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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황립 어린이 아카데미 (77/77)


77화. 황립 어린이 아카데미
2023.08.25.


시녀 언니들이 너무 수상쩍었다.

게다가 재판 이후로 자꾸 ‘아빠가 진짜 호구인 게 맞을까?’라는 의심이 들고 있던 참이었다.


‘이 언니들, 좀 찔러 봐야겠는데?’

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찰떡같이 유도신문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어느새 마차의 문이 빼꼼히 열렸다.


“레온하르트, 애시드?”

나는 열린 마차의 문 틈새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을 향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뭔가 단단히 정신 교육을 받고 온 듯 비장한 표정의 레온하르트와 애시드였다.


“아니, 꿀빵!”

“저 왔어요, 시엔 님.”

레온하르트가 거만하게 내 왼쪽 자리를 차지하며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


“왜 그렇게 느끼한 표정이야?”

“느끼라니! 그게 아니다.”

“그럼?”

그때,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오른쪽 옆자리를 차지한 애시드가 조용히 속삭였다.


“마티어스 님의 은혜로, 저희도 아카데미에 가게 되었거든요.”

“그래?”

나는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나야 아카데미에 갈 만하다지만, 레온하르트는 불세출의 천재라 굳이 아카데미를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재미있을 것 같군.”

‘……그래, 저 아이들에게도 친구가 있으면 좋겠지.’

기왕 아카데미에 가게 되는 거, 재미있는 일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보다 아빠의 수상쩍은 모습에 대해, 시녀 언니들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아빠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레온하르트 앞에서 아빠 이야기를 꺼내기는 조금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가족이 없으니까……. 나중에 물어보면 되지!’

화제를 돌리기로 한 나는 내 양옆을 기사처럼 지키고 앉은 레온하르트와 애시드의 양손을 각각 움켜잡았다.

그들은 내가 아카데미에 간다고 하니까 바로 입학 신청서를 냈을 정도였다.

사실 이제 열 살이나 되었기 때문에 혼자 가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꼭 따라가겠다고 성화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지금까지 쌓아 온 신뢰가 두텁다는 사실이 꽤 뿌듯하기까지 했다.


“다들 얼른 아카데미 가자!”

그때 애시드가 살짝 주눅 든 듯이 속삭였다.


“괘, 괜찮을까요?”

“웅? 왜?”

“텃세가 심하다던데.”

“그럼 내가 지켜 주께!”

애시드가 놀란 토끼 눈을 뜬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웅장하게 눈을 부릅뜨며 그를 응시했다.

나는 당연히 애시드가 부끄러워하며 ‘네!’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뇨, 제가 지켜 드려야죠.”

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당황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볼 때까지도, 애시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우리 셋이 탄 마차는 굽이굽이 비포장된 도로를 지나 화려한 대로에 접어들었다.

귀족들을 위해 만들어진 황립 어린이 아카데미는 제국의 중심에서도 가장 비싼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더니, 역시나 그랬다.

미르모드 가문의 화려함에 익숙해진 내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사한 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결국 와 버렸다.

황립 어린이 아카데미에!


“……휴!”

황립 어린이 아카데미.

물론 아빠가 나를 아무렇게나 아카데미로 방생한 것은 아니었다.


‘좌측에는 애시드, 우측에는 레온하르트가 있다, 이거지.’

비록 애시드의 말대로 이미 아카데미 안에서 인맥이 끈끈하게 형성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이 정도면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옆에는…….


“후후후, 벌써 기대되는군요!”

……근육으로 위풍당당한 시녀 언니들까지 있으니까!

텃세가 심하다고는 해도 설마 미르모드인 나를 공격할 리는 없을 거였다.


‘아카데미에서는 조금 편하게 지내게 될지도 몰라!’

나는 금박 장식이 되어 있는 복도를 뽀짝뽀짝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도 황금, 저기도 황금!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오는 광경이었다. 아카데미는 제국 지식의 보고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돈으로 금칠을 한 것처럼 보였다.


“여긴 왜 이렇게 반짝거리지?”

레온하르트가 가면을 슥 올리며 말했다.


“아카데미 졸업생들이 대부분 제국의 핵심 인력이 되고, 그들이 아카데미 리모델링 공사비를 꾸준히 지원해 주고 있거든. 한 마디로 선순환!”

그 사실 자체보다도 레온하르트가 아카데미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는 레온하르트의 가면 너머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고 보니 맨날 쓰던 가면도 어쩐지 평소보다 더 반짝반짝한 것 같았다.


‘설마, 아카데미 온다고 기대 많이 했나?’

레온하르트 역시 또래 친구를 사귈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 기대할 만하기도 했다.

함께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나는 레온하르트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밝게 말했다.


“고마워, 스피드 왜건. 아, 아니. 레온하르트!”

“훗, 이 정도쯤이야.”

레온하르트가 콧대를 세우는 모습을 멍하게 보던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분이 시엔 미르모드 님이라며?”

“그 왜, 재판장에서 친자 검사를 한 분 말이야?”

“그래, 그분!”

아카데미의 어린이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귀를 후볐다. 어떻게 저 아이들이 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뭔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보통 이렇게까지 소문이 나나?’

마치 누군가 뒤에서 조종한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역시 마티어스 님께서 뭔가 하셨나 보군.”

“……?”

레온하르트의 말에 나는 귀를 쫑긋했다.


‘우리 아빠가 뭘 했다고?’

상당히 의구심이 드는 혼잣말이었다. 나는 레온하르트의 손을 꼭 움켜잡은 채로 고개를 픽 돌렸다.


“우리 아빠가 뭘 해?”

“어? 어?”

“방금 엄청 엄청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했잖아. 우리 아빠가 뭐 했나 보군, 이렇게.”

레온하르트는 상당히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그게. 너 귀가 좋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급하게 혀를 깨무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묘한 의문을 느꼈다.


“……왜 말을 돌려? 뭘 했냐구우.”

‘이렇게 된 이상 정면 승부 간다!’

정면 승부란!

바로바로, 시엔표 말꼬리 늘이기 스킬을 사용하는 것!

나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오리입을 내밀며 툴툴거리는 척을 했다.

레온하르트는 내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자마자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그, 그게. 왜 입을 그렇게 내밀어!”

“웅?”

“……삐쳤어?”

“아아니. 그냥 말해 주면 되잖아.”

그때였다.

우리 둘의 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있던 애시드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별일 아니었어요.”

“……어?”

“시엔 님이 걱정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애시드가 수선화처럼 청초하고 고운 미소를 지었다.


‘뭔가 선이 그어진 느낌.’

묘하게 평소의 애시드와 다른 모습에 나는 당황해서 눈만 끔뻑거리다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 그래…….”

“네, 어서 들어가요.”

애시드의 표정을 차분히 살펴보니 다시 평소와 비슷하게 다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레온하르트와 한참 투덕거렸더니 애시드에게 신경을 못 쓰고 있어서 낯설게 느껴졌나 보다, 하고 넘기기로 했다.

나는 레온하르트, 애시드를 향해 한 손씩 척 내밀었다.


“자아, 얼른 들어가자!”

 

***

우리 셋은 아카데미 교실 안에 기운차게 들어섰다.

교실 맨 뒷자리에 우리를 위해 배정된 세 개의 빈 좌석이 쪼르르 놓여 있었다.

나는 시녀 언니가 싸 준 책가방을 걸상에 놓은 다음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묘한데?’

분명 자습시간이고,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떠들어도 되는 것 같은데 말이다.

또래 친구들끼리 이미 눈짓을 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를 배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싸늘한 정적이 찾아 왔었지?’

나는 공연히 의자를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내 보았다. 아이들이 몸을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고개를 빼꼼히 돌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우리에게 호기심 정도는 가지고 있는 눈치였다.


“밤톨.”

“웅?”

“여기 분위기 되게…….”

‘레온하르트도 역시 분위기가 이상한 걸 아나 봐!’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에 호응할 준비를 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분위기 되게 좋은데? 친구 많이 사귈 수 있을 것 같다!”

안 그래도 스산했던 교실 분위기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얼음처럼 변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역시 레온하르트는 매번 가문 안에만 있어서 모르는구나!’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다시 귀에 못처럼 박혀 왔다.


“흥!”

“저 애가 시엔 미르모드인가 봐!”

“그 악……의 딸 말이지?”

‘악……의 딸’이라는 말에 나는 눈매를 치켜올렸다.

레온하르트가 귀를 쫑긋하고, 애시드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는 게 보였다.

저 둘은 저 아이들이 정확히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눈치챈 것이었다.


‘정확히는 못 들었지만, 분명 뭔가 있어.’

나는 애시드와 레온하르트에게 찌릿, 하고 시선을 고정한 뒤 아이들이 하는 말을 엿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

미르모드 가문에서 아카데미에 무려 세 명을 낙하산으로 전입시켰다!

이 사실은 아카데미 학생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황립 어린이 아카데미는 입학 시험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곳이었다.

그런데 아카데미의 입학 시험조차 치르지 않고 중간에 당당히 들어오다니?

과장해서 말하자면, 입시 비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미르모드 가문 아닌가. 미르모드 가문에 차고 넘치는 악명만큼이나, 그 가문에 이를 갈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친 황태자파 가문의 아이들 말이다.

대표적인 친 황태자파 가문의 꼬마 숙녀, 리에나가 입을 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어!”

“그렇지.”

“어떻게 중간에 비리로 입학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리에나는 새처럼 쫑알거렸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미르모드 가문의 위세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리에나에게도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무서운 표정을 힐끗 본 리에나가 일부러 목청을 돋우었다.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로 우리를 겁박할 수는 없거든!”

초대 황제의 명에 따라, 아카데미 내부는 면책 특권이 적용되었다.

그들은 공연히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로 시엔을 쏘아보았다. 자신을 노려본다는 사실을 알 텐데도, 시엔은 별다른 반응 없이 책상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도리어 그녀의 곁에 있는 레온하르트와, 신전의 힐러라는 소문이 자자한 애시드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절로 땀이 흐르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쫄지 않은 척 입을 놀렸다.


“저 아이, 상단을 키운 것도 본인의 재량이 아니라고 했어.”

“그, 그건 새로운 소식인걸?”

하도 의식하다 보니 연극조의 말투가 흘러나왔다. 리에나는 시엔 쪽을 힐끗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튼, 크게 잘못됐어! 성과를 증명하지 않은 아이가 우리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부당해!”

“맞아, 천부당만부당하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고어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입을 모아 시엔과 레온하르트, 애시드의 부정 입학을 비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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