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인기 많은 아기 공녀님
(76/77)
76화. 인기 많은 아기 공녀님
(76/77)
76화. 인기 많은 아기 공녀님
2023.08.22.
가벼운 어조로 한 폭탄선언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어졌다. 대략 3초 정도 정적이 흐른 뒤, 측근들이 빠르게 입을 열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역시 농담이시죠. 하하, 참. 소공작 각하께서도 역시 유머 감각이!”
“뛰어나십니다! 하하하!”
마치 상사의 개그에 억지로 웃어야 하는 사람들처럼 웃고 있었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그들이 비록 악행을 저지르고 다닌다지만, 게다가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악행 계에서는 전례 없는 불세출의 천재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신전과 황궁이었다.
동시에 없애려다가 고래 등에 낀 새우처럼 사망하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농담인 양 넘기려던 시도는 빠르게 실패하고 말았다.
“유머 감각?”
마티어스가 싸늘한 표정으로 눈앞의 사내들을 응시했다. 몸의 두께로만 따지면 장정 셋을 합친 것처럼 거대한 자가 눈을 크게 부릅뜨며 반문했다.
“그, 그러니까. 진심이십니까?”
옆에 서서 마티어스를 향해 보고하던, 상대적으로 왜소하지만 온몸에 그림 같은 타투가 있는 남자가 팔꿈치로 거구의 옆구리를 찔렀다.
“허허, 자네! 말이 되나! 농담을 진담으로 받지…… 말…….”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의 눈에는 단 한 줌의 유머도 없었다.
‘등 뒤에서부터 쭈뼛거리는 소름이 올라오는 듯한 이 기분은 뭐냔 말이야!’
상대적으로 체구가 왜소한 측근이 마티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 거짓이시죠? 설마 진짜로 신전과 황궁을 대적하실 것은 아니잖아요!”
“왜. 그러면 안 되나?”
마티어스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심기가 불편할 때 자주 나타나는 낯이었다. 그가 저런 표정을 할 때면 최소한 성곽 한 채는 개박살이 났다.
측근들이 공포에 떨며 복창했다.
“되, 됩니다!”
모든 측근들이 빠르게 답한 뒤 고개를 조아리자마자, 마티어스가 불쑥 말했다.
“내가 헛소리라도 하는 것 같아 보였나 본데.”
말을 더 잇지 않은 채로, 마티어스가 몸을 일으켰다.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거구의 사내가 몸을 설핏 떨다가, 제 앞에 다다른 매끈한 구두코를 보고 굳어졌다.
마티어스의 것이었다.
그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그, 그러니까. 마티어스 님?”
제 측근이 숫제 딱따구리처럼 이를 딱딱 부딪치는 모습을 보던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지금 당장은 아니야. 시엔의 눈을 돌려놨으니, 가문의 쓰레기부터 청소해야지. 시작은…….”
마티어스가 발을 경쾌하게 몇 번 움직였다. 그러나 측근들의 등줄기에는 여전히 식은땀이 흘렀다. 마티어스의 목소리가 들뜬 것처럼 느껴질 때면, 언제나 피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측근이 차마 고개는 들지 못한 채로 우물쭈물거리며 입을 뗐다.
“시, 시작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마티어스가 이내 우아하게 빠져나갔다. 집무실에 남은 측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바로 가문의 쓰레기들을 청소하게 될 줄은 몰랐어.”
“……간만에 몸 좀 풀 수 있어서 좋긴 한데, 당분간 야근이겠네?”
그들은 지금까지, 시엔에게 자신들의 사악함을 들키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마티어스의 명에 따라 체질에도 안 맞는 선행을 일삼아 왔다. 어린이 단체에 봉사 가기, 월급의 10분의 1을 보육원에 기부하기 등…….
평소에 하지 않던 선행을 하다 보니 무디게 보였을 뿐 그들 역시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최측근답게 악역이기는 했다.
“……아니, 대체 왜, 왜 저렇게까지 야차처럼 변하신 거야?”
“원래는 저 정도까지 불쾌해 보이시지는 않으셨잖아.”
“뭔가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가?”
“……가문 내의 측근들을 척결하는 거야, 웃으면서 말하실 텐데 말이지.”
그 순간, 측근 하나의 뇌리에 놀라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시엔 님께서 오늘 아카데미에 처음 가셨잖아…….”
“……어?”
“그럼, 서, 설마?”
순간적으로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은 측근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나가시면서, ‘시엔이 보고 싶군.’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
서서히 좁혀지는 추리에 그들은 응접실에 놓여 있었던 시엔의 사진이 사라진 것을 보고 전율했다.
“그럼, 정말 마음이 불편하셔서 그런가?”
“이게 학부모의 마음?”
“시엔 님이 아카데미에 잘 적응을 못 하실까 걱정되어서……?”
“……서, 설마 마티어스 님이 그럴 리가 없지. 불경한 생각을 멈춰!”
그들의 머릿속에, 이미 시엔을 껴안고 호구 아빠인 척하던 마티어스의 모습이 뭉게뭉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그렇지만 맞는 것 같은데…….”
***
바로 그때, 측근들의 짐작대로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머릿속에는 오직 시엔 뿐이었다. 제 딸의 성장을 위해 가문의 불순분자들을 해치우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엔의 안전이었다.
그러니 그가 아카데미로 향할 시엔의 곁에 그녀를 지킬 경호원을 선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황태자는 당분간 몸을 사리겠지만,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그러니까 시엔은 조금…….
‘압빠! XXX해 봐!’
욕설을 잘하고, 아니, 아니지. 명랑하며 맹랑하고…….
‘시엔 님께서는 다섯 살 같지 않게 상단을 잘 운영하고 계십니다.’
천재적이며…….
‘열 살이신 지금도 정말 어마어마한 성장 동력을 갖추고 계십니다. 아카데미에 가도 잘하실 겁니다.’
확실히 그 누구보다 똑똑한 아이였다. 또래가 아니라 어른인 것처럼 조숙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 내 딸은 귀여워.’
그는 뿌듯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미리 불러 둔 레온하르트와 애시드가 긴장감을 완연히 드러낸 채로 앉아 있었다.
“오늘 너희를 불러낸 이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네?”
“모, 모르는데요. 그보다 왜 그리 비릿한 미소를 지으시는 거죠?”
레온하르트의 말을 들은 마티어스가 미간을 미미하게 좁혔다.
비릿한 미소를 지을 생각은 없었는데, 레온하르트가 보기에는 불온해 보인 듯했다.
‘시엔은 호구 미소라고 좋아했는데.’
그는 찌푸린 인상을 펴기 위해 노력하며 레온하르트와 애시들르 응시했다. 적어도 오늘은 누군가를 겁박할 게 아니라 시엔의 친구에게 부탁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었으니까.
그러자 애시드와 레온하르트가 서로를 바라보며 한결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티어스는 두 꼬마를 바라보며 다짜고짜 운을 뗐다.
“너희에게 좋은 기회를 주려고 한다.”
“……네?”
순간적으로 레온하르트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그 어떤 일에도 감정 변화가 없다는 가면을 쓴 소년이지만 마티어스의 악명 앞에서는 무력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얌전하게 고개를 숙인 애시드가 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의외로군.’
마티어스는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그들을 넘겨다보며 말했다.
“너희 둘에게 할 말이 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신지요…….”
마티어스는 제 앞에 있는 작은 맹수들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너희 둘도 어린이 아카데미에 간다.”
“어린이 아카데미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계속 놀란 표정이었다. 마티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래, 어린이 아카데미.”
“그런…….”
그때 애시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엔 님도 가시나요?”
“아직 전달을 못 받은 모양이군. 너희는 시엔의 경호 역할로 가는 거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애시드와 레온하르트가 동시에 눈을 빛냈다. 애시드는 양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레온하르트는 몸을 들썩이면서 “네, 갈게요!”라고 외쳤다.
‘이것 봐라.’
대체 제 조그만 딸은 이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인 걸까. 레온하르트도, 애시드도 어두운 과거를 지닌 소년들이었다. 그들이 시엔의 햇살 같은 인간적인 매력에 끌려 자연스레 옆에 있다는 게 묘하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나빴다.
시엔이 자신에게만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유쾌했고, 제 조그만 딸이 다른 사람의 삶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에 미세하게 기뻤다.
‘우리 아기에게도 나 말고 다른 인간관계가 생기는군.’
그는 햇살에 눈이 부신 이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속삭였다.
“너희가 가서 할 일은 하나다. 시엔을 지키는 것.”
“자신 있습니다!”
“시엔이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협조해.”
애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협조할 겁니다.”
“하지만 말이다. 사소한 문제가 있어. 아카데미는 2월에 입학 시험을 치르거든.”
레온하르트가 개월 수를 세듯 손가락을 하나둘 접다가 짧게 침음을 삼켰다.
“아, 지금은 입학 시기를 한참 지났네요!”
“그래.”
“그럼 어떻게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거죠?”
마티어스가 입매를 올렸다. 입꼬리만 슬쩍 올린 그의 표정은, 악명이 자자한 악한이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바짓바람이 극심한 아빠처럼 보였다.
언제 봐도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습에 레온하르트가 몸을 주춤거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마티어스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어 서류를 하나 꺼내 들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그의 손에는 아카데미의 입학 서류와 일정표, 수업 시수 등이 적혀 있는 깔끔한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중간 입학.”
“중간 입학이 뭔가요?”
아카데미 중간 입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레온하르트와 애시드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마티어스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다. 아카데미에 정식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기부를 해서 중간에 입학하는 방식이지.”
“기부 입학 같은 개념이군요.”
“그래. 듣자 하니 중간 입학자들에게는 텃세가 심하다던데.”
“…….”
“너희 셋을 기여 입학으로 아카데미에 보낼 생각이다.”
“그럼…….”
그의 손에 있던 새하얀 서류가 팔랑거리며 흩어졌다.
“시엔이 아카데미에서 즐겁게 놀 수 있도록 협조해.”
마티어스는 시엔이 아이답게 친구도 사귀고, 행복하게 노는 동안, 시엔의 행복한 시간을 위해 가문의 끄나풀들을 전부 죽여 없앨 것이었다.
“아, 그리고 그곳에서 너희들이 할 일이 하나 더 있어.”
“……네.”
레온하르트와 애시드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마티어스를 응시했다.
“그 누구도 시엔에게 내 악명을 알려서는 안 될 거야.”
그때, 가만히 있던 애시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시엔 님의……. 동심을 지켜 드리는 건가요?”
동심이라는 말에 마티어스의 입꼬리가 그린 듯이 올라갔다.
“그래, 동심.”
***
“휴! 아빠가 또!”
다음 날 아침, 마차 안.
폭신폭신한 마차에 쏙 들어앉은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 네?”
근육 시녀 언니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손에 마도구를 든 채로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또 연락해써! 아직 아카데미 가는 마차 출발도 안 했는데!”
아카데미 기숙학교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고작 등하교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극성 학부모처럼 구는 아빠를 보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중에 우리 아빠, 헬리콥터 부모 되는 거 아냐?’
진짜로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순간 오싹해졌다.
“그…….”
“……왜 그래, 언니? 꼭 오줌이라도 지린 사람 같아!”
아닌 게 아니라 공포에 덜덜 떠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데드리 언니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속삭였다.
“오줌은 아직 안 지렸고요…….”
데드리 언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벤치 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가 ‘아빠가 계속 연락해! 하여튼 걱정 보따리야!’라고 말만 하면 얼굴에 식은땀을 가득 흘리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아빠 얘기만 나오면 자꾸 저렇게 군단 말이지.’