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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화 (118/489)

◈ 3화. 교육이 필요하다면 (2)

성난 놀들의 발톱과 이빨을 피하고.

주먹을 내지른다.

그 간단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을 뿐.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 행동에는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공격이 빗나가면 그대로 물어뜯기는 건가?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게 아닐까?

사람이라면 응당 품을 수밖에 없는 생각.

그 걱정을 완전히 무시한 그랑펠의 정신과 육체.

『그의 자긍심은 더없이 무거우며 흔들리지 않는다. 설령 그 무게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설정’이 보잘것없는 악마 사냥꾼의 능력치를 백분, 아니 그 이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쯤 되니 나도 놀라울 정도였다.

‘정말 중증 중2병이었구나. 나는.’

정말 목숨보다 멋이 우선인 위험한 놈이었어.

하지만 그 설정의 영향이라고 한들.

결국, 나의 맨손 격투 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격투에 관한 스킬은 습득하지 못했으니까.’

퍽─

이쪽은 온 힘을 다해 내지른 주먹이거늘.

“크, 크릉!”

놀에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이거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 거 아닐까?

‘내구도가 아깝지만 사용하는 수밖에 없나.’

머리로는 정말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건만.

내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처량하구나.

내 처지가 마치 호수 위의 백조 같았다.

타인이 보기엔 내 모습이 정말 놀들을 훈육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진지하다.

백조가 호수에 떠 있기 위해 물갈퀴를 휘젓듯.

나도 최선을 다해 피하고,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 속과는 무관하게 태평한 말이 튀어나왔지만.

“아직도 훈육이 부족한 것인가?”

그때였다.

서정연의 고함이 들려왔다.

“캐스팅 끝났어요! 피하세요!”

그녀의 지팡이에서 솟구치는 화염.

또각─

나는 이번에도 역시 기품이 넘치게 걸었다.

날아드는 마법은 파이어 애로우.

내가 마법사에 대해 아는 건 없다만.

저게 하급 마법이란 건 안다.

무엇보다 투사체 속도가 느렸다.

저래서야 빗나갈지도 모르겠군.

짐작하고 다음 행동을 생각하는데…….

어째서인가, 놀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깨, 깨갱!”

축 처진 꼬리.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역시 들개에게 훈육은 비효율적이군.”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말하면서도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제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니던가.

자중하자, 이호열.

다 과거의 업보다.

“아싸, 맞았다!”

불끈─

서정연이 주먹을 쥐어 보인다.

보고 있다가는 또 어떤 개소리가 튀어나올지 몰라.

나는 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르륵─!

놀들이 불타 사라진 자리엔 아이템만 남아있었다.

[조잡한 화살]

[등급 : 노말]

[제한 : 없음]

[효과 : 없음]

[설명 : 조잡한 화살이다.]

[조잡한 호신용 장검]

[등급 : 노말]

[제한 : Lv.30]

[효과 : 공격 시, 낮은 확률로 상태이상 ‘광견병’ 발생]

[설명 : 날이 무뎌져 공격력이 떨어진다.]

파티를 맺게 되면 기본적으로 경험치는 공유.

아이템은 그 기여도에 따라 습득 우선권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 시스템이 적용되는 건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부터다.

그러니까 이건 눈치 볼 것 없이 챙기면 된다는 거지.

‘화살은 서른두 발인가.’

당장은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화살이야 다른 놀 궁수를 사냥하고 수급하면 될 테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내 들었다.

확실히 손에 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

사격 마스터리 (21%) : 사격의 정확도가 상승한다.

───────

숙련도는 고작 21퍼센트.

‘사냥보단 퀘스트를 수행하는 데 급급했으니까.’

궁수 계열 클래스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치겠지.

하지만 스킬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주먹으로 싸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정연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와, 활도 다룰 수 있으세요?”

당연하다.

주무기라 할 게 활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파티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엥? 무도가 계열 아니셨어요? 방금 주먹질하시는 게 영락없이 무술 같았는데. 그 뭐냐. 그래! 태극권인가? 막 공격을 흘리고, 받아치시는 게 딱 그거 같았는데!”

그건 태극권이 아니라 발버둥이었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원거리 딜러가 정연 씨밖에 없어서 신경 쓰이던 참이었는데.”

그래, 나도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건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뭐라고 그랬더라?

내가 있으니 그대들은 걱정할 것 없다고?

‘폼 잡는 것도 정도껏이지. 내가 그럴 입장이냐?’

또 그따위 개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도 화제는 곧바로 옮겨갔다.

대검을 치켜든 남자, 최정훈이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저 형 왜 저래? 형! 철민이 형!!”

남철민을 부르는 것이었다.

남철민은 어느샌가 개찰구를 넘어간 상태였다.

그가 손짓했다.

“뭐해? 빨리 안 오고들?”

서정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원래 평소에도 저러세요? 제가 파티 사냥 경험이 많은 건 아닌데……. 탱커분께서 저렇게 혼자 앞서가시는 경우는 잘 본 적이 없어가지구…….”

방패와 철퇴로 무장한 전사.

한성욱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부터 이런 호흡이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하,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철민이 형이 원래 저런 양반이 아니거든요? 근데 오늘따라 왜 저러지? 이따가 제가 한번 잘 말해볼게요.”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럴 만도 하겠지.

게임에서도 문제가 되는 행동을,

목숨이 달린 균열 안에서 한 셈이었으니까.

“그래도 철민이 형이 동선은 잘 잡았네요. 다른 파티랑 만나면 시간만 버리는 건데.”

“……근데, 혼자만 너무 멀리 가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제가 불러볼게요. 형! 철민이 혀ㅇ……?!”

슈슈슉─

그건 기습이었다.

매복하고 있던 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둘…….

전부 열 마리였다.

아슬아슬하게 화살은 빗겨나갔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다.

남철민이 합류한다고 해도 정확하게 배의 차이.

“철민이 형! 아니, 형!!”

그런데 남철민에겐 합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최정훈의 얼굴이 붉어져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씨발. 왜 그러는 건데!! 야, 남철민!!”

플랫폼으로 향하는 계단.

남철민은 그곳에서 놀에게 포위당한 우리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동자를 바라봤다.

초점이 불분명한 새까만 눈동자.

어째서인가.

그 눈동자가 반갑게 느껴졌다.

‘……뭐지? 아는 사람도 아닌데?’

반가움을 느낄 게 아니라 원망할 타이밍 아닌가?

그러나 그런 의문과 무관하게 나는 행동하고 있었다.

스윽─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정석적인 자세.

마치 양궁선수가 활시위를 당기듯.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놀들을 겨눴다.

슈슉─

활시위를 놓는 그 순간까지.

내 호흡에는 약간의 흔들림도 없었다.

“깨갱!”

헤드샷.

정확하게 머리에 명중.

단발에 쓰러지는 놀 전사 한 마리.

그런데도 기쁨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의 자리는 조금의 동요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자리였다.』

고작 놀을 쓰러트리고 기뻐한다?

그건 그랑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겠지.

나 또한 같은 입장이었다.

슈슉─

또 한 번 헤드샷.

‘남은 건 여덟 마리.’

나는 다시금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놀들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크르릉!!”

놀 전사들이 달려들었다.

최정훈과 한성욱이 놀 전사를 저지했다.

각각 두 마리의 놀 전사를 막아선 두 사람.

하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할 순 없었다.

“빌어먹을……! 조심해요!”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놀 전사가 두 마리.

활시위를 장전하는 놀 궁수가 두 마리 남았다.

마법을 캐스팅하던 서정연이 울먹거렸다.

“저기, 저는 어떻게 해야……?”

놀 전사들은 나와 서정연을.

놀 궁수는 최정훈과 한성욱을 노리고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피해가 따른다.

서정연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무심하게 답했다.

“놀 궁수를 맡기겠다.”

그와 동시에 내 손끝에서 화살이 떠났다.

적중.

서정연을 향해 달려들던 놀 전사가 쓰러졌다.

덕분에 서정연은 성공적으로 캐스팅을 끝마쳤다.

“제발……. 맞아라!!”

화르륵─!

파이어 애로우가 놀 궁수를 향해 뻗어 갔다.

동족과 뒤엉킨 최정훈과 한성욱.

두 사람을 맞히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던 놈들은 파이어 애로우가 날아드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열기를 느꼈을 땐 이미 늦었다.

이제 남은 건 나를 향해 달려드는 놀 전사였다.

“크르릉!!”

내겐 ‘속사’ 스킬이 없었다.

화살을 재장전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내겐 놀에게서 획득한 호신용 장검이 있었다.

어떻게든 휘둘러서 막아내면 시간을 벌 수 있겠지.

그러나,

“유감이지만.”

내가 들어 올린 건 검이 아닌 오른쪽 다리.

고고하게 뻗은 다리가 그대로 놀 전사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첫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역습을 당한다는 선택지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그렇기에 내 육체로 표출될 수 있는 극한의 반응 속도.

“깨, 깨깽!!”

구둣발에 그대로 나가떨어진 놀 전사를 향해.

“내게 피를 튀기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푸슉─!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활시위를 당겼다.

.

.

.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매복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근데 왜 말씀을 안 해주신 거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시선이 여전히 계단 위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는 남철민을 향했다.

누구보다 화가 나는 건 최정훈이겠지.

“씨발. 형, 우리한테 뭐 감정 있어?”

그가 씩씩거리며 남철민에게 다가갔다.

그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씨발. 이건 영락없이 형이 우릴 함정에 빠트린 거잖아! 그래, 실수라고 쳐. 매복한 지 몰랐다고 쳐. 근데 왜 거기서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는 건데? 어?! 뭐라고 말 좀 해봐! 주둥이가 달렸으면!”

가까워지는 두 사람.

가만히 나눴다간 싸움이 날 게 뻔했다.

서정연과 한성욱이 최정훈을 양쪽에서 말렸다.

“이해는 되는데, 조금 진정하시죠.”

“그래요. 여기서 싸워봤자 좋을 거 없잖아요.”

“아니, 가만히 있어 봐요. 이건 나랑 형 문제니까. 형! 야, 남철민! 너 내가 형, 형 불러가면서 따라다니니까 진짜 뭐라도 된 줄 알았냐? 씨발, 제 동생 아니면 좆도 아닌 새끼가…….”

나는 한 발짝 물러나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하하하! 크하하하하하!”

그 순간, 남철민이 웃음을 뱉었다.

동시에.

지지직─

희미하게 빛나던 전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실성했나. 왜 갑자기 쳐 웃고 지랄인데?”

“하하하하! 하아……. 역시 재밌다니까.”

“이게 재밌어? 씨발, 진짜 말 다 했냐?!”

나는 깜빡거리는 조명 속에서 남철민을 응시했다.

이해할 수 없는 기행.

파국으로 치닫는 주변의 분위기.

초점이 없는 새까만 눈동자.

그 눈동자를 보고 느꼈던 반가움.

결정적으로.

이 순간, 내 시야에 떠오른 글자까지.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또각─

나는 남철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너는 악마가 맞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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