라.

    반박하기 힘든데?

    확실히 내 차림이 그렇게 보일 법도 하겠다.

    일단, 누가 봐도 균열 공략하러 온 플레이어처럼은 안 보여.

    하지만 제대로 봐라.

    내가 댁처럼 카메라를 들고 있나.

    그렇게 대답해 주고 싶어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비켜라.”

    “뭐, 뭐요?!”

    “지금 내겐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다.”

    러시아의 매몰찬 바람보다 냉랭한 음성.

    그건 ‘나는 너무 추워 견딜 수 없어요.’라는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상냥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혀, 형님들 보셨죠? 요즘 신입들 싸가지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요?! 네? 얼굴을 보니까 제가 무조건 잘못했다고요? 아니, 누님! 누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당황한 남자를 뒤로하고 균열 앞에 섰다.

    [영지의 외곽]

    [적정 레벨 : Lv.240~270]

    [붕괴 진행도 : 9.7%]

    현재 내 레벨은 67.

    적정 레벨에 무려 200레벨가량 미달.

    그런 균열 앞에서 나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균열 안이라면 이 추위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길드 랭킹 32위, 버서커.

    길드 마스터, 레오니 벨루치는 하얀 미간을 구겼다.

    “씨발, 진짜 뭐 이래?”

    현재 레오니는 348레벨.

    그녀는 플레이어 랭킹 100위 권에 위치한 랭커였다.

    그 위치에 걸맞게 레오니에겐 수많은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균열은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정말이지, 엿 같았다.

    레오니는 쌍검을 휘둘렀다.

    스왁─

    분명 다리를 베었건만.

    눈동자가 새빨간 저 늑대는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이 똥개가!”

    스스슥─

    쌍검에서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검격!

    곧 늑대가 쓰러졌다.

    당연한 일이다.

    [피로 물든 늑대 : Lv.230]

    무려 100레벨의 차이.

    고작 230레벨짜리 몬스터가 그녀의 공격력을 감당할 순 없을 테니까.

    레오니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했다.

    확실하게 쓰러트렸고, 확실하게 경험치도 받았다.

    그런데, 이 찝찝한 기분은 뭐지?

    “……얘들아. 나만 그러냐?”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레오니.

    그러나 그 심각한 얼굴도 지금의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제멋대로 자른 주홍빛 단발머리조차 소화해 내는 귀염상.

    여리여리한 골격.

    누가 이 외모만 보고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이게 광전사, 버서커 길드의 마스터라니.

    “또 뭐가요.”

    “언니 또 또 날카로운 척한다?”

    “진짜 하나도 안 무서움.”

    그러니까 길드원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귀여운 탓도 있었지만.

    평소 날카로운 척하는 것치곤 레오니의 촉이 그다지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훈훈한 분위기는 항상 오래가지 못했지만.

    “아니, 씨발. 존나게 찝찝하다니까?!”

    입을 여는 순간, 이렇게 깨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농담이 아니라 매일 봐도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길드원들이 한숨을 뱉었다.

    “……그래. 이래야 우리 언니지.”

    “근데 뭐가 찝찝한데요? 왜, 공략이 너무 쉬워서?”

    “똥촉 발동 걸림.”

    레오니가 콱─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니, 쉬운 건 당연하지! 짜샤! 우리 레벨이 몇인데.”

    “언니. 말조심은 못 해도 손버릇까진 가지 말자, 우리.”

    “잔소리는 꺼지시고요. 아니, 너희 이런 몹 봤냐고?!”

    퍽─

    레오니가 바닥에 널브러진 늑대를 걷어찼다.

    “얘네 뒤질 때까지 아파하는 기색이 1도 없잖아.”

    “뭐, 그냥 악마라서 그런 거 아니야?”

    “콱씨. 우리가 악마 처음 잡냐? 임프 소리 지르는 거 못 들어봤어?”

    ……잠깐만, 듣고 보니까 정말 그랬다.

    레오니를 비롯한 버서커 길드의 최정예 30인.

    그들은 [영지의 외곽] 균열에 입장하고 약 3시간가량 사냥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피로 물든 맹수들]과 [피로 물든 산적]을 수십 마리는 처치했을 텐데…….

    “……너희 얘네가 비명지르거나 낑낑거리는 거 들어봤냐?”

    되돌아보니 정말 듣지 못했다.

    길드원들이 대꾸하지 않자, 레오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찝찝해. 이 새끼들 뭔가 있어.”

    “그래서 그 뭔가가 뭔데요.”

    “아니, 씨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언니, 듣고 보니까 확실히 이상하기는 한데……. 그래도 별다른 거 없지 않을까? 뭣보다 확실한 게, 잡아서 경험치도 확실하게 받았잖아.”

    “그건 맞는데. 촉이 있다니깐?!”

    길드 랭킹이 언제나 30위.

    그 위아래로 간당간당한 이유가 있다니까?

    우리 길드는 마스터의 위엄이 바닥에 떨어졌다.

    “진짜 날 뭘로 보고…….”

    레오니가 먹히지도 않을 역정을 내려던 순간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숲에서.

    -깨, 깨갱!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

    희미하지만 마치 짐승이 낑낑거리는 소리 같았다.

    순간, 레오니에게 쏟아지는 시선.

    “……야, 너네 그, ‘그럼 그렇지’ 하는 그 눈빛 뭔데?!”

    균열에 입장한 플레이어가 몇 명인데.

    걔들이 내는 소리일 수도…….

    -아, 아우우우우!

    그러나 처량하게 이어지는 하울링이 쐐기를 박았다.

    이젠 눈빛이 아니라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그렇지.”

    “역시 이래야 우리 언니지.”

    “하씨. 또 뭐가 어디에서 틀린 건데?”

    왜 쟤들은 낑낑거리고 울부짖는 거지?

    억울한 마음, 궁금한 마음이 반반이었다.

    레오니는 길드원들을 이끌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어차피 합류하는 편이 낫잖아? 어쨌든, 같이 균열을 공략하는 처지인데.”

    사실 [영지의 외곽]은 몸풀기나 다름없는 균열이었다.

    악마족 몬스터가 등장한다고 해도, 이번 공략에 참여한 길드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클리어할 수 있겠지.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는 건 모든 외곽 균열을 클리어한 다음.

    [백작의 영지] 균열부터다.

    “……대체 어떤 자식들이길래.”

    그 과묵한 놈들을 겁에 질려 울부짖게 만든 거람?

    레오니는 몇몇 예상 후보를 꼽았다.

    ‘일단, 샤이닝이랑 가온은 제외. 걔네는 우리가 피했으니까.’

    랭킹 1위와 5위.

    그 두 길드랑 붙어봤자 고래 꼬리 짓에 터지는 새우밖에 더 되겠어?

    그런 생각으로 그들과는 멀리 떨어진 균열에 진입했던 버서커 길드였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많지 않았다.

    “딱 보니까 세컨드 썬, 아니면 보헤미안. 둘 중 하나겠네.”

    하지만 말했다시피.

    레오니의 촉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

    울음소리를 쫓아 도착한 곳엔 길드 따윈 없었다.

    그곳엔 달랑 사내 한 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내의 모습이 레오니만큼이나 배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정장 차림도 모자라 구두까지 갖춰 신은 모습.

    하지만 무엇보다 가관인 건.

    그런 사내의 손에 웬 찻잔이 들려있단 점이었다.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김.

    보는 것만으로도 따끈해 보이는 찻잔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내의 모습이 조금도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사내에게서는 여유로운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티타임을 만끽하는 모양새였다.

    꼴깍─

    “……뭐 하는 미친놈이야, 저건?”

    그 이질적인 풍경에 레오니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레오니에게 사내가 말했다.

    “유감이지만.”

    더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대들에게 내어줄 차는 없다.”

    .

    .

    .

    따뜻하다.

    이제야 좀 한기가 가시네.

    티타임의 소중함을 알게 된 지금.

    나는 안주머니의 녹차 티백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꼴깍─

    목마른 척 해봤자 줄 건 없다는 말이다.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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