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화 (117/489)
  • ◈ 2화. 교육이 필요하다면 (1)

    아르카나가 현실에 범람한 이후.

    한국의 상징은 ‘마법사의 탑’이 됐다.

    “네, 저는 지금 마법사의 탑 앞에 나와 있습니다!”

    “우와. 저게 몇 미터야? 저런 게 하루아침에 생겨났다니.”

    “잠깐, 저거 초신성들 아니야? 랭커들을 위협한다는?!”

    마법사의 탑.

    모든 마법사들의 성지.

    아르카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장소.

    그런 마법사의 탑이 서울에 솟아난 뒤.

    뒤따라온 파급력은 말로 다 하기 힘들 정도였다.

    [마탑 효과? 랭커들이 한국에 몰려든다.]

    [마탑의 마법사들, “우린 새로운 지식을 갈구할 뿐. 우호적인 관계 원한다.”]

    [마탑 관광 여행 인기…… 작년 대비 관광객 3,000% 폭증]

    “한국을 찾은 이유요? 당연히 마탑 때문입니다. 장거리 텔레포트부터 마법 부여까지. 마탑에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상당하거든요. 그래서 저희 샤이닝 길드는 당분간 한국에 머무를 생각입니다.”

    세계 최고, 샤이닝 길드가 한국에 지부를 창설했다.

    그 샤이닝을 따라 세계 각국의 대형 길드들도 한국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낼 어마어마한 세금은 기본.

    플레이어들이 넘쳐나니 몬스터에 의한 피해도 줄어드는 게 당연했다.

    나날이 밝아지는 대한민국의 미래!

    하지만 아르카나에서 넘어온 건 마탑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빛이 있다면 어둠도 있는 법.

    ‘젠장. 나는 플레이어가 돼서도 들러리 신세야?’

    ‘나도 저렇게 잘나가고 싶었다고!’

    ‘부럽다. 배가 아파서 죽이고 싶을 만큼 부러워.’

    그래, 악마는 그 어둠에 숨어 살고 있었다.

    “처음엔 영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보면 볼수록 아르카나 대륙보다 우리 악마족이 행동하기 좋은 곳이란 말이야? 시기, 질투, 비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끊이질 않잖아!”

    이런 환경이라면 상급 악마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어.

    “언젠간 나도 마왕들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던 하급 악마, 임프.

    녀석이 먹잇감을 포착했다.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번엔 저 녀석들로 하자.”

    어제 갖고 놀다가 죽인 연놈들을 떠올려 본다.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아주 듣기 좋았었지.

    그 새끼들보다 어리숙해 보이는 게 쉬운 먹잇감 같았다.

    *

    나까지 딱 다섯.

    ‘그래도 다행인가.’

    하긴 고레벨 플레이어만 각성하란 법은 없었으니까.

    커뮤니티엔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플레이어를 찾는 구인 글이 많았다.

    아무래도 솔플은 위험하니까.

    게다가 이건 현실이다.

    죽으면 게임 오버가 아니라 그대로 끝.

    사망이라는 뜻이다.

    “저기 보이네요. 균열.”

    손가락이 향한 곳은 지하철 출구.

    아직 출근 시간이라 그런지 인파가 상당했다.

    사직서를 쓰지 않았으면 나도 저기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어느새 출구에 다다랐다.

    ……플레이어들의 시야가 이랬구나.

    오직 플레이어의 눈에만 보이는 균열.

    지하철 출구를 가로막고 있는 ‘막’이 보였다.

    그 막을 뚫고 승강장으로 향하는 직장인들.

    보다시피 평범한 사람들은 균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덕분에 지금처럼 사회가 굴러갈 수 있는 거겠지.

    [놀의 지하창고]

    [적정 레벨 : Lv35~40]

    [붕괴 진행도 : 19.8%]

    ‘균열 정보도 볼 수 있구나.’

    붕괴 진행도가 100퍼센트가 되면 균열이 무너지고 몬스터가 현실에 풀려났다.

    대격변 이후 초창기.

    플레이어도, 균열에 대한 지식도 부족할 땐 균열이 붕괴되고 몬스터가 풀려나는 일이 많았다.

    그로 인한 인명 피해는 말하기도 싫을 정도였고.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 플레이어들은 별다른 규제 없이 균열을 공략할 수 있었다.

    균열이란 시한폭탄.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오직 플레이어밖에 없었으니까.

    “진행도를 보면 먼저 들어간 플레이어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자구요! 자, 딱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정확하게 5분 뒤에 진입하겠습니다.”

    ……약간 떨리는데?

    어쩔 수 없는 반응이다.

    그야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당장 팔자에도 없던 몬스터를 사냥하게 생겼으니까.

    긴장이 되는 게 당연하다.

    ‘이럴 땐 또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기분 탓에 불과했다.

    그야 내 신체에선 조금의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더없이 꼿꼿한 목.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어깨.

    자신감으로 또렷한 시선까지.

    ……지하철에 귀족 납시었군.

    누가 봐도 오늘 처음 균열에 진입하는 플레이어로는 보이진 않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긴장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첫 경험이란 걸 생각해서 참여한 파티가 아니던가?

    [적정 레벨 : Lv35~40]

    현재 내 레벨은 55였다.

    아무리 악마 사냥꾼이 어중간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레벨 차이가 15나 되는데……. 괜히 쫄아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자자, 그럼 들어가실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같이 고생해 보자고요!”

    금세 5분이 지난 모양이었다.

    의욕을 끌어올리는 파티원들.

    누나만 셋.

    심지어 그 누나들이 전부 연년생이다.

    자매들의 전쟁에서 중립국으로 살아남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먹어온 눈칫밥이 몇 그릇인데.

    그 짬밥으로 상사들에게 예쁨받던 나다.

    나도 눈치껏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주 고상한 목소리로.

    “내가 있으니 그대들은 걱정할 것 없다.”

    ……잠깐, 누가 누굴 걱정해?!

    그러나 헛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예?”

    젠장, 파티원들이 흠칫하는 게 눈에 보인다.

    이러다가 쪽팔려서 돌아가시겠다, 진짜.

    그랑펠, 빌어먹을 내 흑역사야.

    .

    .

    .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는 말도 있다.

    되도록 입은 다물고 있는 게 좋겠군.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곧 균열에 진입하자 달라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출퇴근길, 매일 보던 지하철의 모습이건만.

    어딘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앞서가던 파티의 리더, 남철민이 혀를 찼다.

    “에스컬레이터가 녹슬어서 걸어가야겠네요. 아, 여기 계단 좀 많은데……. 그냥 몸풀기한다고 생각하고 내려갑시다!”

    그 말에 에스컬레이터를 바라보는데.

    정말이잖아?

    녹슨 에스컬레이터.

    지하 저편에서 풍겨오는 습하고, 불쾌한 냄새.

    간간이 들리는 짐승의 하울링까지.

    ‘이건 놀의 울음소리인가.’

    과연, 균열의 영향을 받아 지하철도 그에 맞는 환경으로 변화한 모양이다.

    폐허가 된 지하철역에 접근할 수 있는 건 플레이어뿐이었다.

    물론, 균열이 붕괴되면 현실의 지하철도 이런 모습으로 바뀌겠지.

    “슬슬 장비들 챙기시고.”

    “입구가 썰렁한 걸 보면 먼저 진입한 파티가 있나 본데요?”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근데, 뭐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가 환승역이라 그런가 꽤 크거든요? 루트만 잘 선택하면 다른 파티랑 안 겹치게 사냥할 수 있을 겁니다.”

    역시 파티를 구하길 잘했다.

    혼자 왔으면 어리바리 탔을 텐데 말이야.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서 장비를 점검했다.

    ‘……이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55레벨.

    지금은 저레벨에 불과할지 몰라도 당시엔 꽤나 높은 레벨에 속했다.

    당시에 장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단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누구던가?

    멋에 살고, 멋에 죽던 중2병.

    멋진 장비를 구하기 위해 용돈까지 투자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쨌든, 그 폼생폼사 덕분에 현재 내 장비의 수준은 상당히 호화로운 축에 속했다.

    [무명 대장장이의 명작 : 은제 단검]

    [등급 : 레어]

    [제한 : Lv.50]

    [효과 : 언데드족, 악마족에게 추가 피해를 준다.]

    [설명 : 실력은 출중하지만, 명성이 부족한 대장장이의 명작이다.]

    그중에서도 이 단검이 기억에 남아있다.

    경매장에서 굉장히 비싼 값을 주고 샀던 기억이 있는데…….

    설명에도 나와 있듯 당시에 굉장히 유명하던 대장장이 플레이어가 제작한 장비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계속 아르카나를 플레이했으면 지금쯤 틀림없이 굉장히 유명한 대장장이가 됐겠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래서 무기가 달랑 이거 하나뿐이야?!

    이건 낭패다.

    은제 무기는 내구도가 상당히 빈약했다.

    사냥할 때마다 내구도가 하락하고 그 수리비로 적잖은 골드가 지출되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는 골드였지만 지금은 현금이 나간다는 소리였다!

    활이 있긴 했지만, 화살이 고작 다섯 발.

    그것도 전부 은화살뿐이었다.

    내구도를 걱정하는 마당에 은화살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최대한 덜 싸우는 방향으로 가야겠는데.’

    적어도 새로운 무기를 구할 때까진 말이야.

    [놀의 지하창고-식료품 저장소에 진입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무기라고 해봤자 놀들이 사용하는 조잡한 무기밖에 없겠지.

    그래도 그걸 사용하는 게 아까운 은제 무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낫다.

    ‘아무리 그래도 레벨의 격차가 있으니까.’

    그렇게 판단했던 나는 전투가 시작되고 후회했다.

    ‘……진짜 이호열 이 자식아!’

    아무리 은제 무기가 멋있어도 그렇지.

    실용적인 무기 하나 챙겨두는 게 그렇게 어려웠냐?!

    “크르르렁!!”

    개 인간, 놀.

    현실의 녀석들은 아르카나에서 본 것보다 훨씬 빠르고 영악했다.

    지하철역에 적응이라도 한 건지.

    복잡한 지하철역의 지형지물을 활용해서 우리를 습격해 왔다.

    슈슉─!

    시야의 사각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간신히 피해낸 마법사, 서정연이 소리쳤다.

    “놀 궁수! 저기 자판기 뒤에 숨었어요!”

    어째 우리 파티보다 역할 분담이 제대로였다.

    나는 남철민 쪽을 바라봤다.

    ‘……요샌 이렇게 파티 사냥하나?’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남철민의 클래스는 누가 봐도 탱커였다.

    커다란 방패와 판금 갑옷이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남철민은 파티를 보호하기는커녕 대열을 이탈한 상태였다.

    ‘잘 모르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내가 밥값을 못 하는 상황.

    마법사, 서정연은 우리 파티의 유일한 원거리 딜러였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자판기 쪽을 바라봤다.

    과연, 자판기 뒤엔 두 마리의 놀 궁수가 있었다.

    ‘화살을 재장전 중이구나.’

    지금이 기회인가?

    머리를 굴려본다.

    그래, 기회다.

    놀 궁수는 근접 전투력이 형편없다.

    녀석들을 쓰러트리면 화살을 빼앗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투력이 형편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게다가 이쪽은 이런 전투가 10여 년만이란 말이다.

    또각─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나는 유유히 걷고 있었다.

    내 걸음걸이엔 여유가 넘쳤다.

    마치 놀들 따윈 내게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듯.

    당당하게 놀 궁수를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그래, 머리로는 온갖 변수와 위험성을 따지고 있었지만.

    몸은 솔직했다.

    나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놀 무리에게 겁을 먹기에는.

    내게 덧씌워진 그랑펠의 자신감이 너무나도 컸던 것이었다.

    “저, 저기요? 위험해요! 무기도 없……?”

    문득, 귓가에 서정연의 고함이 들린 듯했다.

    하지만 끝까지 듣진 못했다.

    내가 듣지 못한 건지.

    서정연이 말꼬리를 흐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크르릉!!”

    송곳니를 드러낸 채.

    적의를 드러내는 놀 두 마리.

    또각─

    나는 가뿐하게 그들에게 접근한 뒤.

    또각─

    두 녀석의 콧잔등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그 일련의 동작에는 여유를 넘어서 기품이 느껴졌다.

    그런 내 시야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훈육이 덜 된 모양이구나.”

    마치 키우는 사냥개를 나무라는 것처럼.

    “내키진 않지만, 경우에 따라선.”

    그건 아득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귀족의 태도였다.

    “체벌도 필요한 법이지.”

    ……깨, 깨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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